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근데 뭐든 네가 손해 볼 건 없잖아? 나 이래 봬도 인기 많은데.”
한쪽 입매 끝만 말려 올려진 도톰한 입술이 매끄러운 곡선을 띄웠다.
눈매가 길어 외꺼풀임에도 시원하게 트인 눈과 미간부터 쭉 뻗어 내려와 얼굴의 중심을 잡아주는 높은 콧대.
곱상한 것 같으면서도 햇볕에 그을러 옅은 구릿빛을 띠는 피부는 또래답지 않은 남자다움을 물씬 느끼게 했다.
녀석이 무엇을 근거로 스스로 인기가 많다 칭하는지 절로 인정하게 해주는 잘난 외향. 거기에 하곡 전체를 쥐락펴락한다는 잘난 부모님.
녀석의 입장에서는 뭐가 됐든 네가 손해 볼 건 없지 않냐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이해가 되면서도,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에게 손해밖에 끼칠 게 없는 제게 왜 이토록 매달리는 건지. 다경은 그 맹목적인 애정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인기가 많건 없건, 그렇게 무턱대고 들이대는 스타일은 내 취향 아니야.”
입가에 번지는 씁쓸함을 감추려 다경이 부러 도도하게 말했다.
“너무하네.”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도하는 특유의 여유로움을 잃지 않은 채 피식 웃었다.
그 티 없는 웃음이 다경은 지나치게 눈부셨다. 매점에 난 창을 뚫고 들이치는 햇살이 죄다 권도하만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가 곧 아닌 척 허공으로 눈길을 돌려버렸다.
위험하다.
어떨 땐 짐승 같다가, 또 어떨 땐 철부지 도련님 같고. 그러다가 가끔 이렇게 마음이 다 녹도록 따사롭게 구는 권도하는 이따금 제 비루한 처지를 잊게 만들어 속수무책으로 마음을 흔들어 놓는 위험한 존재였다.
“너무한 건 너지. 순 날강도.”
다경이 괜히 새초롬하게 흘겨보며 빨대를 물고 쪽 빨아들였다. 새침한 척 굴면서도 지우지 못한 홍조가 새하얀 뺨을 복숭앗빛으로 물들였다.
도하가 잠시 넋을 잃은 듯 그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눈 밑과 입가에 진 상처 따윈 문제도 아닌 듯, 상흔이 있음에도 어여쁘기만 한 얼굴이 그의 명치 아래를 들끓게 했다.
“야, 윤다경.”
한참을 바라만 보고 있던 도하가 가만히 다경을 불렀다. 빨대를 문 다경이 큼직한 눈을 동그랗게 떠 그를 돌아봤다.
“왜, 또.”
“나 지금 뽀뽀하면 너한테 맞아 죽겠지?”
“큽!”
습관처럼 쪽 빨아 마시던 우유가 목에 걸려 잔기침이 쏟아졌다.
“뭐야, 괜찮아?”
놀랐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녀석이 서둘러 등을 두드려주었다.
덕분에 매점에 있던 애들의 시선이 둘에게로 몰려들었다. 그 와중에도 직전에 들은 말이 맴돌아 얼굴이 화끈댔다.
“그러지 말고 이거라도 좀 마셔봐.”
병 주고 약 주고 다 한다는 말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인가 보다.
다경은 원인 제공자 주제에 걱정스런 얼굴을 한 도하를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튼 저 단계라곤 없는 자식!
기침이 어느 정도 사그라지자 다경이 험악한 낯으로 도하의 아랫도리를 눈짓했다.
“하려거든 제 구실 못 할 각오하고 덤벼.”
“와씨, 졸라 살벌하네.”
부리나케 손을 떼어낸 녀석이 겁먹은 척 갖은 연기를 하며 킬킬거린다.
정말 저걸 어떻게 하지?
자칭 윤다경의 개라면서, 도무지 길들어지지 않는 녀석 때문에 다경은 문득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시도 때도 없이 치고 들어오는 개수작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이러다가 제가 되려 저 답 안 나오는 변태에게 길들어질 것만 같았다.
“아무튼 내 허락 없이 입술 들이대기만 해. 그대로 니킥을 날려버릴 테니까.”
살벌한 경고를 끝으로 다경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흠. 듣기만 해도 불알 떨리게 쫄리기는 하는데, 어떡하냐?”
도하가 다경이 남기고 간 바나나 우유를 대신 쪽 빨아 비우곤 귓가에 대고 능글맞게 속삭였다.
“너한테면 맞아 죽어도 좋을 것 같은데.”
이걸 진짜!
원대로 그냥 죽여주자 싶어 팔꿈치를 날린 순간 맥없이 팔이 붙잡혀 당겨지고 말았다.
“너···!”
설마 진짜 다 보는 앞에서 뽀뽀라도 하려는 건가 싶어 화들짝 놀라 숨죽인 채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도 입가에 닿은 것은 권도하의 입술이 아닌 손이었다.
“그러니까.”
상처 주변을 덧그리듯 스쳐 지나간 기다란 손을 타고 델 듯한 열감이 번졌다.
“어지간하면 쥐어 터지지 말라고, 예쁜아.”
엄마에게 맞아 터진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도하가 보기 드물도록 진중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맞고 터지는 건 너 대신, 내가 다 할 테니까.”
맞닿은 부위로 번지는 지나치게 더운 온기에 심장이 발작을 일으키듯 수축했다. 굳게 다물고 있는 입술이 그럼에도 속수무책으로 떨렸다.
