소설리스트

12화 (13/98)

 12화.

 6. 시발점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절정의 끝자락에서 문득 그와 같은 물음이 튀어 올랐다.

 10년 전 그 밤을 화대라 칭했던 게 잘못이었을까. 오랜만에 재회한 널 향해 살갑게 인사하지 못한 내 옹졸한 외면이 잘못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너와 함께 했던 마지막 밤 널 붙잡고 매달렸던 게 잘못일까.

 그렇게 이 어긋난 관계의 이유를 찾고 또 찾다가, 결국 가장 절망적이고도 아픈 결론에 이르렀다.

 열아홉, 너와 내가 서로의 인생에 끼어든 것부터가 이 불행의 시발점이었다고.

 * * *

 “야, 들었어?”

 명령과 다를 바 없는 고백을 들었던 그다음 날. 권도하와의 교제는 수락의 과정도 없이 기정사실화되어 학교 전체를 휩쓸었다.

 “권도하랑 윤다경 사귄다며?”

 “뭐야. 그렇게 도도한 척 굴더니 결국 사귄대?”

 가타부타 변명할 기회 같은 건 주어지지 않았다. 학교에 왔을 땐, 이미 저를 둘러싼 공기마저 바뀌어버린 뒤였으니까.

 “야, 입조심 해. 그 말 못 들었냐? 그러다 권도하한테 걸리면 우리 다 죽어.”

 동시에 창부 딸이라느니, 걸레 같은 계집애라느니. 들으란 듯이 수군거리는 말들도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욕은커녕 함부로 쏘아보는 눈총 또한 더는 없었다.

 네 구정물까지 뒤집어써주겠다 장담하던 그 말을 단번에 실감케 하는 반응이었으나, 그래서 더 씁쓸함이 밀려들기도 했다.

 그간 그토록 불합리함을 피력했음에도 끊이지 않던 욕설이 권도하와 엮이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대번에 바뀔 수 있다는 사실에.

 대신, 다경을 대하는 눈들에 선명한 두려움이 차올랐다.

 마치 잘못 엮이기라도 했다간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몸을 사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저 사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보이는 반응이라기엔 어쩐지 유난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물론 사귄다는 것조차 아직 사실이 아니었지만, 권도하가 무슨 말을 덧붙인 게 분명했다.

 “대체 애들한테 뭐라고 한 거야?”

 점심시간. 급식을 먹고 나오는 권도하를 음악실로 끌고 들어가 다그치듯 물었다.

 “뭐냐, 이 은밀한 장소 선정은?”

 묻는 말엔 답하지 않은 녀석이 단둘뿐인 공간을 슥 훑어보며 능글맞게 눈초리를 휜다.

 “괜히 이상한 데로 빠지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샛길로 빠지려는 말을 다경이 단호한 목소리로 다잡았다.

 “뭐라고 한 건데? 뭐랬길래 다들 나만 보면 살살 피하는 거냐고.”

 “별말 안 했는데.”

 도하가 벽에 등을 기댄 채 어깨를 짧게 으쓱한다. 도저히 별말을 안 했는데 보일 반응들이 아니건만, 대놓고 시치미였다.

 “그냥 내가 가서 직접 물어볼까? 김주미한테 물어보는 게 제일 빠른 거지?”

 “아. 왜 이래, 진짜 별말 안 했다니까.”

 더는 말장난 할 생각 없다는 듯 몸을 돌리자 기민한 손이 낚아채듯 손목을 쥐었다. 그러곤 이내 대수로울 것 없다는 어조로 그 별말 아니라는 멘트들을 하나씩 읊기 시작했다.

 “한 번만 더 윤다경한테 손대면 손모가지를 분질러버리겠다. 헛소리 지껄이면 혓바닥을 뽑아버리겠다. 고깝게 쳐다보면 눈깔을 파버리겠다. 뭐··· 대략 그 정도 지껄인 게 전부라고.”

 결 좋은 눈썹이 무슨 문제될 것 있냐는 듯 까닥 치켜 올라갔다.

 “대략 그 정도?”

 듣기만 해도 섬뜩한 말들을 평이한 어조로 뱉는 얼굴을 보곤 다경은 낯빛이 아연해졌다.

 “야, 그게 그냥 그 정도니? 그게 별말이 아냐?”

 “내 말이 뭐 어때서.”

 “너 그거 협박이야! 아무리 말뿐이라도 그렇지, 그런 무지막지한 소릴···!”

 “누가 그래, 말뿐이라고.”

 시종 장난스럽게 대꾸하는 것 같던 낯이 일순 싸늘하게 바뀌었다.

 “진짠데. 걔들도 그걸 알아서, 몸 사리는 거고.”

 서늘하게 내리닫는 암흑 같은 시선에 다경은 문득 등허리가 서늘해졌다.

 진짜 그럴 작정이라니. 말뿐이 아니라니.

 “···이 미친놈.”

 행간을 파악하기 무섭게, 뇌를 거치지 않고 욕이 샜다. 그냥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충분히 제정신이 아니다 싶었건만, 진심이라는 그 말에 다경은 더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경악을 금치 못할 멘트를 태연히 뱉어낸 녀석은 여전히 뻔뻔했다.

 “이제 알았냐?”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살짝 떼어낸 도하가 낮게 고개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내가 너 한정, 충성도 넘치는 미친 개새끼인 거.”

 그렇게 말한 늘씬한 입술이 짓궂은 호선을 그린다. 제 입으로 너의 개가 되어보겠노라 말하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막무가내로 나올 줄은 몰랐다. 대체 어쩌려고 이러나 싶어, 이젠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너 그러고 다니는 거 네 부모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건 네가 신경 쓸 거 아니고.”

