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썸은 박 과장이랑, 섹스는 나랑.”
줄곧 이성을 부여잡고 버티던 눈에 선뜩한 광기가 스쳤다.
다경의 말대로 이미 예상하고 있던 사실이면서, 막상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직접 듣자 인내심을 부여잡던 핀이 팅― 하고 나가버렸다.
재고할 필요성조차 못 느낀다는 듯한 그 매정하고 야속한 대답에.
“말조심해. 여기 회사야.”
지금 저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바로 누군데. 감히 제게 말조심을 운운하는 다경을 도하가 바늘 하나 박히지 않을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왜. 썸타는 과장님께서 너랑 내 사이 알까 봐 겁나?”
“권 팀장님!”
행여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다경이 숨죽인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불리하면 팀장님이라지, 씨발.”
호칭조차 고까워 한껏 뒤틀린 목소리로 도하가 읊조렸다. 그러다 곧 초탈한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뭐, 좋아. 알았어. 알았다구요, 윤다경 대리님. 그럼 네 볼일은 이제 다 끝난 거죠?”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눈초리의 끝이 희미하게 휘었다. 존대와 반말이 섞인 비딱한 물음에 다경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볼일 다 보셨으면.”
이윽고 그 불안감에 쐐기를 박는 말이 그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제부터 내 남은 볼일이나 마저 보려고.”
심장이 쿵, 한없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권도하의 볼일이라니.
그와 저 사이에 볼일이란, 어제 제 입으로 정의 내렸던 바로 그것밖에 없었다.
“말했잖아.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그건 네 사정이고.”
당황하여 뱉은 변명을 잘라낸 고압적인 음성이 선택의 여지를 박탈했다.
“굳이 날짜 세어 가며 질질 끌 거 있어? 나랑 남은 계산이 끝나야 하루라도 빨리 썸남이랑 다음 단계로 넘어갈 거 아냐. 연앤지 뭔지···.”
의도적으로 말을 멈춘 그가 슈트에 감싸인 몸을 살짝 숙이며 무표정한 얼굴로 덧붙였다.
“사람 속 뒤집히게 간지러운 그거.”
위태로운 눈으로 그를 마주 보던 다경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꾹 감쳐물었다. 제 입으로 직접 뱉은 도발이라 뭐라 반박할 말이 존재치 않았다.
아무래도 오기가 발동하여 그를 건드린 도발이 실수가 돼버린 것 같다는 후회를 떨치지 못하고 있을 때.
“참.”
그런 다경을 빤히 응시하던 도하가 그녀의 허리 뒤편을 비딱하게 눈짓했다.
“오늘은 부디 그 중요한 물건 또 놓고 내리지 마시고.”
“···.”
“이 시간 이후로 내 손에 잡혔다간 그 즉시.”
맵시 좋은 입술이 악마의 그것만큼이나 악랄하게 휘어졌다.
“담뱃불로 지져버릴 테니까.”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가고만 가느다란 팔을 보며 그가 피식, 대놓고 조소마저 흘렸다.
그러곤 더는 고민할 시간을 줄 생각이 없다는 듯 신사다운 몸짓으로 차 문을 열어주었다.
“타시죠. 나머지 볼일 보셔야지.”
예를 갖췄음에도 방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8. 첫사랑의 시작
바람 끝이 한층 선선해진 9월의 초입. 교실을 뚫고 나간 곡소리가 청명한 가을 하늘을 울렸다.
“수리 가 완전 멘붕이다, 진짜. 그 23번 도형 문제 정체가 뭐야?”
“외국어는 또 어떻고. 지문 완전 길어서 보자마자 멘붕 왔잖아, 나.”
“아··· 울 아빠가 이번 모의고사에서 등급 안 나오면 머리 확 밀어버린다고 했는데에.”
“정말? 어떡해, 너 뒤통수 절벽이라 머리 밀면 완전 안습일 텐데.”
“이씨, 원형탈모 있는 네 머리도 안습이거든!”
작년 수능보다도 어려웠다는 9월 모의고사는 아이들을 그야말로 카오스 상태로 내몰았다.
여름이 오기 직전 봤던 6월 모의고사가 비교적 쉬웠기에 예비 수험생들의 충격은 더 컸다.
생소하게 느껴지는 문학 지문이 몇 있었던 언어영역과 공간도형·벡터 등 접근이 까다로운 문제들이 출제된 수리영역. 수준 높은 어휘에 지문 길이도 길어진 외국어 영역까지.
마지막 시간이었던 과탐이 그나마 평이한 편이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난이도가 상향된 문제로 인해 교실은 혼돈 그 자체였다. 그리고 다경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완전 난리네. 하···.”
다경이 착잡한 얼굴로 앞에 놓인 수리영역 시험지를 바라보았다.
어려웠다는 난이도에 비하면 다른 과목들은 대체로 선방한 편이었으나, 문제는 수리였다.
풀 때도 애매하다 싶어 체크한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었는데 막상 채점하고 보자 결과는 더 참혹했다.
목표로 하고 있는 대학에야 문제없이 들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으나, 전액 장학금을 받으려면 이 정도 성적으론 어림도 없었다.
‘뭐, 대학? 꿈도 꾸지 마, 계집애야. 우리 형편에 대학은 무슨 놈의 대학이야?’
