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8/98)

 27화.

 “밥 한 끼로 퉁쳐줄게.”

 입술을 멈춘 채 허공만을 응시하는 새하얀 옆얼굴이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시리게 시야에 들어찼다.

 “혼자 먹기 외로워서 밥 한번 같이 먹자는데 더럽게 비싸게 구니까, 원대로 비싸게 쳐주겠다고. 너랑 먹는 한 끼.”

 대체 저랑 밥 한 번 먹는 게 뭐 그리 싫어서 이토록 야멸차게 구는지 모를 일이었으나, 그놈의 밥 한 끼가 뭐라고 꼴사납도록 질척대고 있는 건 저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나름대로 인내심 갖고 던지는 말이니까 그만 튕겨. 열 받아서 회사고 뭐고 확 다 엎어버리기 전에.”

 덧붙인 말을 듣고도 내키질 않는지 답 없이 서 있는 다경을 향해 도하가 협박조로 읊조렸다. 그러자 한참을 침묵하는가 싶던 입에서 마치 쥐어 짜내듯 겨우 수락의 말이 떨어졌다.

 ― 밥만 먹는 거야, 그럼.

 밥만 먹는 거야, 라.

 그토록 원했던 대답이었건만. 하룻밤 대신 먹는 밥이니 딱 그 만큼만 하겠다는 듯 답하는 음성이 또 한 번 배알을 꼬이게 한다.

 “밥만 먹지, 그럼 뭐. 다른 것도 먹을까? 떡도 괜찮긴 한데, 난. 앞떡, 뒷떡, 옆떡, 윤다경 거기떡―.”

 온갖 떡 종류를 읊어댈 작정으로 지껄이던 말끝으로 뚝, 매정한 종료음이 따라붙었다. 가차 없이 통화를 끊어버린 다경이 그가 있는 쪽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다시 직원들이 있는 곳으로 총총 돌아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미처 숨기지 못한 빨간 귀 끝이 존심도 없이 귀여워 보인다. 행여 누가 듣기라도 했을까 봐 어색하게 주변 눈치를 살피는 얼굴 또한 환장하게 예뻤다.

 10년 전 것까지 치면 벌써 열댓 번도 더 까였으면서, 예나 지금이나 정신 못 차리는 건 여전하지.

 “병신 새끼.”

 윤다경 세 글자와 함께 깜박이는 액정을 보며 도하가 자조하듯 입술을 비틀었다. 화면 꺼진 휴대폰의 모서리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곤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구차한 오기와 억지로 얻어낸 열 번의 기회 중 한 번이 결국 밥 한 끼로 날아가고 말다니.

 이런저런 핑계들로 남은 횟수마저 다 채워버리고 나면, 그땐 정말 어떻게 널 내 옆에 붙잡아 놓아야 할까.

 “끔찍하네, 씨발.”

 참혹함으로 물든 눈이 감아 내린 눈꺼풀 사이로 짧게 모습을 감추었다. 10년째 보상 받지 못하는 외사랑이 불쌍하고도 구차했다.

 그럼에도 그를 더욱 두렵게 하는 건, 더 이상 다경을 붙잡을 구실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 * *

 “미쳤어.”

 나직이 중얼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전화 너머에서 들려온 저질스런 말들을 누가 듣기라도 했을까 봐 심장이 두근댔다.

 밥 대신 떡을 운운하길래 무슨 소린가 했더니. 윤다경 거기 떡이 뭐?

 아무튼 제정신으론 감당 못 할 변태 자식.

 “얼굴이 왜 그래, 자기?”

 통화를 마치고 무리로 돌아오자 송 과장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같이 있던 미애도 빨개진 얼굴을 보며 덩달아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디 안 좋으세요, 대리님? 열 나시는 것 같은데?”

 “아. 가끔 이러네요. 안면홍조가 있나.”

 안면홍조라니. 제가 뱉어놓고도 터무니없는 변명이라 기가 찼다. 하지만 다행히도 더 이상 왜 그러냐고 추궁하는 이는 없었다.

 바로 직전에 가졌던 새 팀장과의 첫 회의 탓이다.

 “진짜 너무 하지 않아요? 벌써 수요일인데 다음 주 월요일까지 기획안을 짜오라니. 것도 1인 1기획안이 웬말이냐고요.”

 “그르니까. 우리더러 주말에도 일하라 이거 아냐.”

 회의를 마치자마자 시작된 신임 팀장에 대한 뒷담화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상당 부분 진행된 기획안을 원점으로 돌린 팀장의 결정에 여기저기서 불만들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 또한 팀원 중 하나라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그가 팀장으로서 지적했던 내용은 틀린 점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과장, 차장들도 모두 군말 없이 그 결정에 따르기로 한 것일 테고.

 “하··· 이번 주말도 꼼짝없이 노트북이랑 한 몸 되게 생겼네.”

 주 대리를 필두로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계속되었다.

 “그러게요. 남친이랑 여행 가기로 했는데. 흑. 바다 보면서 기획안 써야 되는 거야?”

 “자긴 그래도 낭만 있다. 난 아들 셋 데리고 캠핑 가야 되는데!”

 제일 딱한 처지에 놓인 송 과장의 말에 사람들이 다 같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거기에 끼어 뭐라 말을 얹기도 애매해 다경이 마시다 만 커피만 마저 홀짝였다.

 기획안은 그렇다 치고. 어디에 있건 권도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 자체가 다경은 그저 숨이 막혔다.

 이 회사에 같이 다니는 동안은 부득이하게 감수해야 하는 불편함이겠지.

