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5/98)

 44화.

 가슴부터 사타구니 안쪽까지. 무슨 이갈이하는 짐승에게 물어뜯긴 것처럼 울긋불긋해진 살결을 보며, 다경의 심장이 불길하게 둥둥거렸다.

 ‘설마···.’

 그와 함께 몰랐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희미한 기억이 하나둘씩 머릿속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너어··· 10년째 고자였다면서, 취향이라는 게 따로 있긴 하냐고.’

 아닐 거다.

 ‘왜애··· 술 마시니까 그게 안 서?’

 내가 한 말이 아닐 거야.

 ‘어? 고장난 줄 알았더니··· 섰네?’

 아니어야 했다. 이쯤 되면 했더라도, 안 했다고 해야 돼!

 ― 다경아, 얘! 너 혹시 무슨 일 있어?

 끄으으, 차마 뱉지 못한 비명이 절박하게 짓씹은 입 안에서 애처로이 맴돌았다.

 있어,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었어!

 찢을 것처럼 움켜쥔 시트를 머리 위로 확 뒤집어쓰며 다경이 재차 막힌 비명을 질러댔다.

 ― 왜 그래? 말도 없고. 무슨 일이야? 엄마한테 혼날까 봐 그러는 거야? 응?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불안한 음성에 다경이 가까스로 멘탈을 챙기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냐, 엄마. 그게 아니고.”

 내가 간밤에 미친 짓을 좀 해서요, 라곤 차마 말할 수 없어 꾹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그럴듯한 말을 덧붙였다.

 “회식 자리에서 과음을 좀 했는데, 너무 취해서 같은 팀 여직원 집에서 잤어.”

 ― 뭐야, 정말···. 별일 없는 거 맞아?

 아니, 엄마. 있어. 있는데. 아직 내가 무슨 짓까지 한 건지 나조차도 모르겠어.

 “응. 없대도.”

 ― 아휴, 이놈의 지지배가 진짜.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심장 철렁하게. 아무튼 들어와서 얘기해!

 한결 안도한 엄마의 폭풍 잔소리를 끝으로 통화가 끊기자, 다경이 숨어들 듯 이불 속으로 쏙 모습을 감췄다.

 다행히 먼저 일어나 나간 건지 옆자리는 비어있었고, 그래서 더 다경은 간밤의 일들이 불안했다.

 대체 술기운을 빌려 무슨 미친 짓을 한 거니, 윤다경.

 다경이 깜깜한 의식 속을 헤매며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곧, 차라리 잊어버렸으면 좋았을 제 무의식의 만행들이 하나, 둘 머릿속에 떠오르고 말았다.

 * * *

 “나 진짜 오늘은.”

 푸륵― 그의 손바닥에서 풀린 넥타이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럴 생각 없었다는 것만 기억해.”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말을 끝으로 입술이 삼켜지며, 순식간에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은 알몸이 되었다.

 “으음··· 도하야, 흣···.”

 “허리 더 들어봐.”

 맹세코 이럴 생각은 없었다고 했으면서, 막상 그녀를 취하는 도하의 몸짓은 평소보다도 훨씬 조급하고 거칠었다.

 “너무, 흐, 빨라··· 아!”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몰아치면서도 그대로 끝을 보고 싶을 만큼 아찔하게 만들었다.

 “···도하야, 으, 천천히!”

 “하··· 보챌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발뺌이야.”

 바르작대는 허리를 꽉 부여잡으며 그가 보다 속도감 있게 몸을 밀쳐 올렸다.

 구명줄을 쥐듯 시트를 거머쥔 손끝에 바짝 힘이 실렸다.

 으흣, 울 것처럼 칭얼대던 다경이 당겨 쥔 시트 위로 신음하는 입술을 묻었다.

 애타는 흐느낌이 막힌 입 안에서 가냘프게 흐트러진다.

 자비 없는 손에 붙잡혀 너울지는 새하얀 여체가 군데군데 열기로 발갛게 물들어갔다.

