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3/98)

 22화.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소린데, 내가 보기보다 눈이 꽤 높아요.”

 반듯하게 접힌 시험지를 가방에 넣어주며 도하가 말했다.

 “우리 집 신 여사님 빼곤 네가 처음이야. 예쁘단 생각 든 건.”

 대학에 가면 지금과는 달라질 거라는 말의 뜻을 알아챈 듯, 나른한 미소를 띤 채 덧붙였다.

 권도하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라면 소문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사장의 부인이자 하곡 끝에 있는 지역 미술관 관장인 그녀는 한때 미스코리아 본선까지 진출한 적 있는 이 지역 최고의 미인이라고들 했다.

 권도하가 그런 제 모친의 외모와 이사장인 부친의 남자다운 기골을 그대로 빼다 박은 거라며 찬사를 하는 통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던 가족의 이력이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정말 모든 걸 갖췄네.

 부럽기도, 한편으론 저완 상반되는 그 처지에 위화감이 들기도 해서, 다경이 부러 심드렁하게 답했다.

 “뭐, 두고 보면 알겠지.”

 “진짠데?”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는 다경을 따라 도하 또한 몸을 일으켰다.

 “윤다경 너,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 내 스타일이라니까. 아, 한 가지 좀 아쉬운 건 있다.”

 장난스레 웃으며 기다란 검지로 머리부터 발까지 죽 그어 내리는 시늉을 하던 녀석이 대관절 낮은 탄식을 내뱉는다.

 아쉬운 게 있다고?

 도도하게 돌아서 놓고도 막상 그 말을 듣자 신경이 쏠려 흘깃 옆을 돌아보았다.

 제 엄마만큼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름 외모로는 연예인 급이란 말도 듣는 나인데.

 아쉽다는 게 대체 뭐냐는 듯, 다경이 새침하게 눈꼬리를 치떴다.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도하가 몸을 슬쩍 기울이며 아래쪽을 눈짓했다.

 “그거.”

 “···.”

 그 순간, 멍멍―, 편의점 아래를 지나가던 삽살개 한 마리가 둘을 향해 짖어댔다. 도하의 시선을 따라 미끄러지던 갈색 눈에서 일순 초점이 탁 풀렸다.

 ···이 자식이···.

 “사실 난 너무 마른 여잔 좀 별로거든.”

 “···.”

 “적당히 살집도 있고, 그래서 만질 곳도 있는 그런 몸이 취향인데, 김주미랑 붙어서 옷 잡아 뜯긴 날 보니까 넌 여기가 영···.”

 퍽―! 하는 뼈아픈 마찰음과 함께 도하가 윽, 소리를 내며 제 왼쪽 정강이를 부여잡았다.

 “아···씹, 윤, 다경··· 너!”

 뭘 잘했다고 큰소리를 치는 녀석의 반대쪽 정강이도 마저 발로 확 걷어차주었다.

 “악···!”

 편의점 아래서 짖어대던 개가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다경의 살기 띤 연갈색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적당히 살집도 있고, 만질 곳 있는 몸이 취향이야? 김주미랑 붙은 날 보니까 여기가 영 뭐?

 그런 몸 보고도 꼴렸다고 할 땐 언제고, 뭐가 어째?

 돌이킬수록 분이 삭질 않아 아예 가방으로 머리통을 때려줄까도 싶었다.

 하지만 바로 직전에 도움받은 수리 영역 풀이를 상기하곤 가까스로 손아귀에서 힘을 풀었다.

 “권도하 너의 그 저질스런 취향 아주 잘 알겠는데, 걱정 마. 내가 살집은 없어도, 보다시피 민첩성과 힘은 아주 넘치니까.”

 다경이 도하를 걷어차느라 살짝 돌아간 교복 치마를 휙 돌려 바로 하곤 매섭게 몸을 돌렸다.

 “야, 너 아무리 그렇다고, 씹, 정강이를 아우···.”

 성큼성큼 멀어지는 다경의 뒤에서 도하가 양쪽 정강이를 문지르며 아픔을 호소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걷다가 우뚝 멈춰선 다경이 고개를 홱 돌려 도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나!”

 이씨, 진짜 내가 이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보기보다 괜찮거든!”

 말을 뱉음과 동시에 귀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다경은 정면으로 얼굴을 돌리기 무섭게 냅다 정류장을 향해 뛰었다.

 입만 열면 음담패설뿐인 천하의 변태 자식!

 바람이 꽤나 서늘함에도 불구하고 뺨이며 귀가 열기에 통째로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냥 무시하면 그만인데, 저런 변태 자식한테 대체 뭔 소리를 지껄였나 싶어 때늦은 창피함이 밀려왔다.

 이 멍충이, 미련 곰탱이!

 모의고사 망친 충격으로 머리가 잠깐 어떻게 됐었나? 어쩌자고 애들 다 지나다니는 길 한복판에서 그런 말을 해버린 거지.

 그나저나 저 자식 정강이는 괜찮을까? 순간적으로 욱해서 힘 조절을 못 하고 무려 두 번이나 걷어찼는데···.

 “야, 윤다경···!”

 아무래도 걱정이 돼 슬쩍 뒤를 돌아본 찰나, 어느 틈에 몇 미터 내로 추격해 온 권도하가 보였다. 깜짝 놀라 뒤늦게 속도를 높이려던 순간, 부앙― 하는 오토바이의 소음이 주의를 가로챘다.

 “···!”