 “그래도 좀 멋있지 않았어요?”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 원성 사이로, 잠자코 무리 속에 묻혀 있던 미애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젊은 팀장님이라 다들 저 위에서 메다꽂은 낙하산 아니냐고 수군거렸었잖아요. 어느 재단 아들이니, 높으신 분 혈연이라느니 소문도 꽤 돌았었고. 근데 오늘 보니까 능력도 있으시고, 카리스마 뿜뿜이라 전 내심 멋있던데.”

 모두가 팀장을 욕하는 와중에 뱉은 그녀 나름의 소신 발언이었다. 그러자 다른 여직원 하나도 가만히 미애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사실 그렇긴 했죠. 이번 기획안 지난 팀장님 가시기 전에 후딱 처리하려고 대충 만든 건 맞잖아요. 뭐,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해서 귀찮긴 하지만 나중에 성과 안 나오면 그건 그것대로 또 고달프니까.”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권 팀장님 말이에요. 넘 섹시하지 않아요? 약간 못된 듯 하면서 여유가 느껴지는 게 그 뭐랄까. 요즘 대세인 섹시 빌런? 딱 그 분위기던데.”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며 여직원들의 입에서 호들갑스런 반응들이 쏟아졌다.

 “어머, 나만 그 생각한 거 아니구나? 조각 같은 얼굴로 띠껍게 구는데 왜 그렇게 섹시하니?”

 “맞죠, 맞죠? 완전 섹시하죠! 몸 약간 숙이시면서 양손으로 테이블을 탁, 짚는데 제 심장을 짚는 줄!”

 “그러고 보니까 다른 팀에서 그랬다면서요? 마케팅 2팀은 팀장 발령도 복지라고.”

 “복지? 그게 무슨 뜻이야?”

 “저 잘생긴 얼굴 보고 있음 절로 힐링이 된다, 뭐 그거겠죠?”

 “저도 그 말 들었어요. 어제 휴게실에서 다른 부서 직원들이 하던 말. 거기 윤 대리님도 같이 계셨었죠?”

 홀로 대화에 섞이지 못한 채 뭐가 얹힌 듯 답답한 가슴을 짓누르던 차. 미애에게서 물음이 건너왔다.

 “···어, 그랬지?”

 다경이 한 템포 늦은 대꾸를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권도하의 존재 자체가 팀의 복지라고.

 어제 점심시간엔가, 휴게실에 모인 몇몇이 때마침 옆을 지나치는 권도하를 보며 그리 말하는 걸 미애와 함께 들었었다. 그리고 다경은 그 말을 듣곤 쓴웃음을 삼켰었다.

 내겐 미처 치르지 못한 형벌 같은 네가 다른 이들에겐 사기를 진작시켜 주는 복지라는 소리를 듣는 게, 참으로 우습고도 씁쓸해서.

 “복지는 얼어 죽을. 곧 있음 업무 폭탄에 곡소리들 낼 거다. 오늘 회의 때 보니까 아주 얄짤 없더만.”

 유부녀라고 그나마 중심을 잡고 있던 송 과장이 한심한 소리들 한다며 쯔쯧, 혀를 찼다.

 “뭐 근데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삼호의 노예인 삶, 기왕 일할 거 저 잘생긴 얼굴 보며 힐링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그녀의 엄포 따윈 통하지 않은 설렘 가득한 얼굴로 미애가 맞받아쳤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그건 그렇다며 동의하는 말들이 쏟아졌다.

 “으휴, 허우대 훌륭하면 나라도 팔아먹을 것들.”

 “저희한테 나라를 팔아먹을 능력이 있다면요, 훗!”

 이거 완전 여자 이완용이네! 하는 소리와 함께 커피잔을 기울이는 입들에서 깔깔깔 웃음이 터졌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동조하지 못한 다경이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식어 내린 커피잔을 내려다보았다. 초점 풀린 멍한 눈이 잔에 담긴 커피를 힘없이 응시한다.

 ‘나랑 밥 먹어, 오늘.’

 단단하지만 아픈 그 목소리가 목구멍을 콱 메어 왔다.

 ‘남은 여덟 번 중의 한 번, 밥 한 끼로 퉁쳐줄게.’

 그토록 거절당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그 오기가 자꾸만 저를 숨 막히게 했다.

 이런 사소한 상황들이 후에 우리를 아프게 하는 후폭풍이 되어 불어닥칠 게 뻔한데, 넌 왜 날 가만두지 않는 건지.

 그럼에도 결국 도하를 완전히 밀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게 저를 더 절망케 한다. 예나 지금이나, 입으론 부정하면서도 뼈아프게 체감하고 있는 마음이 바로 그 증거였다.

 생기 없는 눈빛으로 조금 전 그가 서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비어있음에도 제 마음에선 비워지지 않는 그의 존재가 명치를 무겁게 짓눌렀다.

 과연, 너와의 이 재회는 내게 어떤 의미로 마침표를 찍게 될는지.

 휘청이는 발밑을 칭칭 동여매고 있는 여덟 번의 굴레가, 다경은 그저 까마득하기만 했다.

 * * *

 어제도 오늘도, 사실 선약 같은 건 없었다.

 회사를 퇴근하면, 다음 일정은 집으로 가 엄마의 일을 돕는 게 제 일이었다.

 10년 전만 해도 남자들에게 기대어 기생하듯 살던 엄마는 하곡에서 벗어나고부턴 일 다운 일을 하며 성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인부들을 상대로 하는 작은 백반집은 큰돈이 되진 않았으나 근근이 먹고 살 만했고, 그만큼 밤낮으로 열심히 하루를 보내야 했다.

 이른 아침부터 들이닥칠 손님들에 대비해 재료를 손질하고 음식을 하는 엄마 대신, 다경은 가끔 장을 봐주고 밑반찬 만드는 것을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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