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4/98)

 43화.

 “···뭐해, 지금?”

 “···.”

 아, 좃됐다.

 차마 대꾸치 못한 도하의 입 안에서 그 말만이 맴돌았다.

 그냥 단추 몇 개만 풀어주고 있었을 뿐인데, 몹쓸 짓이라도 하다 걸린 기분이었다.

 도하는 여전히 단추를 붙들고 있던 손을 뒤늦게 등 뒤로 돌렸다.

 “···그런 거 아냐.”

 다경이 무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그러니까, 뭐가? 괜히 제 발이 저려 툭 뱉어놓고 보니 더 할 말이 없다.

 이 애매한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다경이 술에 취해 늘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왜애··· 나 덮치려고 했어?”

 “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가 일순 확 솟구쳤다.

 덮치려 했냐니.

 물론 마음이야 수백 번도 더 품었지만, 결코 실행에 옮길 생각은 없었다.

 “이게 사람을 대체 뭐로 보고. 정신 차렸으면 그만 일어나.”

 심중의 저변에 애써 밀어두었던 흑심을 들킬세라 짐짓 무심을 가장하던 순간이었다.

 “덮치면 뭐 어때···.”

 발음도 분명찮은 목소리가 그의 시선을 당겼다. 눈이 마주치자, 다경은 충혈된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초연한 얼굴로 덧붙였다.

 “어차피··· 그러려고 만나는 건데.”

 내내 빠르게 뛰던 심장이 그 순간 차게 굳었다. 도하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되물었다.

 “···뭐?”

 “그렇잖아.”

 다경은 핏, 하며 나지막한 실소를 내뱉었다.

 “너랑 나. 섹스 계약까지 한 마당에 이제 와서 무슨··· 따지는 게 더 우습지이···.”

 잠자코 듣고 있던 도하가 지그시 빈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여간, 맨정신이건 취하건 저 인정머리 없는 혀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섹스 계약까지 한 마당에 따지는 게 더 우습다고?

 사람 속도 모르고 지껄여대는 야속한 말에 병신처럼 저 혼자 발갛게 열 올라 있던 안면이 싸늘하게 식었다.

 “누가 그래. 그러려고 너 만난 거라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무겁게 방 안의 공기를 갈랐다. 취기에 젖어 느리게 눈꺼풀만 깜박이던 다경이 그 순간 초점을 찾고 그를 응시했다.

 “네 멋대로 나 수준 이하인 놈으로 만들지 마. 그동안은 억지 좀 부렸지만, 취한 사람 건들 만큼 쓰레기 새끼 아니야. ”

 그와 함께 도하가 침대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여기까지 데리고 오는 내내 제 맘을 휩쓸었던 죄책감과 망설임은 모르고, 섹스에 환장한 개새끼 취급을 하는 다경이 못내 서운했다.

 하지만 애초에 다경이 저런 오해를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게 저이기에 이 이상 날을 세울 수도 없었다.

 더 이상 저런 억울한 소리를 듣기 싫거든, 오해받을 짓을 더는 안 하면 될 일이다.

 “시간 늦었으니까 오늘은 그냥 자고 가든지. 취한 여자 덮치는 취향은 없으니까 안심하고.”

 무뚝뚝한 말로 제 안에 남은 미련을 잘라 내며 발길을 돌렸다.

 “취향이 뭐··· 따로 있긴 해?”

 줄곧 대꾸 없던 입에서 뜬금없는 질문이 흘러나왔다.

 “뭐?”

 “너어··· 10년째 고자였다면서, 취향이라는 게 따로 있긴 하냐고.”

 고자라니.

 뭉개진 발음하며 풀린 눈동자만 봐도 알 만했지만, 아무래도 취해도 단단히 취한 모양이다.

 도무지 윤다경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매치 되지 않는 어휘 선택에 도하가 기가 찬 듯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고자라니, 이게.

 “말이 좀 심하다, 너.”

