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물론, 무슨 귀신 보듯 피하는 건 그것대로 씁쓸할 일이었으나 적어도 맥락 없이 욕을 들어먹는 상황보다는 백 배 나았다.
하지만 아직 고백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면서 그 소문들을 방관하는 것 또한 께름칙한 건 사실이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졸업까지 6개월이다.”
밀려드는 상념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권도하가 말했다.
“너랑 내가 적당히 장단 맞추면 되는 시간.”
무슨 뜻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녀석이 뒤쪽에 있는 피아노에 몸을 기대며 거만한 투로 덧붙였다.
“그때까지 내가 네 남친 행세해줄게.”
남친 행세라. 아무래도 아직 사귀겠다 말한 적 없다는 제 선 긋기에 대한 저 나름의 결론인 듯싶었다. 동시에 다경의 입에서 피식 헛웃음이 터졌다.
저야 그렇게 해서 내내 고달팠던 학교생활을 조용히 마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일이지만, 얜 대체 무슨 득을 보겠다고 거짓 남친 역할까지 해주겠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권도하가 억지로 제게 뭔가를 요구할 타입도 아니건만. 아니면, 이제부터 그걸 빌미로 내게 뭔갈 요구할 작정인 걸까?
“넌 대체 무슨 생각인데?”
도저히 그 속을 알 수가 없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묻자, 권도하가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매끄러운 턱 끝을 두어 번 문지르는가 싶더니 이내 기다란 눈꼬리를 사악하게 접어 웃었다.
“이 예쁜 걸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빨리 꼬실 수 있을까, 하는 아주 맘 바쁘게 음흉한 생각?”
무방비한 틈을 타 다가온 손끝이 뺨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슬쩍 걷어 넘긴다.
“혹시 또 알아? 이렇게 남친 행세라도 하면···.”
귀밑머리를 지나 귓등을 훑고 내려가는 손길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네가 혹해서 넘어올지.”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가는 온기 뒤로, 별안간 귀 끝까지 열이 올랐다. 특별할 것 없는 미약한 접촉일 뿐인데 심박이 빨라졌다.
“···언젠, 존나게 못생겼다더니.”
왜 자꾸 얼굴은 뜨거워지고 난리야. 행여나 달아오른 귀가 보일까 봐서, 손을 올려 귓가를 투박하게 문질렀다.
“아, 내가 그 말은 안 했나?”
도하가 귓가를 쓰는 손을 붙잡아 내리곤 몸을 숙여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그 못생긴 얼굴 보고도, 어제 실은 존나게 꼴렸는데.”
지금도 마찬가지고, 라며. 망측한 소릴 지껄인 입술이 민망해하는 기색 하나 없이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절루 안 가, 이 변태야!”
온 힘을 다해 밀치자 마지못해 떨어져 나간 녀석이 뭐가 좋은지 하하, 호탕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텅 빈 음악실 가득 도하의 웃음이 공명했다.
정말 저 미친놈을 어떡하면 하면 좋아.
적응되지 않는 얼굴이 터질 것 같다. 그런 다경을 보곤 한참을 웃는가 싶던 도하가 이내 장신의 몸을 반듯하게 세웠다.
“아무튼 졸업할 때까지, 너 편한 대로 마음껏 써먹어 봐.”
보기 좋게 각진 어깨로 햇살이 들이쳤다.
창을 뚫고 들어온 해사한 여름 볕이 그늘이라곤 찾을 수 없는 환한 낯을 눈부시게 감싼다.
“그러다 이거 꽤 괜찮네 싶어서 못 이긴 척 넘어와 주면 나야 땡큐고.”
결국 그것이 제 유치한 놀이의 최종적인 목적이라는 듯 도하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교정 가득 종이 울리고, 다경의 가슴 한편에서도 댕댕-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꼭 이미 경계를 밟아버리고만, 마음의 신호탄처럼.
* * *
“이게 뭐야?”
