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2/98)

 31화.

 “너 서림으로 전학 온 첫날부터였어.”

 예상치 못한 답을 듣고 다경은 잠시 사고가 멈추었다.

 “기억나지? 너 전학 온 첫날, 자리에 앉자마자 여자애들 몇이 몰려와선 너희 어머니 거론하면서 딸이냐고 물었던 거.”

 당연히 기억한다.

 ‘네가 화다방 마담 딸이라며?’

 선생님의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자리로 쫓아온 김주미 패거리가 다짜고짜 저를 향해 던졌던 질문을.

 그리고.

 “그랬더니 네가 걔들 쳐다보면서 받아쳤잖아.”

 그 또한 똑똑히 기억했다.

 ‘내가 화다방 마담 딸이면, 뭐. 너네가 와서 다방 매상이라도 올려줄래? 울 엄만 너네들 같이 새파란 미자들은 취급 안 하실 텐데.’

 ‘···뭐? 무슨 이 딴 게 다 있!’

 ‘오더라도 나한텐 뭐 바라지 마. 장사는 내가 아니라 우리 엄마가 하는 거니까.’

 학교를 옮겨 갈 때마다 겪는 일에 상처 받긴커녕 이젠 이골이 나서, 텃세 부리는 애들을 향해 보란 듯이 받아쳤던 제 까칠한 대꾸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게 발단이 되어 김주미 패거리와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 되었고, 결국 두 달 전의 사태까지 이르고 만 것이었으니까.

 “그날부터였을 걸, 아마. 너만 보인 게.”

 첫 만남을 상기시킨 도하가 단단한 목소리로 다경을 향해 말했다.

 ‘윤다경이랬나?’

 그와 함께 부들거리며 물러간 김주미 패거리 뒤로 나타난 권도하가 절 바라보며 했던 첫 말이 다경의 머릿속을 스쳤다.

 ‘정신 사나울 정도로 예쁘네, 너.’

 저야말로 정신 사나울 정도로 잘생겨 놓고선. 사람 혼을 쏙 빼놓을 것 같은 얼굴로 장난스럽게 웃던 그 모습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서. 저 또한 도하의 진심일지 장난일지 모르는 치근거림을 완전히 무시하지 못하게 만든 결정적 이유가 되었었다.

 그런데 권도하 또한 그날부터 날 주시하고 있었다니.

 처음부터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다경은 괜스레 가슴이 둥둥 뛰었다.

 “처음엔 그냥 호기심인 줄 알았어.”

 잠자코 마주 보고 있는 다경의 눈을 들여다보며, 도하가 지금껏 입 밖으로 내뱉어 본 적 없던 그 감정의 흐름을 차분히 읊어나가기 시작했다.

 “한 번쯤 울 법도 한데 지는 법 없이 맞서 싸우고, 뒤통수를 후리면 보란 듯이 앞통수도 같이 쳐주고. 그런 깡 있는 캐릭터가 흔치는 않잖아? 그게 재밌어서. 인형 같은 얼굴이랑 안 어울리는 더러운 성질머리가 신선해서. 보고 있음 혼이 쏙 빠지도록 웃겨서, 처음엔 분명 그게 다일 뿐이었는데···.”

 잠시 말을 멈춘 검은 눈이 웃음기 없이 다경을 직시했다.

 “어느 순간부터 슬슬 화가 나더라고.”

 흔들리는 동공을 옭아맨 채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읊조렸다.

 “네가 당하는 게.”

 “···.”

 “네가 다치는 게. 그리고···.”

 “···.”

 “네가 우는 게.”

 “···운 적 없어, 난.”

 줄곧 말없이 도하를 마주 보던 다경이 뭉클거리는 감정을 외면한 채 부러 차갑게 대꾸했다.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피식, 웃음을 흘린 도하가 다경의 오기에 승복해주듯 제 말을 마저 이었다.

 “아무튼, 그러다가 점심시간에 너 그 꼴 난 거 보고 머리가 확 돌면서 깨달았지. 내가 널.”

 “···.”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좋아한다는 걸.”

 도하를 외면하고 있는 두 눈이 허공을 담은 채 어지럽게 흔들렸다. 뿌예진 눈자위가 마구잡이로 나부껴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예고도 없이 듣게 된 진심이 버거웠다. 더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감정들에 저마저 심장이 턱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그냥 가벼운 호기심 정도였다면 조금은 더 인정하기 쉬웠을 텐데.

 “좋아해, 윤다경.”

 하지 마, 그런 말.

 다경이 두 귀를 막듯 두 눈을 꾹 감아버렸다.

 “네가 웃는 걸 보면 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고, 우는 걸 보면 내 기분이 더 엿 같아질 만큼 네가 너무 좋아.”

 제발···. 나 좀 그만 흔들어, 권도하.

 투박한 고백이 전해오는 진심에 숨이 콱 막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알아.”

 간절하게 닿는 음성 뒤, 도하가 손을 뻗어 다경의 얼굴을 잡아 올렸다.

 “네가 사는 삶이, 아직은 나까지 신경 쓸 만큼 여유롭지 않다는 거.”

 울컥, 치고 올라오는 감정을 누르려 다경이 부리나케 입술을 감쳐 물었다.

 항상 장난스레 웃기만 하는 도련님 같은 녀석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제 사정 같은 건 알아도 깊이 짐작하지 못할 거라 단정했다.

 그런데, 자신과 같은 곳을 향해 있는 마음을 깨닫고서도 차마 다가서지 못하는 제 비루한 처지를, 권도하가 모두 알고 있다니···.

 “그래서 내 최종 목표는 그거야.”