 “왜. 뭐어··· 덮쳐도 상관없다는데, 왜 그냥 안심하고 자라는 건데?”

 예상의 범주를 자꾸만 벗어나는 다경의 발언이 멀쩡한 제 사고 회로마저 엉키게 만들었다.

 “왜, 술 마시니까 그게 안 서?”

 “하···.”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잠자코 듣고 있었더니 갈수록 가관이었다.

 “술 마시니까아··· 안 서냐구.”

 눈은 반쯤 풀린 채로 헤실거리며 아래를 눈짓하는 다경을 보곤 도하가 지끈거리는 정수리를 느릿하게 쓸어넘겼다.

 주사도 가지가지라지만, 아무래도 윤다경은 음담패설이 주사인 모양이다.

 이거 진짜, 절대로 딴 놈들 하곤 술 못 먹이겠네.

 어차피 내일 술에서 깨면 제가 뭔 소리를 한지도 모를 테지만, 멀쩡한 정신으로 이 장단에 놀아나 줄 수야 없지.

 “까불다 혼난다, 너. 곱게 재워준다고 할 때 그냥 자. 아님, 이제라도 집에 가든가.”

 그가 짐짓 냉담한 척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잡아빼곤 차갑게 몸을 돌린 찰나였다.

 “···!”

 미처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몸이 되돌려졌다. 갑작스레 뻗어온 작은 손이 그의 손목을 힘있게 잡아챘다.

 무슨 상황인지 인지할 새도 없이 몸이 당겨지고 입술이 겹쳐졌다. 나른하게 감긴 기다란 속눈썹이 그의 터질 듯 커진 눈동자에 새길 듯이 담겼다.

 미약한 온기와 촉촉한 감촉이 굳게 잠긴 그의 아랫입술을 빨고 서툴게 틈을 핥았다.

 단숨에 집어삼켜도 시원찮을 달큰한 향기가 코끝까지 환장하게 치밀어왔다.

 시트를 구겨 쥔 손끝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자제력이 흐트러진 턱이 바들 떨렸다.

 이대로 입술을 벌려 그냥 통째로 씹어 삼켜버릴까, 흉포한 욕구가 치밀었으나 그가 초인적인 자제력을 발휘해 다경의 어깨를 확 제게서 떼어내었다.

 “너···.”

 “네가 뭔데···.”

 제정신도 아니면서 뭐하는 짓이냐고 다그치려던 순간, 다경이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채로 속삭였다.

 “나더러 자라 마라야. 내가 괜찮다는데.”

 시시때때로 그를 돌게 하는 달콤한 체향이 흐릿한 알콜 향과 뒤섞여 비강을 핥아 올린다.

 덕분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이성을 가까스로 추스른 그가 다소 싸늘하게 되물었다.

 “너 지금, 네가 무슨 소릴 하는지 알고나 말하는 거냐?”

 “내가 왜 몰라?”

 험악하게 묻는 그완 달리 다경이 방싯 웃으며 대꾸했다.

 “벌써 너랑 이 짓 저 짓, 온갖 야한 짓은 다아― 했는데.”

 “하··· 너, 진짜.”

 돌아버리겠네, 하고 거칠게 읊조린 순간 다시금 예고도 없이 입술을 맞붙었다.

 미처 말을 마치지 못해 벌어진 틈을 과감하게 파고들며 다경이 보다 노골적으로 혀를 감아왔다.

 츱, 쯧―. 방 안의 공기를 울리는 습한 마찰음이 점점 밑바닥에 가까워지는 그의 이성마저 흐리게 만들었다.

 정말이지 돌겠네.

 행여 또 멀어질세라 목덜미마저 휘감아 매달린 그녀가 이젠 아예 겁도 없이 몸을 붙여 왔다.

 입천장을 핥고 매끄럽게 감겨드는 혀끝에서 달큰한 알콜향이 전도된다.

 ‘윤다경은 취했다.’