쓸고 지나간 건 분명 손인데, 마치 입맞춤이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건강에 해악을 미칠 만큼 빠르고 격한 고동.
“들어가자, 그만.”
씩, 입꼬리를 당겨 웃은 채로 아무렇지 않게 손을 깍지 껴 당긴다. 뿌리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역시 위험하다, 권도하는.
바람 불면 날아갈 듯 나약한 내 심장에도, 이따금씩 제 주제를 잊는 내 하찮은 처지에도.
시시때때로 질서를 흩트리고 혼란을 불러오는 너는, 위험하고도 달콤한 침략자였다.
7. 잠식
악몽에 잠식당한 밤의 끝에서, 가끔. 아주 가끔. 내 인생에 있어 유일하게 웃음 지었던 날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꿈이 아니었을까 싶게 가슴 벅찼던, 어린 날의 기억들.
‘왜 자꾸 해가 너만 비추냐, 예쁜아.’
푸른 녹음이 진 교정과 넓은 플라타너스 잎사귀 사이로 들이치는 햇살. 그 작은 빛이 행여 내 휴식을 방해할까 싶어, 커다란 손을 펴 손그늘을 만들어주던 열아홉의 너.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랬지, 내가.’
‘까칠하긴. 예쁘니까 예쁘다는데.’
눈부신 태양 빛보다도 찬란한 너의 웃음이 얼어붙은 내 마음을 녹였고.
‘쓸모없다니까, 반반한 얼굴 같은 거.’
‘쓸모가 없긴 왜 없어. 보고 있기만 해도 이렇게 기분 째지게 좋은데. 그게 쓸모 있는 거지.’
낳아준 엄마조차 쓸모없다 말했던 날 향해 건넨 너의 그 천진하고도 따사로운 위로는, 황무지 같던 내 안에서 여태 없던 희망의 싹을 품게 했었다.
‘오늘도 참 쓸모 넘치게 예쁘네, 윤다경.’
만약 그때, 내가 널 조금만 덜 욕심 냈더라면. 조금만 더 내 주제를 파악했더라면. 아니, 네가 조금만 덜 따뜻했더라면···.
10년 만에 마주한 우리의 재회가, 적어도 지금보단 덜 아팠으려나.
― 지이잉
꿈속을 파고드는 진동음에 젖은 속눈썹 끝이 달싹였다. 감은 눈 안에서 일렁이던 반짝임이 시린 바닥을 구르는 마찰 소리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눈을 뜨자 낯선 공간이 시야를 밀고 들어왔다. 높은 천장과 넓고 말캉한 침대. 깜박 정신을 놓았던 것 같은데, 어느 틈에 잠이 들고 말았던 모양이다.
“아···.”
다경은 뻐근한 몸을 조심스레 일으켰다. 호텔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백 안에서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물기 어린 눈에 숫자 8을 넘어서고 있는 시곗바늘이 잡혔다. 6시쯤 호텔 방에 들어섰으니, 벌써 2시간 가까이 흘러 있었다.
시간을 가늠할 새도 없었던, 참으로 혹독했던 섹스.
“···읏.”
극한까지 시달린 몸의 마디마디가 앞다투어 삐걱거렸다. 미처 수습하지 못해 엉망이 된 아래가 보였으나, 더 이상 침대에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지잉, 지이잉
저 줄기찬 진동음의 주인은 아마도 엄마일 테다.
연락도 없이 저녁 시간을 넘겼으니, 지금쯤 전화가 걸려올 때가 되었다.
“여보세요.”
― 어디야? 시간이 몇 신데 여태 연락도 없어.
주변이 조용한 것이 한바탕 손님들을 치르고 막 한가해진 모양이었다.
“회사에 일이 좀 있어서.”
다경이 엉망이 된 아래를 티슈로 대강 훔쳐내고 떨어진 속옷들로 손을 뻗었다.
-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라도 주지. 너 올까 싶어서 여태 밥도 안 먹고 기다렸는데.
그러게. 평소라면 전화부터 했을 텐데, 그런 걸 챙길 여유조차 없었다.
“미안. 종일 바빠서 정신이 좀 없었네.”
힘없이 답하며 주섬주섬 속옷들을 챙겨 입었다.
- 무슨 일인데. 아직도 회사야?
“별거 아냐. 곧 가.”
“어딜 갈 건데?”
휴대폰을 목과 어깨 사이에 끼우고 막 스커트에 발을 밀어 넣은 찰나, 등 뒤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샤워를 마치고 나온 도하가 허리에 타올을 두른 채 비딱하게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또 도망이라도 치려고?”
간다고 하면 그대로 휴대폰을 빼앗아 들 것처럼 험악한 눈이 마주한 시야를 죄어왔다.
- 다경아. 여보세요?
전화 너머에서 대꾸 없는 저를 찾는 엄마의 음성이 들렸다.
“나가면서 전화 걸게.”
이러다 그의 음성이 휴대폰을 타고 넘어갈 것 같아, 다경이 서둘러 통화를 끊었다.
“끝나자마자 튈 작정이었나 보네.”
서 있는 각도만큼이나 비딱한 말투다.
“도망이 아니라 볼일 끝났으니까 그만 가려는 거야.”
적절치 못한 어휘를 정정해 준 뒤 입다 만 스커트의 지퍼를 올렸다.
“하. 볼일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