 붙잡아 돌린 턱에서 손을 떼 내며 도하가 이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이렇게 널 지키고만 있지만, 언젠가 작은 틈이라도 생기면.”

 몇 번이고 되뇌었던 욕망을 다짐하듯 시선을 옥죄었다.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서 완전히 내 걸로 만드는 거.”

 선명히 고개를 쳐든 소유욕이 숨통을 꽉 죄는 것 같았다. 다경이 저도 모르게 손끝을 꾹 말아쥐었다.

 “···무슨.”

 “그러니까 아직은 나한테 틈 보이지 마. 알다시피 난.”

 그리고 이어진 당부에 다경은 귀 끝까지 열이 오르고 말았다.

 “윤다경 너만 보면 환장하는 개새끼라.”

 피할 곳 없이 부딪혀오는 검은 눈이 들끓는 갈망으로 거칠게 일렁이고 있었다.

 “네가 아주 작은 틈이라도 보였다간, 바로 허튼짓이 하고 싶어지거든.”

 숨이 멎을 것 같은 긴장감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어떤 대꾸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마디라도 헛나갔다간 돌이킬 수 없는 분위기로 치달을 것만 같았다.

 “참고로 거기엔.”

 “···!”

 더운 손이 다경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문질렀다.

 “이런 작은 틈도 포함이고.”

 깜짝 놀라 커진 눈에 엄지 끝에 묻어나온 코코아 가루가 보였다.

 뭐가 이렇게 뜨거워.

 직전에 닿았던 비정상적인 열기에 입 안이 바짝 마른다.

 “내, 내가 닦아도 되는데···.”

 창피함을 느낄 여유조차 없이 곤두박질 치듯 테이블로 시선을 떨군 찰나였다.

 “왜 그렇게 빨개졌어?”

 붉게 발광하는 귀 끝으로 도하의 엄지가 스쳤다.

 “고작 입술 좀 만진 걸로 그러고 있으면.”

 포크를 쥐고 있던 손끝에서 힘이 확 빠졌다.

 “진짜 무슨 짓이라도 해도 될 것 같잖아. 너한테.”

 음험하게 가라앉은 눈이 피할 구석 없이 시야를 옥죄었다.

 무슨 짓인데? 라는 물음이 차마 뱉지 못하고 달싹이기만 하는 입 안에서 소리 없이 맴돈다.

 무슨 짓인데 라니.

 평상시라면 미쳤냐며 당장에 뿌리치고도 남았을 일인데, 제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 스스로조차 충격적이었다.

 미쳤어, 윤다경.

 “···공부하자, 그만.”

 다경이 어색하게 눈을 떨구었다.

 손끝에 걸쳐 있던 포크를 접시에 놓아두곤 횡설수설하며 책을 펼쳤다.

 그러다 실수로 책 모서리가 포크 끝에 닿았다. 포크와 함께 떨어져버린 초콜릿이 테이블 위를 나뒹군다.

 어떡해.

 까맣게 흩어진 가루를 보곤 당황한 손이 서둘러 테이블로 향했다. 하지만 동시에 뻗어온 손이 때마침 손등 위로 겹쳐지고 말았다.

 “···.”

 “···.”

 발작처럼 손끝이 오그라들었다. 맞닿은 손바닥에 심장이라도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쿵쿵, 요란한 심박이 방 안을 가득 울린다.

 갑자기 진해진 체향이 정신을 흩뜨릴 듯 코끝에서 진동했다.

 아무래도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이 이상은 정말이지···.

 “아니다. 오늘은 그냥···.”

 “나 지금.”

 뒤늦게 빼내려 힘을 준 손끝이 꽉 붙잡혀 눌러졌다.

 “뽀뽀하면 맞아 죽겠지?”

 언젠가도 들은 적 있는 질문이 묵직하게 귓전을 파고들었다.

 “···뭐?”

 매점에서 장난스럽게 묻던 그때와는 또 다른 말투와 목소리였다. 그래서인지 괜스레 입이 마르고 심장이 둥둥 뛰었다.

 테이블 위로 결박된 손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기운에 화상이라도 입을 것 같다.

 여기서 뽀··· 뽀라니.

 말도 안 돼, 정말.

 “지, 지금 그걸 마, 말이라고 해? 당연···.”

 벗어나려 힘을 줬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럼 그냥 죽지, 뭐.”

 “···!”

 덜컥, 자리에서 일어난 도하가 뒷머리를 확 감싸 당겼다.

 델 것처럼 뜨거운 점막이 피할 새도 없이 입술을 삼켰다. 놀란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밀어내려 뻗은 반대쪽 손마저 그대로 붙잡히며 접촉이 짙어졌다.

 반사적으로 깨문 아랫입술이 탐욕 어린 입술에 깊게 빨렸다. 테이블 위에 겹쳐져 있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체온이 얽혔다.

 도하와 맞닿은 살 곳곳에 아스스 소름이 일었다.

 말도 안 돼.

 지금 둘이 하는 이 행위가 무엇인지 생각할 정신조차 없었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감각에 오감이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그러게.”

 “하아··· 하.”

 가볍게 빨아들이듯 하다가 떨어져 나간 입술 사이로 밭은 숨이 터져 나왔다.

 “틈 보이지 말랬잖아, 내가.”

 그것이 바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의 이유라는 듯, 도하가 자제력 없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떨리는 호흡을 주체하지 못한 다경이 그런 도하를 보며 숨죽인 비명을 토해냈다.

 “너, 너 대체 무슨···!”

 하지만 다시금 겹쳐지고 만 입술에 목소리가 흔적조차 없이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이번엔 좀 더 깊게 맞물려온 입술이 미처 다물지 못한 틈 사이로 기민하게 혀를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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