 마구잡이로 혀와 입술이 빨리는 와중에도, 도하는 그렇게 스스로의 이성을 다잡아 보려 애썼다.

 ‘나까지 휘둘려선 안 돼.’

 말캉한 가슴이 제 단단한 몸에 물색없이 치대고 문질러져도 애꿎은 시트만 움켜쥘 뿐 다경에겐 손끝조차 대지 않았다.

 하지만 철옹성 같은 이성과는 달리 몸은 솔직했고, 점점 더 열기가 몰렸다.

 ‘아무리 그래도 오늘만큼은 아니야.’

 아플 만큼 곤두서는 자극을 느끼고도 애써 부정하길 한참.

 “···뭐야.”

 집요하게 물고 빨던 입술을 잠시 놓은 다경이 슬쩍 그의 아래쪽을 눈짓했다.

 “고장 난 줄 알았더니··· 섰네?”

 나른하게 휘어진 그녀의 눈초리가 이성을 배반한 채 불뚝 솟아올라버린 앞섶을 대놓고 가리켰다.

 그리고 그 순간.

 “씹···.”

 마지막 남은 이성마저 휘발된 그에게서 나지막이 욕설이 터져 나왔다. 한계점에 도달한 도하의 손이 움켜쥐고 있던 시트를 확 놔버렸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짐승 권도하가 아니라 사내새끼 권도하이고 싶었는데···.

 “나 진짜 오늘은.”

 그의 손끝에 감겨 있던 넥타이가 푸륵, 풀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이럴 생각 없었다는 것만 기억해.”

 이 밤의 시작을 새겨주듯 읊조린 입술이 다경을 집어삼켰다.

 * * *

 지잉, 지이잉

 끈질긴 진동음이 매트리스를 울리다 못해 두개골까지 흔드는 듯했다.

 “아···.”

 깨질 것처럼 아려오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다경이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아 손을 뻗었다.

 닿는 대로 목적도 없이 헤매던 손안에 드디어 휴대폰이 잡혔다.

 다경은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도 못 하는 채로, 습관처럼 통화 버튼을 밀었다.

 “···여보세―.”

 ― 어디야! 이눔의 계집애야!

 깼던 잠도 도로 깨게 만드는 앙칼진 목소리에 다경이 휴대폰을 멀찌감치 귀에서 뗐다.

 어디냐니.

 “어디긴, 방이···.”

 ― 아주 이젠 툭하면 외박을 하네, 이게!

 외박을 했다고?

 비록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긴 하지만, 저는 온전히 누워 있고 전화도 받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며 물으려던 목소리가 뒤늦게 뜬 눈꺼풀 사이로 들어온 광경과 함께 뚝 그쳤다.

 낯설었다.

 ― 너 대체 어디야? 간밤에 어디서 잤어? 바른대로 말 안 해!

 당당히 집에 있노라고 답하기엔, 지금 제 눈에 비치는 광경이 지나치게 낯설었다.

 또한 뭔가가 허전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 터라 잠을 잘 땐 꼭 옷에 수면양말까지 신고 자는 저인데, 어째서 몸에 닿는 이불의 감촉은 이토록···.

 “···!”

 혹시 하고 제 몸을 내려다본 다경이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읏···.”

 온몸의 관절 마디마디로 둔통이 덮쳐들어 나지막이 앓는 소리를 삼켰다.

 ― 여보세요? 윤다경! 이 기집애가 왜 또 말이 없어?

 대꾸 없는 통화를 붙들고 조바심이 난 엄마가 한층 더 가열차게 그녀를 다그쳤다.

 뭐라고 답을 하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제가 닥친 상황이 더 황당하고 까마득한지라 다경은 도무지 입이 열리질 않았다.

 내가 대체 여기서 뭘 한 거지.

 여긴 대체 어디고?

 왜 내가 다 벗은 채로 여기 누워 있는 거야?

 몸은 왜 또 이 모양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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