 “나 봐, 윤다경.”

 깊고 빠르게 접합하는 부위를 내려다보는 짙은 눈은 발정기의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다.

 “흐··· 싫어.”

 발갛게 젖어든 두 눈을 도리어 꾹 감아버리며 다경이 흐느꼈다. 굴곡진 몸 위로 스민 땀이 만든 마찰음이 더욱 노골적으로 울려 퍼졌다.

 “나 보라니까.”

 재차 요구가 이어졌지만, 제 위를 군림하는 도하를 차마 바로 볼 수 없어 두 눈마저 가려버리자 그가 결국 손목마저 낚아챘다.

 “아흐, 이상해.”

 “넌 꼭 좋으면 그렇게 말하더라.”

 섰네, 어쩌네. 감당 못 할 야한 말은 잘만 떠들어 놓고서 이제 와 앙탈이라며 다정히 책망한 그가 이내 좀 더 선명하게 아래를 치고 빠지기 시작했다.

 “여기야? 그 이상하다는 데가?”

 몇 번의 관계로 다경이 느끼는 지점을 간파한 그가, 위쪽을 긁듯이 부러 짓궂게 허리를 놀렸다.

 그로 인해 흐으, 자지러질 것처럼 몸을 떤 다경이 저도 모르게 그의 것을 꽉 조였다.

 “하··· 진짜 이상해지게 만드는 게 누군데.”

 참기 힘든 듯 미간을 찌푸린 도하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갈수록 바닥을 치는 자제력이 그 역시 버거운 듯, 신음하느라 벌어진 다경의 아랫입술을 슬쩍 이 끝으로 물어 당겼다.

 “더 이상해지게 해줘? 응?”

 “아!”

 가슴을 뭉갤 듯이 거머쥐며, 그가 보다 안쪽까지 깊게 침범했다. 아랫배를 확연하게 짓누르는 압박감에 다경이 숨넘어갈 듯 도리질 쳤다.

 “흐으, 하지 마앗, 그렇게, 읏!”

 “하지 말라면서 여기는 왜 이러는데, 다경아.”

 이렇게 꽉 씹어 삼키면서 잘도 그런 말을 한다고. 그가 다경이 못 견뎌하는 곳을 정확히 공략하며 갈수록 애타게 그녀를 내몰아갔다.

 가빠지는 호흡을 따라 짙푸른 시트 위로 펼쳐진 갈색 머리칼 또한 어지럽게 물결쳤다.

 눈앞까지 밀려들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빠져나가는 절정의 잔상에 다경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놀리듯이 치고 빠지는 몸짓이 감질났다.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 만족감이 애가 탔다.

 이대로 끝의 끝까지 몰아쳐 줬으면 좋겠는데 자꾸만 그 앞에서 멈추는 도하 때문에, 다경은 바보 같게도 곧 눈물이 나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애가 닳아 다리마저 휘감은 순간 그가 또 움직임을 멈추었다.

 “천천히 하라며.”

 얄궂게 입꼬리를 당긴 도하가 둥글게 허리를 돌리다가 쏙, 끄트머리만 남겨두고 뒤로 빠져나갔다.

 그의 허리를 꽉 조이고 있는 가느다란 다리가 파들파들 떨린다.

 일부러 이러는 거야, 이 나쁜 놈.

 열기로 충혈된 눈가에 서러운 물기가 번졌다.

 처음이라면서 어떻게 이래.

 할 때마다 서툴고 애가 타는 저와는 달리 갈수록 여유로워지는 그가 다경은 참으로 얄밉고도 야속했다.

 “흣···, 거짓말쟁이.”

 “뭐?”

 복받치는 설움에 그렇게 말하자, 잠시 움직임을 멈춘 도하가 땀으로 젖은 눈매 끝을 희미하게 찌푸렸다.

 “너 나랑 한 게 10년 만에 처음이었다는 말, 다 거짓말이지?”

