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6/98)

 35화.

 갑작스레 찾아온 그에게서 어떤 낌새를 눈치챈 듯 정운이 미심쩍다는 눈으로 도하를 바라보았다.

 “네 성격에 네 엄마가 찾아올 게 무서워서 움직인 건 아닐 테고.”

 아주 상관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따로 용건이 있는 건 맞았기에 도하가 굳이 숨기지 않았다.

 “실은 삼촌한테 부탁할 게 좀 있어서 왔어.”

 그럼 그렇지, 라는 눈으로 정운이 맥주를 홀짝인다.

 “뭐길래 부탁씩이나? 네 엄마 몰래 사고라도 쳤냐?”

 “아쉽게도 사고는 아니고, 회사에서 윤다경을 만났어.”

 장난스레 웃으며 맥주캔을 기울이던 정운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도하의 말에 이끌리듯 정면을 향한 얼굴 위로 희미한 동요가 스쳤다.

 “―누구?”

 “다경이 말이야.”

 어느새 바닥을 봐버린 빈 캔을 툭 내려놓으며 도하가 덧붙였다.

 “10년 전에 삼촌한테 돈 꿔다 바친 계집애.”

 캔을 쥔 정운의 손끝에 미세하게 힘이 실렸다.

 기억을 못 해서 되물은 게 아니라, 귀를 의심해서 물었던 것이었다.

 윤다경. 그 아이를 보다니.

 10년이나 지난 지금, 대체 어쩌다가···.

 불길한 마음을 지우고 표정을 가다듬은 그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도하를 향해 말했다.

 “그래? 안 그래도 걱정하더니, 어떻게 들어오자마자 만나냐.”

 제 부모에게 떠밀려 반강제로 유학길에 오르면서도 다경을 향한 걱정과 미련을 놓지 못하던 조카였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그런 애와 회사에서 다시 만났다니.

 말하는 뉘앙스 상으로는 일부러 찾아낸 것 같진 않지만, 우연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녀석을 혼란케 했을 것 같아 삼촌으로서 걱정이 앞섰다.

 “그러게. 죽었나 싶어서 포기했더니 거기서 그렇게 만나더라고. 죽어라 찾을 땐 머리털 하나 안 보이더니.”

 도하가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찬 듯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어라 찾았다는 그 말이 과장이 아닐 만큼. 그는 다경이 그렇게 제 앞에서 사라진 뒤, 정말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닌 채로 살았었다. 어린 날의 첫사랑이 이렇게까지 지독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힘든 나날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옆에서 모두 지켜본 사람이 바로 삼촌, 정운이었다.

 제 미련한 짝사랑의 시작부터 짧았던 연애 시절, 그리고 다경의 실종과 함께 끝났던 황망했던 이별의 과정까지.

 그러고도 못 잊어 절망 속을 허덕이던 모습을 보며 함께 아파해주고 다독여줬던 이가 바로 그다.

 그러니 그는 다경을 만난 지금 제 마음이 어떨지,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가장 근접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주변인이었다.

 “그래서 다경인 뭐래?”

 잠자코 조카의 말을 듣고 있던 그가, 두 번째 맥주캔을 여는 도하를 보며 물었다.

 도하는 돌아온 물음과 함께 문득 씁쓸함이 느껴지는 입 안을 가만히 혀끝으로 굴리며 선선히 입을 뗐다.

 “잘 살았대.”

 “뭐?”

 “내가 준 돈으로 당시에 서울로 올라가 방 한 칸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며, 다 내 덕분이라고 하더라.”

 “하···. 여전하네, 다경이도 참.”

 도하의 말을 곱씹은 정운의 입가로 헛헛한 웃음이 번졌다.

 기가 찬 반응이었으나, 그 또한 10년 전 다경의 성격을 모르지 않기에 머릿속에 그려지는 대화들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강단이 남달랐던 아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조카, 도하의 앞에서도 좀처럼 주눅 드는 법 없던 아이.

 제 어머니가 하는 일 때문에 억울한 일과 수모들을 겪어야 했으나, 그럼에도 항상 굳세고 제 자리에서 열심히 살던 아이.

 그래서 제 조카가 그 아이를 마음에 두었다고 했을 때, 어린놈이지만 보는 눈은 있네 하고 인정했더랬다.

 10년 전 그런 식으로, 도하를 내버리고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그 성격 어디 안 가.”

 덤덤히 말하지만 짙게 묻어난 한숨이 거세지는 매미 소리 사이로 번진다.

 “기집애가 여전히 못돼 처먹어선, 사람 마음 할퀴는 소리만 족족 해대고.”

 오랜만에 맛있는 밥상을 받아놓고도 좀처럼 쓴맛이 가시지 않는 입 안으로 도하가 남은 맥주를 탈탈 털어 넣었다.

 그러고도 쓴맛과 갈증이 가시질 않아 짜증스레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간밤, 제 마음을 마구잡이로 할퀴어 놓던 무자비한 음성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쓸데없는 것까지 다 끄집어내서 구질구질한 추억팔이하지 말고!’

 구질구질한 추억팔이라고.