 태평하게 대꾸하는 말에 다경이 발끈하여 되받아쳤다.

 “아니. 충분히 신경 쓸 일이거든?”

 다른 부모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학교 이사장씩이나 되는 권도하 부모의 귀에 저와의 염문이 들어갔다간 녀석은 물론이며 저 또한 좋을 것이 없었다.

 “네가 잊고 있는 것 같아서 하는 소린데, 난 이런 상황 바란 적 없어. 아직 너랑 사귄다고 대답한 적 없다고.”

 “걱정 마. 안 잊고 잘 기억하고 있으니까. 근데 너야말로 그건 알고 있냐?”

 “뭐?”

 “네가 지금 그런 거나 걱정할 때가 아닌 거.”

 그럼 뭘 걱정할 땐데?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이, 머리 위로 성큼 그림자가 졌다.

 “무슨···.”

 “그러고 보면 참 나에 대한 경각심이 없어, 윤다경.”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던 찰나, 불현듯 팔이 낚아채였다.

 “아!”

 “사심 가득한 새끼랑 이런 밀폐된 공간에 들어와 놓고.”

 둔중한 마찰력과 함께 그대로 벽으로 밀어붙여지며 도하와의 위치가 대번에 역전되고 말았다.

 “내가 너한테 뭔 짓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안 들어?”

 어느 틈에 벽으로 다경을 몰아세운 녀석의 눈이 먹잇감을 주시하는 안광처럼 번뜩였다. 무슨 상황인지 사고할 틈도 없이 얼굴이 기울어졌다.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음악실 벽에 맞닿은 손목 위로 가해지는 악력이 올가미처럼 억세다. 좁혀오는 거리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키스라도 하려는 걸까.

 그대로 입술이 닿아버릴 것 같아 질끈 두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약은.”

 “···.

 입술을 잠식할 것이라 여겼던 더운 기운이 뜻밖에도 생각지 못한 곳에 당도했다.

 “바르고 있냐?”

 왼쪽 눈가를 슥 문지르는 손길과 함께 숨쉬기를 멈춘 동그란 콧방울 위로 호흡이 번져갔다.

 눈을 뜨자 어제 김주미 일당에게 할퀸 상처에 머물러 있는 새카만 동공이 보였다. 상처를 훑는 듯하던 시선이 천천히 되돌아와 다경의 경직된 눈동자와 마주쳤다.

 “어제 보건 샘이 챙겨 준 연고는 어쨌어. 손톱자국은 흉진다고 약 꼬박꼬박 바르라던데.”

 하루 새 짙어진 상흔을 마뜩잖은 눈으로 내려다보며 쯧, 혀를 찬다. 지척에서 흩어지는 숨결이 코며 입술을 함부로 더듬었다. 동시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혀끝이 떨려왔다.

 “아, 아침에 발랐거든? 손 치워!”

 당혹스러움에 더듬듯 대꾸한 다경이 부리나케 눈가에 닿은 손을 치워냈다.

 “그냥 물어보면 될 걸 괜히 얼굴은 들이대고 난리야.”

 괜스레 달아 올라버린 뺨이 더욱 그녀를 정신없게 만들었다.

 “왜.”

 외면하듯 돌아간 고개 옆으로 기다란 팔이 퇴로를 막듯 짚어졌다.

 “키스라도 할 줄 알았나 보다? 눈까지 곱게 감고.”

 얄밉게 입꼬리를 당겨 올린 녀석이 발개진 눈가를 톡톡 두드리며 놀리듯 속삭였다.

 저, 저 미친 변태가···.

 차마 말로는 못 뱉고 질끈 씹은 입 안 가득 욕을 굴렸다. 그러자 벽을 짚은 팔을 바로 한 녀석이 한 걸음 물러선 채 나른하게 웃었다.

 “그래서, 오늘 학교 생활은 좀 평안했고?”

 내내 제 고단함을 토로했건만 평안했냐 묻다니. 기가 차서 격렬한 반항심이 들끓었다.

 “아니. 덕분에 아―주 불편했다. 왜?”

 “그래?”

 의외라는 듯 눈썹 앞머리를 모으더니 빤한 눈으로 다경의 낯을 훑었다.

 “종일 불편했다는 것 치곤 너무 예쁜데? 대낮부터 꼴리게.”

 “미친놈.”

 기어코 제 안에서 또 한 번의 욕을 끌어냈다. 뭐가 좋은지 권도하가 하하 소리를 내어가며 웃었다.

 이쯤 되면 욕먹는 걸 즐기나? 합리적인 의심이 들 정도였다. 어쩐 일인지 녀석을 대할 때마다 갈수록 피로감이 짙어진다.

 “분명히 말했어, 난. 아직 너랑 사귀겠다고 말한 적 없다고.”

 “글쎄, 안다니까.”

 싸늘한 선 긋기에도 여유로움을 잃지 않은 채 권도하가 대꾸했다.

 “그래도 간은 대충 봤잖아? 나랑 사귄다는 것만으로 널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바뀌는지. 그래서 너도 아무 소리 않고 이 상황 묵인한 거 아니야?”

 씁쓸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사실에 다경은 소리 없이 입 안 살을 짓씹었다.

 권도하의 말대로였다.

 오해하는 반 애들에게 바로 아니라고 해명할 수 있었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하루아침 사이에 바뀐 그 공기가 낯선 것과는 별개로 안락했기 때문이다.

 전학 첫날부터 대놓고 수군거리던 애들이 제 눈치를 살피며 조심하는 게 묘하게 짜릿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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