 요란하게 울려 퍼진 경적에 사고가 멈추었다. 뒷걸음질 칠 생각도 못 하고 멈춰버린 발과 함께 질끈 두 눈이 감기고 말았다.

 그렇게 오토바이에 부딪혀 몸이 날아갈 것이라 각오한 찰나.

 확―! 잡아 당겨진 몸 주변을 뜨거운 열기가 에워쌌다.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불식시키고도 남을 더운 손이 뒤통수와 등허리를 꽉 조여안았다.

 거친 엔진 소리를 내며 멀어지는 오토바이의 소음 뒤로, 쿵쿵―,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가 빠르게 고막을 친다.

 학교 앞이라는 주변 사정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을 만큼, 삽시간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 이게 지금···.

 “눈은 장식으로 뒀어? 도망가더라도 앞은 보고 뛰어야 할 거 아냐!”

 맥없이 안겨 있던 몸이 더운 품에서 확 떼 내어졌다. 멍하니 서 있는 다경의 양팔을 움켜쥔 채 도하가 사납게 외쳤다.

 “사고라도 났으면 어쩌려고! 하, 씹··· 정신 빠진 오토바이 새끼가.”

 도하의 거친 다그침이 학교 앞을 오고 가는 아이들의 눈길을 잡아 끌었다.

 “뭘 봐, 새끼들아. 눈깔 안 돌려?”

 붙잡은 몸을 마치 타인으로부터 보호하듯 당기며 도하가 살벌하게 경고했다.

 그럼에도 다경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 권도하와 맞닿았던 몸이, 머리가, 타들어 갈 것처럼 뜨거워서 어떤 소리도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하··· 보기보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 바보 같은 게.”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붙잡은 손을 화들짝 떼어낸 녀석이 귀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그녀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돌렸다.

 “기집애가, 씨, 다른 새끼들 듣는 줄도 모르고.”

 달려오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넘기며 도하가 낮게 욕을 짓씹었다.

 초점 풀린 눈에 잡힌 도하의 발개진 귀 끝이 다경의 뺨마저 물들이는 듯했다. 안 어울리게 홍조가 어린 구릿빛 피부가 심장을 툭툭 찬다.

 나 대체 무슨 소릴 한 거니···.

 당혹감에 어지럽게 나풀대는 속눈썹이 물기를 머금고 정신없이 깜박거렸다.

 ···쪽팔려. 미쳤나 봐, 정말.

 밀물처럼 들이닥치는 민망함에 눈가가 후끈해져서 도망치듯 몸을 돌렸을 때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

 기민하게 손목을 낚아챈 도하에게서 명령이나 다름없는 제안이 빠져나왔다.

 “내일부터 나랑 매일 한 시간씩 공부해.”

 그냥 농담으로 하는 소리겠거니 했더니. 밑도 끝도 없는 녀석의 제안에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뭐?”

 “등급 안정적으로 맞춰서 같은 대학 가. 죽어도 너 혼자서는 못 보내. 아니, 안 보내. 씨팔.”

 씹어 뱉듯 욕을 뇌까리며 도하가 위압적인 눈으로 다경을 다그쳤다.

 “대답해. 같이 공부할 거야, 말 거야?”

 너도 나와 같은 고3이지 않냐는 대답이 목 아래서 찰랑거렸다. 너 또한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인데, 대체 이렇게까지 해서 네게 남는 건 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다경은 차마 도하를 향해 묻지 못했다. 그리고 그 제안을 거절하지도 못했다.

 “···할게, 같이.”

 조금 전, 권도하의 품에 안긴 순간 터질 듯이 뛰었던 제 심장의 불길한 변화를 더는 부정 할 수가 없었기에.

 여름보다 훨씬 뜨거워진 태양빛이 정상 궤도를 벗어난 심장을 자글자글 끓게 만든다.

 열아홉 가을. 서로의 가슴 속에 돌이킬 수 없는 화인으로 남을, 지독한 첫사랑의 시작이었다.

 9. 미련의 웅덩이

 신경질적으로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가 회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도로의 갓길에 정차되었다.

 부쩍 해가 짧아진 하늘은 어느새 검붉은 노을에 절반쯤 잠식당하고 있었다.

 후드득 떨어진 나뭇잎이 자동차 보닛 위를 스산하게 때린다.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직감한 다경이 불안한 눈으로 차창 밖을 살폈다.

 왜 갑자기 차를 멈춘 걸까.

 호텔 입구도 아니고, 하필 이런 외진 가로수길 옆에.

 “먼 곳까지 갈 거 없잖아.”

 이미 그녀의 불안감을 눈치챈 듯, 달칵 소리를 내며 운전석의 안전벨트가 풀렸다.

 “무슨···.”

 “두 몸뚱이만 맞으면 굳이 장소 따질 볼일도 아닌데.”

 차에 타자마자 질식시킬 듯 밀려들던 그의 향기가 돌연 목구멍을 콱 죄어왔다.

 그 말은 즉, 여기서 저와 남은 볼일을 보겠단 뜻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누가 지나다닐지도 모르는 이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그 안에서 섹스를 하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요동쳤다.

 “여기서 어떻게···.”

 “선약 있다며.”

 넥타이를 잡아 빼 뒷좌석으로 던진 그가 웃음기 하나 보이지 않는 얼굴로 뻔뻔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신속하게 볼일 마칠 장소로 정한 건데, 뭐 문제라도 있어?”

 목까지 단정하게 채워져 있던 셔츠의 단추가 톡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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