 ‘그냥 할 거만 하고 빨리 계산 끝내자고. 제발.’

 하루빨리 서로 간에 남아 있는 계산이나 끝내자고. 미운 말만 골라 내뱉던 입술이 돌이킬수록 야속하다.

 그래놓고선.

 ‘없어, 이유 같은 거.’

 진짜 울고 싶고 다 뒤집어엎고 싶은 게 누군데 되레 세상이 무너진 눈을 하던 다경이 자꾸만 그의 심장을 아플 만큼 칭칭 동여맸다.

 계집애가. 못된 척할 거면, 좀 똑바로 하든지.

 목젖까지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콰득, 구겨 쥐고 만 맥주캔이 저만치 놓인 휴지통 속으로 거칠게 처박혔다.

 잠자코 듣고 있던 삼촌 정운이 나직이 한숨을 뱉으며 타박했다.

 “그러게 뭐 하러 10년이나 지난 인연을 가지고 쓸데없이 연연해. 그냥 각자 갈 길 가게 내버려 두지.”

 삼촌 말대로 그냥 내버려 둘 수 있는 인연이었다면 응당 그리 했을 테다. 고작 돈 오백이 뭐라고, 그런 유치한 협박과 오기를 부려가며 꼴사납게 굴지도 않았을 테다.

 하지만 다경은 제게 그저 과거라 치부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쓸데없이 연연하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경은 그렇게, 저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도 잘 살았다니 다행이네. 혹시 힘들게 살고 있지는 않을지 너나 나나 걱정 많이 했는데···.”

 “잘 산 거 아니야, 걔.”

 도하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론 잘 살았다고 하는데 내가 볼 땐 아니야.”

 재회 후 던진 첫마디부터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짓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윤다경은 원래 그런 애니까. 약함을 드러내느니 차라리 부러져버리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그래서 10년 전 어렸던 그 시절에도, 저를 비방하는 여자애들과 허구한 날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싸웠던 것이다.

 구차하게 울고 비느니, 얻어맞더라도 끝의 끝까지 부딪치기 위해서.

 그러니 분명, 이런 말도 안 되는 핑계와 이유를 들먹이는 덴 말 못 할 뭔가가 있었다.

 속 시원히 말은 못 하면서, 저의 이 억지에 장단 맞춰주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아무리 물어도 절대 제 입으로는 말하지 않을 터였다. 애초에 제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이유였다면 이 지경까지 상황을 끌고 오지도 않았겠지.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제가 직접 윤다경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아보는 것.

 “그래서 말인데, 삼촌.”

 도하의 푸념 어린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정운이 그의 부름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전에, 삼촌 친구분 중에 흥신소 하는 분 있다고 했지?”

 갑작스런 도하의 물음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그가 혹시, 싶어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흥신소는 왜.”

 “나 대신 윤다경 지난 10년 좀 알아 봐줘.”

 단단한 음성이 굳은 결의를 타고 도하의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뭐···.”

 “그간 대체 뭘 하고 살았는지, 어떻게 잘 살았는지. 그리고 무슨 이유로 그렇게 한마디 말도 없이 돈 오백만 챙겨서 훌쩍 떠나게 된 건지.”

 “···.”

 “아무리 물어봐도 말 안 해줄 애니까, 삼촌이 사람 통해서 좀 조사해 줘. 부탁할게.”

 조카의 생각지 못한 요구에 정운이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마주 보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여전히 미련을 떨치지 못한 조카를 보며 남모를 한숨이 짙어졌다.

 그냥 놔버리면 될 인연을 왜 저토록 놓지 못하는 건지.

 대체 그렇게까지 해서 제게 남는 게 뭐길래.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냐?”

 “어, 알아야겠어.”

 저어하는 듯한 그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도하가 결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 참···.”

 난처한 듯 머리를 헝클이던 그가 좀 더 직설적으로 도하를 향해 물었다.

 “제 입으로도 말 안 하려는 걸, 굳이 사람까지 써가면서 알려고 하는 이유가 대체 뭔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대체 뭐냐고. 도무지 돌아설 것 같지 않은 도하의 마음을 회유해보려던 그때.

 “다신 그렇게 허망하게 놓치고 싶지 않아서.”

 더는 말릴 수 없을 만큼 절박한 목소리가 도하의 입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병신 같게도···.”

 텅 비어버린 맥주캔을 꽉 움켜쥐며 도하가 제게 닥친 운명에 순응하듯 읊조렸다.

 “아직 그 계집앨 좋아하더라고, 내가.”

 어쭙잖은 자존심에 가능하다면 끝까지 부정하고 싶었으나, 더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직도 여전히, 윤다경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

 구차함에도 그것이야말로 부정할 수 없는 제 진심이며, 제가 이 유치한 놀이를 그만두지 못하는 진짜 이유라는 걸 도하는 이제 그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다시 그때처럼 놓치지 않으려면 목마른 제가 우물을 파는 수밖엔 없다.

 아무리 기다려도, 매정한 윤다경은 제 마른 목구멍에 그 어떤 물도 채워주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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