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소리 좋네.”
뭐가 좋은지 하하, 경쾌한 웃음을 뱉은 그가 그대로 다경을 안은 채 자쿠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야, 이···!”
어찌해볼 새도 없이 풍덩, 몸이 물에 잠겼다. 깜짝 놀라 그를 밀쳐냈으나, 근육으로 다져진 몸은 단단하고 민첩했다.
“젖었다, 벗자.”
으쌰, 하고 무슨 아이 어르는 듯한 추임새를 넣더니 어느 틈에 다경의 젖은 티셔츠마저 훌렁 머리 위로 빼내어버렸다.
“으프···, 대체 뭘 하는 거야! 이 변태!”
엉겁결에 탕에 넣어져 옷까지 벗겨져 버린 다경이 뒤늦게 몸을 가리며 그의 가슴을 때렸다.
“왜, 꽉 차고 비좁은 게 둘이 들어가기 딱인데.”
제법 매운 손때에도 아랑곳 않더니 미처 벗지 못한 그녀의 파자마에까지 손을 갖다 대었다.
“나가, 안 나가? 진···!”
발버둥 처봤지만 소용 없이 옷이 벗겨졌다. 동시에 그대로 그의 품에 빨려들 듯 폭 당겨지고 말았다.
덕분에 젖은 등으로 선명하게 맞닿는 단단한 가슴을 느끼곤 다경이 놀란 숨을 흡, 하고 삼켰다.
“하··· 좋다, 따뜻하고.”
등 뒤에서 그녀를 꼭 안은 채, 도하가 가벼이 탄식했다.
“어제 너 안고 올라와서 밤새도록 그짓까지 했더니 몸이 완전 뻐근해.”
젖은 목덜미로 스며드는 그의 숨결이 간지러워 다경이 잔뜩 몸을 옹송그렸다.
더운물 때문인지 유독 뜨겁게 느껴지는 체온이 맞닿은 살갗을 녹일 것 같다.
분명히 밥 먹고 씻으란 말에 별생각 없이 들어온 욕실이었는데, 어쩌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된 건지 모르겠다.
“대, 대체 뭐 하는 거야. 물 받아줄 테니까 씻고 가라더니.”
“그러니까 누가 여기서 뭘 더 하재? 씻자고, 그냥.”
천연덕스럽게 대꾸한 그가 더는 반항치 않는 다경을 놓아주며 자쿠지에 양팔을 벌려 기대었다.
보기 좋은 근육으로 잘 짜인 너른 가슴이 그녀의 뒤로 널찍하게 펼쳐졌다.
조금은 거리감을 두고 떨어졌음에도, 그가 같은 욕조 안 바로 등 뒤에 있다는 사실에 다경은 쉽사리 몸의 긴장이 풀리질 않았다.
욕조 안이니 뭘 더하고 말 것도 없을 걸 알면서도, 다경은 괜스레 가슴이 둥둥 뛰었다.
“술 취했을 땐 세상 과감하더니, 별것도 아닌 걸로 쫄긴.”
귀끝까지 빨개진 채로 잔뜩 긴장하고 있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도하가 웃었다.
내가 언제? 라고 물으려다가 잊고 있던 어제의 기억이 떠올라 또다시 얼굴이 빨개졌다.
‘어때, 눈 가리고 하니까 좋아?’
‘흣··· 조용히, 으, 해.’
‘뭘 자꾸 조용히 하래. 네 소리가 더 크고 야하면서.’
‘하읍··· 응.’
‘안 보이니까 더 상상돼서 꼴린다, 다경아.’
‘그런 말, 흐, 하지··· 마, 변태···.’
‘그래, 그 변태 새끼 위에서 더 박 타면서 흔들어 봐. 예쁘게.’
‘아···!’
끄으, 차라리 영원히 기억이 안 났으면 좋겠는데 도리어 쓸데없이 생생해진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그 덕에 얼굴이 타오를 듯 빨개져, 다경은 모아쥔 무릎 위로 아예 폭 얼굴을 묻어버렸다.
무릎 사이로 박힌 얼굴이 욕조 안에 찰랑이는 더운물에 묻혔지만 신경쓰지.않았다.
지금 같아선, 차라리 이대로 욕조 물에 코라도 박고 확 죽어버릴까 싶을 만큼 창피한 심경이었으니까.