며칠 전, 담임 선생님께서 진학 상담을 오라고 했다는 소식을 전하자마자 한바탕 경을 쳤던 엄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디 갈 생각 말고 집구석에 딱 붙어 있어. 대학교의 대 자라도 내 앞에서 꺼내기만 해. 그날로 확, 머리카락을 다 뽑아버릴 테니까.’
등급이 안 나오면 머리를 확 밀어버리겠다고 했다는 누구의 부모와는 달리, 엄마는 형편에도 안 맞는 헛꿈을 꿨다간 그때야말로 머리카락을 다 뽑아버리겠노라고 무섭게 엄포를 놓은 터였다.
하지만 정말 그리 된다 할지라도, 다경은 진학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제가 이 지긋지긋한 다방 뒷방에서, 엄마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성인이 됨과 동시에 저 살길을 찾아 이곳을 떠나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러려면 제겐 공부밖에 답이 없었다.
대학교에 합격한다 한들 등록금을 내 줄 엄마도 아니었고, 내 줄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럴 형편조차 되지 않음을 저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최대한 좋은 성적을 내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입학하는 것.
때문에 야간자율학습이며, EBS강의며 나름 기를 쓰고 공부했지만 사교육의 도움 없이 혼자만의 노력으로 성적을 올리기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다른 과목보다도 수리 영역이 특히 취약했다. 이래선 다른 쪽에서 등급이 나와도 수리가 제 발목을 잡게 생겼다.
“왜 그렇게 죽을상이야?”
들여다볼수록 한숨만 나오는 시험지를 접어 막 가방에 넣은 순간, 머리 위로 큼직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시험 끝나서 야자도 없는데, 나가서 뭐 맛있는 거라도 먹을까?”
모두가 죽을상인 와중에 저 홀로 산뜻한 표정을 짓고 있는 권도하가 책상으로 몸을 기울이며 싱긋 웃었다.
모의고사가 있는 날은 야간자율학습도 취소되어 모처럼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성적이 좋다면 모처럼 회포를 풀기에 딱 좋을 날이나, 그렇지 않은 고3 수험생에겐 더없이 괴로울 날이었다. 그리고 오늘 다경은 그중 완벽히 후자에 속했다.
“난 됐어. 집에 가서 방송 듣고 오답 정리 해야 돼.”
“방송? 뭐, EBS?”
“어.”
짤막한 대꾸를 끝으로 다경이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섰다. 그 뒤로 도하가 충직한 개처럼 따라붙었다.
“뭐야. 윤다경, 완전 열공모드네.”
“고액 과외받으시면서 전교에서 1, 2등 하는 누구님이랑은 다르니까.”
다경이 다소 뾰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말에 뼈가 있음을 느꼈는지 도하가 나란히 걸으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뭐, 내가 사교육의 최대수혜자긴 한데 그렇다고 완전히 과외발은 아니다?”
가벼운 톤으로 농담하듯 뱉는 목소리에 언덕바지를 내려오던 작은 발이 잠시 멈칫했다. 그런 다경을 따라 걷던 도하도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적인 욱함에 날 선 소리를 뱉긴 했지만, 권도하의 노력을 대놓고 폄훼하려 한 말은 아니었다.
다만, 저는 정규 수업과 교육방송에 겨우 의지하며 이토록 아등바등대고 있는데 그런 저와는 달리 태평해 보이는 그 잘난 처지에 조금 배가 아팠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걸 저도 모르게 저런 식으로 뱉어버리다니.
정말이지 꼴사나워, 윤다경.
“···미안.”
다경이 입술을 슬쩍 씹었다 놓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너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은 아니었어.”
“뭐야, 그냥 웃자고 한 소리에.”
도하야말로 평소의 다경 답지 않게 진지한 반응에 외려 놀란 듯 헛웃음을 지었다.
한순간에 어색해진 분위기에 다경은 귀 끝이 화끈거렸다. 남몰래 묻어놓았던 자격지심을 들킨 것 같아 창피했다.
“수리를 좀 망쳐서. 안 그래도 K대 커트라인에 간당간당했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떨어지니까···.”
횡설수설 어설픈 이유를 읊던 다경이 짜증스레 제 이마를 문질렀다.
대체 제가 지금 권도하 앞에서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모의고사 덕에 야자 안 해서 좋다고, 성적 걱정 없이 같이 놀러 가자는 녀석 앞에서 한심하게 커트라인이나 들먹이고 있고.
“아냐, 됐다.”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자 떠들어대다가 신경질적으로 수습한 다경이 이내 발걸음을 홱 돌렸다.
“나 먼저 좀 갈게. 오늘은 따라오지 마.”
녀석을 향해 다짜고짜 말하곤 정문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가슴이 체한 것처럼 답답했다. 구김 없는 권도하를 볼 때마다 선명해지는 제 궁상맞은 처지에 숨이 턱 막혔다.
왜 난 이렇게밖에 살 수 없을까. 왜 난 이토록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 걸까.
왜 난, 내 또래들이 당연한 듯이 누리는 그것들을 단 한 번도 맘 편하게 꿈꿀 수 없는 걸까.
그러다 결국 오늘은, 날 좋아한다는 남자애 앞에서 이런 꼴사나운 모습이나 보이고.
“야, 윤다경!”
도망치다시피 언덕바지를 내려가던 다경이 커다란 손아귀에 팔이 잡혀 돌려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