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1/98)

 30화.

 우아한 백합 향이 방 안을 은은하게 휘돌았다.

 ‘향기까지 좋으시네.’

 다경은 나가는 뒷모습에 마저 깍듯하게 인사를 한 뒤 제 손에 들린 초콜릿으로 시선을 옮겼다.

 차마 바로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이걸 건네며 그녀가 짓던 미소가 오래도록 망막에 남은 탓이다.

 기품있는 몸짓, 상냥한 얼굴, 사려 깊은 말투까지.

 그녀는 마치 좋은 어머니의 표본 같은 분이었다.

 ‘만약 우리 엄마였다면 권도하를 보자마자 멱살을 잡고 집 밖으로 끄집어냈을 텐데···.’

 제 엄마에게선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태도와 분위기에 문득 부러운 마음마저 느낄 즈음, 맞은 편에서 나직한 실소가 들렸다.

 “뭐야, 이 가식 덩어린.”

 도하가 턱을 괸 채 비딱한 각도로 다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또 시비야?”

 “너 원래 이런 캐릭터였냐?”

 “내가 뭐?”

 “아주 순둥이가 따로 없어요.”

 제 앞에서 보이는 모습과는 도무지 매치 되질 않는 태도가 기가 찬다는 반응이었다.

 순둥이라니.

 덕분에 무색해진 다경이 까칠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럼 어른 앞인데 예의 갖춰 인사드리는 게 당연하지. 네가 자꾸 날 긁어대니까 너한테는 거기에 걸맞게 대우한 거고.”

 “아, 나한테만 그랬었어?”

 도하가 짧게 코웃음을 치며 이죽거린다.

 “수시로 김주미 패거리랑 머리채 잡던 그 쌈닭은 네가 아니셨고?”

 이게, 진짜.

 “조용히 해라, 증말.”

 행여나 문밖으로 목소리가 샐까 싶어 어금니를 악문 채 복화술을 시전했다.

 “이거 봐, 바로 돌변해서 협박하는 거.”

 안 어울리게 눈치를 살피는 태도에서 약점이라도 잡은 것 같은 모양이다.

 ‘아무튼 못됐어.’

 부모님도 계신데 호시탐탐 놀리려고만 드는 녀석이 얄미워 뚱한 표정으로 흘겨보자 도하가 그제야 어르듯 말했다.

 “뭐, 대충 속아줄 테니까 그만 노려 보고 먹기나 해. 금방 녹는다, 그거.”

 멈춰 있는 손을 잡아끈 녀석이 입 안으로 쏙 초콜릿을 넣어주었다.

 이게 어디 초콜릿 따위로 퉁치려고 하나 싶어, 다경은 먹으면서도 두 눈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러다가 무심코 씹은 초콜릿이 혀끝에 녹아든 순간.

 “···맛있다.”

 날 서 있던 갈색 눈이 돌연 커지고 말았다.

 흡족한 표정의 도하가 초콜릿 하나를 또 콕 집어 다경에게 건네었다.

 “많이 먹어라.”

 “뭐야, 이게? 그냥 초콜릿은 아닌 것 같은데.”

 “생초콜릿이야. 아버지께서 일본 출장 다녀오시면서 사오셨더라고.”

 “아···.”

 이게 바로 그 말로만 듣던 생초콜릿인 모양이다.

 딱딱한 하드 초콜릿과는 다른 쫄깃한 달콤함이 천천히 음미하는 혀끝에서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덕분에 내내 경직돼 있던 다경의 얼굴 위로 급격히 생기가 돌았다. 그걸 본 도하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킵해 놓길 잘했네. 좋아할 것 같더라니.”

 킵해 놓길 잘했다니.

 저를 챙기면서도 정작 본인은 입도 대질 않는 그를 보곤 다경이 혹시 싶어 물었다.

 “너 설마, 이거 나 먹으라고 일부러 남겨둔 거야?”