다른 의미로 피곤했던 학교생활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자 엄마가 서랍장 앞에 앉아 있었다.
“권···도하?”
“이리 줘!”
엄마의 손에 들린 옷감의 정체를 깨닫곤 부리나케 낚아챘다.
혹시라도 엄마가 볼까 싶어 마르기 무섭게 서랍장 안에 고이 접어 넣어둔 옷이었다.
오늘 가져다줬어야 맞는데 깜박하는 바람에 놓고 간 것이 엄마의 눈에 띄고 말았다.
“너 그거 남자애 옷 아냐?”
못 볼 걸 본 듯 싸늘해진 화영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이게, 엄마.”
“사내놈 교복이 왜 네 서랍장에서 나와!”
곱게 화장까지 마쳤음에도 가시지 않은 술 냄새가 짙은 향수 냄새와 뒤섞여 역겹게 코를 찔렀다.
교복을 꾸깃 움켜쥔 다경이 숨죽인 채 마른침을 삼켰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남자들과 노닥거리면서도, 제 이성 관계에 대해서만큼은 결벽을 떠는 엄마였다.
이전에 있던 학교에서도 좋아한다며 집 앞까지 쫓아와 고백하는 애들이 있었으나, 제가 먼저 거절하기도 전 소금까지 뿌려대며 내쫓은 양반이다.
이상한 낌새라도 비쳤다간 또 어떤 식으로 눈이 돌아가 경을 칠지 몰랐다.
“그냥 어쩌다 보니 빌려 입은 거야. 학교에서 일이 좀 있어서.”
차마 엄마 일 때문에 김주미 일당에게 그 수모를 겪었다는 말은 못 하고 대충 둘러댔다.
“그러게 엄만, 돌려주려고 놔둔 건데 왜 남의 서랍장은 뒤.”
쨍그랑―!
말이 끝나기도 전, 패대기쳐진 쟁반과 함께 고개가 돌아가고 말았다.
비릿한 피 맛이 혀끝을 타고 번졌다. 하필 어제 김주미에게 얻어맞은 뺨과 같은 쪽이라 충격이 더하여 입가가 그만 터져버렸다.
“남의 서랍장? 이 집에 네 게 어딨어, 기집애야! 내 집, 내 옷장이지!”
앙칼진 고함이 그치지 않고 귓전을 때렸다. 피를 삼키곤 어금니를 악문 턱이 잘게 떨렸다.
“바른대로 말해, 너! 이거 뭐야? 설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벌써 연애질이야?”
엄마가 두 손에 꼭 쥐고 있는 교복을 우악스레 빼앗아 눈앞으로 들이밀더니 그대로 방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것만으로 모자랐는지 발로 지근지근 밟아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너 반반한 얼굴 보고 따라붙는 사내새끼들이랑 꼬였다가 팔자 망친다고 내가 했어, 안 했어? 여기 와선 좀 조용하나 싶었더니 남자애 옷을 입고 집에 기어들어 와?”
상처 난 얼굴로 품이 큰 교복을 여미고 다방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땐 알아보지도 못했던 엄마다. 옆에 앉아 엉덩이를 조물락대는 아저씨들과 노닥거리며 저는 본 체도 하지 않았던 엄마.
그래놓곤 하루가 지난 오늘, 그 교복에 박힌 이름을 보곤 방방 뛰는 꼴에 다경은 그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왜 그 옷을 입고 오게 된 건지. 뭐 때문에 맞지도 않는 남자애 옷을 입고와 몰래 접어둔 건지.
지금 당신이 쥐 잡듯 잡는 그 딸년이 학교에서 대체 어떤 꼴을 당하고 있는 건지.
정작, 엄마로서 정말 궁금해할 만한 것에 대해선 일말의 관심조차 없으면서.
“너, 학교 쫓아가서 다 뒤집어엎기 전에 당장 정리해. 어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고삐리 주제에 연애질이야, 연애질이!”