 다경이 원망과 불신으로 넘실대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하. 뭐라는 거야.”

 그가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다경이 자꾸만 울음이 샐 것 같은 입술을 손등으로 꾹 짓누르며 울먹이듯 중얼댔다.

 “처음이라면서, 흐··· 어떻게 이렇게 잘해. 말도 안 돼, 정말.”

 10년 만에 재회해 가졌던 첫 관계 때부터. 아니, 어쩌면 10년 전 그 밤에도 느꼈던 의구심이었다.

 모든 게 서툴고 부끄럽기만 한 저완 달리, 권도하는 어쩌면 이렇게나 하나부터 열까지 능숙하고 뻔뻔할 수 있는 건지. 줄곧 궁금했었다.

 분명 제가 처음이라는데, 도무지 처음이라곤 믿기지 않는 그 능란함이 다경은 어쩐지 못내 서러웠다.

 그의 품에서 자꾸만 흐트러지고 여유가 사라지는 스스로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창피했다.

 “생사람 잡지 마.”

 “아!”

 다경의 말을 곱씹느라 잠시 멈춰 있던 그가, 다시금 몸을 확 당겨 붙이며 거만하게 말했다.

 “내가 잘하는 게 아니라 네가 지금껏 만나온 새끼들이 시원찮은 거겠지.”

 “흐읏, 응!”

 이렇게 날 때부터 야해 빠진 몸인데 이런 널 제대로 만족조차 못 시킨 그놈들이 시시한 거 아니냐며, 그가 밀어치는 움직임에 가속을 붙였다.

 그런 시시한 경험조차 없는 저인데.

 정신없이 흔들리는 몸을 그의 품에 속수무책으로 내맡긴 채 다경은 생각했다.

 듣고 보니 문득, 그런 제가 도하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 같아 자조 섞인 실소가 흘렀다.

 “하긴···. 피차 경험도 없으면서, 내가 뭘 안다고.”

 점점 더 거칠어지는 그를 받아내며 다경이 설핏 씁쓸하게 입가를 당겼다.

 그 순간, 깊게 묻었다가 빼길 반복하던 허리짓이 불현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뭐?”

 그가 다소 의구심이 깃든 얼굴로 다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갑작스레 찾아든 자극이 낯설어 다경이 살짝 허리를 뒤틀었다.

 “윤다경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달싹이는 몸을 도로 짓눌러 붙잡으며 그가 다그치듯 물었다.

 글쎄, 내가 뭐라고 했더라.

 조금 황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다경이 뒤늦게 밀려든 창피함에 망설이듯 말문을 열었다.

 “처음이라면서 어떻게 그렇게 잘하냐고···.”

 “아니 그거 말고, 바로 전에.”

 그가 단호히 말을 자르곤 재차 반복해서 물었다.

 “바로 방금 전에 한 말 있잖아, 너.”

 정신없이 몰아치던 직전과는 달리. 어쩐지 들떠 보이기까지 하는 그를 보며 다경이 한참을 두 눈만 깜박였다.

 움직임은 없이, 해부하듯 빤히 내리 닿는 눈이 뜨거웠다. 다정하면서 어딘지 모를 소유욕이 깃든 시선에 입이 바짝 마른다.

 내가, 내가 대체 무슨 말을···.

 “어, 내가···.”

 술에 취해 왠지 해선 안 될 말을 한 건 아닌가 싶어, 무겁게 내리 닿는 시선을 피해 양팔로 얼굴을 가리려 한 순간이었다.

 “피차 경험도 없다고 했지, 너.”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그가 뒤늦게 얼굴을 가린 팔을 잡아채 시트로 결박했다. 가느다란 팔을 그러쥔 커다란 손등 위로 푸르스름한 힘줄이 돋아났다.

 “설마 너도···.”

 모르고 지나칠 뻔했던 희망 한 줄기를 낚아챈 검은 눈이 선연하게 빛났다.

 “그 밤 이후로, 내가 처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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