 “그럼 나 먹으려고 남겨 뒀겠냐. 단 건 질색인데.”

 당연한 듯 돌아온 답에 의아한 물음이 빠져나갔다.

 “내가 너네 집에 올 건 어떻게 알고?”

 “글쎄.”

 돌연 짓궂게 입꼬리를 당긴 도하가 의미심장하게 되묻는다.

 “지난주까지 멀쩡하던 도서관이 왜 갑자기 공사를 시작했을까?”

 설마···.

 “너, 도서관 공사 한다는 거 거짓말이었어?”

 “안 가봐서 잘 모르겠네. 거짓말인지, 아닌지까진.”

 천연덕스럽고도 뻔뻔한 답에 다경은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지금, 아예 가보지도 않고 공사니 뭐니 했다는 거야?

 “···이 사기꾼!”

 다경이 두 눈을 부릅뜨며 도하의 어깨를 확 밀쳤다. 살짝 밀렸을 뿐 꿈쩍도 하지 않은 녀석이 뭐가 좋은지 하하, 거리며 웃었다.

 속았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뒤집어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뭘 잘했다고 웃어, 지금?”

 “뭐 어때, 너 좋아하는 초콜릿도 먹고 좋잖아?”

 앙칼지게 쏘아붙이자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다.

 어쩜 이렇게 시종일관 당당할 수 있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마저 나올 지경이었다.

 “넌 어떻게 들켜놓고도 그렇게 뻔뻔하니?”

 “좋아하는 애 초콜릿 좀 먹이겠다는 게, 머리 박고 사죄 할 일은 아니잖아?”

 이번 역시 저다운 뻔뻔한 답을 하며, 도하가 앞에 놓인 주스를 입가에 기울였다.

 좋아하는 애라니.

 신호도 없이 치고 들어온 직구에 다경은 순간 머릿속이 깜깜해졌다. 그러다 뒤늦게 평정심을 찾곤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창피하지도 않나 봐. 이 사기꾼은.”

 발갛게 열 오른 귀가 녹아내릴 것처럼 후끈거린다. 혹여나 마음속의 동요를 들킬까 시선을 아래로 푹 처박은 순간이었다.

 “내가 널 좋아하는 게 창피할 일은 아니니까.”

 초점 없이 문제지 위를 헤매던 눈이 느릿하게 정면을 향했다. 그러자 줄곧 장난기를 머금고 있던 눈이 웃음기를 거둔 채 빤히 다경에게로 부딪혀온다.

 답지 않게 진지해진 표정에 돌연 목덜미가 후끈거렸다.

 방안의 온도가 몇 도쯤 상승한 것만 같다.

 뭐야, 갑자기 좋아한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는 말이나 하고.

 민망해.

 “뭐, 맛있긴 하네.”

 다경이 어색함을 물리치려 부러 더 정신없이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밀폐된 공간에 둘만 있어 본 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방이라는 장소 탓인지 괜스레 가슴이 답답했다.

 이 어색함을 어쩐담. 도하 어머니께서도 더는 안 올라오신다고 하셨는데.

 이대로는 왠지 공부를 해도 집중이 잘 안 될 것 같아, 다경이 결국 화제를 전환했다.

 “근데 말이야, 너네 어머니 되게 미인이시더라.”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접시 위의 초콜릿을 굴리며 다경이 말했다.

 “자주 들어. 그 피를 받았으니 나도 잘생겼단 소리 자주 듣고.”

 생각 외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친 도하가 손에 걸린 볼펜을 딸깍이며 픽 웃는다. 좀 재수 없긴 했지만 잘생긴 건 사실이라 딱히 딴지를 걸기도 애매했다.

 다경이 내친김에 이것저것 질문을 이어갔다.

 “하곡 미술관 관장님이시랬나? 그럼 그림도 직접 그리시는 거야?”

 “아니, 그냥 운영만 하시는 거지. 전공은 악기야. 첼로.”