“왜.”
다경이 시야를 가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꼿꼿하게 고개를 들었다.
“왜 정리해야 되는데?”
“뭐?”
줄곧 무차별적인 폭력을 당하면서도 삼켜왔던 물음이 악에 받친 목구멍을 뚫고 토악질처럼 기어 나왔다.
“엄만 나만 한 때에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랑 뒹굴다가 나 낳아 길렀는데, 왜 난 남자친구도 사귀면 안 되는데?”
이 남자 저 남자 가리지 않고 그토록 방탕하게 몸을 굴리면서도, 제 딸에게만큼은 순결 이상의 것을 요구하며 예민하게 구는 엄마가 줄곧 의아했었다.
짐작 가는 바는 있으나 차마 대놓고 물을 수 없어, 그때마다 울음과 함께 삼키고 또 삼켜 넣었다.
하지만 오늘은 꼭 답을 듣고 싶었다.
대체 제게 이렇게까지 구는 이유가 무엇인지. 왜 저는 좋아하는 남자애 하나도 마음에 두면 안 되는지.
“이,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년이···.”
노란 장판에 패대기쳐진 교복을 짓밟은 엄마의 발끝이 새하얘졌다. 부들부들 떨리는 빨간 손톱 끝이 곧 온몸으로 쏟아질 폭력의 전조를 보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경은 이번만큼은 입을 다물고 싶지 않았다.
“나도 엄마 꼴 날까 봐 그래?”
딸이 본인 때문에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안중에도 없으면서, 저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제 오물까지 뒤집어 써주겠노라 선언하는 녀석의 교복을 짓밟아 뭉개는 엄마가 이 순간 견딜 수 없이 미워서.
“사내놈이랑 잘못 엮여서 팔자 꼬일까 봐?”
“그래! 이년아!”
앙칼진 악다구니와 함께 그대로 옷이 잡아 뜯겼다.
“내 꼴 날까 봐 그런다! 너 때문에 인생 망친 내 꼴 날까 봐!”
엄마가 교복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기세로 인정사정없이 마구 흔들어댔다.
“누구 씬 줄도 모르는 걸 낳아다가 여태 먹여주고 입혀주고 길러줬더니, 뭐? 내 꼴 날까 봐 그러냐고? 이 천하의 배은망덕한 년!”
투두둑- 쥐어 잡혀 떨어져 나간 교복 단추들이 방바닥을 나뒹굴었다. 겨우 어제 제 손으로 직접 달아둔 단추였으나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도로 이 꼴이 나고 말았다.
“여태 네가 알아서 큰 것 같지, 이 못된 년아!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사는데! 너만 아니었으면!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오늘과 같은 홍역을 치를 때면 어김없이 나오는 ‘누구 때문에’라는 말이 칼날처럼 뒷덜미를 긋는다.
온몸이 욱신대는 고통에 악 소리가 나올 지경이었지만, 다경은 비명 한 번 내지 않은 채 꿋꿋하게 그 손길들을 버텨냈다.
아프다 발버둥 친들, 엄마의 화는 사그라들지 않을 테니까.
누군가 구정물 따위 대신 뒤집어써주겠다 장담했음에도 한 끗도 달라질 수 없는, 제 빌어먹을 처지처럼.
‘넌 틀렸어, 권도하.’
누렇게 뜬 장판 위에 엉망으로 구겨져 있는 교복이 여기저기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아프게 눈을 찌른다.
‘애들한테서 날 방어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 때문에 인생 망쳤다는 우리 엄마에게선 영원히 날 구해줄 수 없을 테니까.’
절망으로 젖어든 망막 위로 뿌옇게 물기가 차올랐다.
툭, 투둑- 떨어지는 눈물이 짓밟힌 교복 위로 짙게 스민다. 어지러이 흔들리는 눈앞을 차단하듯, 다경은 차라리 두 눈을 감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