 “아···.”

 첼로 전공이시라니. 그래서 그렇게 기품있는 분위기가 흐르셨었나 보다.

 다경이 마치 선망하는 대상에 대한 감상이라도 늘어놓듯 감탄사를 연발하자 잠자코 대답하던 도하가 문득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근데 윤다경 너 좀 그렇다.”

 다경이 생초콜릿 위에 뿌려진 갈색 파우더를 포크 끝으로 문지르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

 “내 방에 들어와서 자꾸 엄한 대상한테만 관심 두고. 뭐, 미래 시어머니 파악. 그런 건가?”

 미래 시어머니라니. 얘는 무슨.

 “또 이상한 소리 하지, 또.”

 좀 전부터 자꾸 깜빡이도 없이 치고 들어오는 말에 뺨이 뜨거워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릴 한다며 단단한 팔을 툭 밀자 그 정도 힘엔 꼼짝도 않은 도하가 큭큭대며 웃었다.

 “맞는 것 같은데, 뭘.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물어봐. 원하는 만큼 정보 제공해 줄게.”

 “하. 오늘 진짜 명줄 좀 당기고 싶지?”

 “기왕 사는 인생. 길게 살면 좋겠지만, 네 손에 죽는 거라면 또 괜찮을 것도 같고?”

 그러면서 어디 죽이고 싶으면 해보라는 듯, 제 목을 내어주는 시늉이 능청스럽기 그지없었다.

 어쩜 매사가 이렇게 장난스럽고 짓궂을까.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고통을 줘야 네가 두 번 다신 그런 말을 안 하지.”

 “아, 그건 좀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언젠가의 기억을 떠올린 도하가 돌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보니까 김주미 걔, 머리채 좀 잡힌 걸로 며칠 앓아누운 것 같던데.”

 이 자식이 또.

 “너, 여기가 너네 집이라 참는 줄만 알아.”

 다경이 혹시 목소리가 새어 나갈지도 모를 문밖을 살피며 속삭이듯 경고했다.

 “아, 그럼 우리 집에만 가둬두면 계속 고분고분한 윤다경을 볼 수 있는 건가?”

 으휴, 저 사악한 자식.

 새침하게 뜬 눈이 도하를 찌를 것처럼 노려보았다. 그 앙칼진 눈매에도 도하는 겁을 먹긴커녕 오히려 즐기는 듯했다.

 그래. 네 맘대로 갖고 놀아라.

 “근데 너무 고분고분해 지진 마라.”

 포기하듯 눈을 돌린 순간, 씩 입꼬리를 당긴 도하가 테이블 위로 양팔을 짚었다.

 “난 이런 까칠한 네가 좋은 거니까.”

 습관처럼 초콜릿을 헤집던 포크가 순간 멈칫했다.

 재차 들어 왔음에도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말이 또다시 얼굴을 붉어지게 했다.

 “···뭐래, 자꾸···.”

 “성격 더러운 건 더러운 것대로 취향이라고. 애초에 반한 게 한 성깔 하는 네 모습 때문이었거든.”

 황당하기까지 한 도하의 고백에 발갛게 열이 올라 있던 얼굴에서 미약하게나마 열감이 가셨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한 성깔 하는 모습에 반한 거라니. 무슨 이런 이상한 고백이 다 있나 싶어 설렘이 씻은 듯 증발했다.

 “뭐라는···.”

 “내가 언제 너한테 반한 줄 아냐?”

 어이없다는 듯 중얼대는 다경을 향해 도하가 한 번 더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다.

 글쎄, 언제부터였을까.

 내심 궁금했지만, 사실 도하가 저를 좋아하는 것 자체가 현실감이 없어 딱히 그런 것들까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마주치기 버거운 눈을 초콜릿 위로 떨구며 다경이 부러 새침하게 대꾸했다.

 “너 서림으로 전학 온 첫날부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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