보글보글, 기포가 올라오는 뜨끈한 물속에 얼굴을 담근 채 다경은 간밤의 일을 상기했다.
‘네가 뭔데···. 나더러 자라 마라야. 내가 괜찮다는데.’
대체 어쩌자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도발을 했던 건지 모르겠다.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욕망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매번 그에게 끌리는 마음을 부정해야 하는 이성의 발악이었는지.
저 또한 살면서 그토록 취해본 건 처음이라, 제가 어제 도하 앞에서 보였던 반응들이 하나같이 당혹스러웠다.
먼저 달려들어 키스를 한 것도, 마다하는 그를 붙잡아 그런 상황까지 몰아간 것도. 그래놓곤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너 내가 처음이라며.”
“픕···, 프, 풉!”
그런 말도 안 되는 취중고백을 해버린 것도.
“뭐야, 괜찮아?”
당황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더운물을 들이켜고 만 코가 눈물이 날 만큼 매웠다. 하지만 다경은 제가 간밤에 뱉은 말이 더 눈물 날만큼 맵고 창피해, 제대로 괴로움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참 나, 그러게 뭐 한다고 욕조 물에 코는 박고 있어?”
그 정도로 부끄럽고 창피하니까 그렇지, 이 나쁜 놈아.
사람 속은 모르고 물을 들이켜 매울 코를 다정히 문질러주는 그를 보며 다경이 남모를 설움을 삼켰다.
“이제 좀 괜찮아?”
“···괜찮아.”
다경은 시무룩한 얼굴로 그리 답하며, 도로 몸을 돌려 그를 등졌다.
“술이 덜 깼나, 참. 이리로 와서 좀 기대.”
나직이 한숨을 뱉은 도하가 자꾸만 거리를 두려는 다경을 홱 당겨 그의 품에 기대게 했다.
헐벗은 등 뒤로 그의 매끄럽고 단단한 피부가 뜨겁게 닿았다. 깜짝 놀라 몸을 빼려 했으나 허리를 조여 안는 팔의 힘이 너무 강해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무 짓도 안 할 거니까 눈 좀 감고 기대라고.”
그가 아예 눈마저 가려버리며 그녀를 등 뒤에서 더 꽉 끌어 안았다.
버텨볼까 싶었으나 맨살에 닿는 온기가 좋아 더는 그럴 수 없었다.
조금만 쉴까. 물 속에서 겹쳐드는 도하의 품이 안온해 문득 그런 합리화가 들었다.
결국 더이상 그를 밀어내지 못한 다경이 포기하듯 그의 너른 품에 기대었다.
그가 말한 대로 눈을 감고 숨죽인 듯 안겨 있는 다경을 내려다보며, 도하가 가만히 몸에 물을 끼얹어주었다.
찰박찰박, 미처 물에 잠기지 못해 차가워진 어깨가 쪼르르 적셔드는 따스한 물에 조금씩 녹아들었다.
얼어 있는 땅에 온기가 번지듯, 그렇게 차츰 녹여갔다.
그 다정하고 따스한 손짓이 다경은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따뜻하면 안 되는데. 이렇게 자꾸 기대고 싶어지면 안 되는데.
예나 지금이나 넌, 시시때때로 내 마음을 흔들어 이토록 무방비하게 만들어 버린다.
“간밤에 내가 했던 말은···.”
속수무책으로 나부끼는 제 마음을 다잡으려, 다경이 눈을 감은 채로 부러 단호히 말했다.
“딱히 신경 쓰지 마. 무슨 의미가 있어서 한 말은 아니니까.”
사실이 그랬다.
네가 내게 처음이자 유일한 남자라는 사실을 네가 알게 됐다고 해서, 내가 너에게 주었던 상처가 없던 것이 되는 건 아니니까.
어제 일만 해도 마찬가지다.
나로 인해 상처 받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네게, 10년 전 그 사람들을 비교해 가며 너도 그자들과 똑같지 않냐는 억지로 또 한 번 네가 느낄 필요 없는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정말 미안해야 할 사람은 난데.
네가 왜 내게 그럴 수밖에 없는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내게만큼은 맹목적인 네 마음을, 그렇게나 함부로 휘두르고 할퀴었다.
그러니 너와의 그 밤들이 내겐 처음이자 유일한 밤이었다는 걸 네가 몰랐다고 해서, 그래서 네가 날 아프게 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어차피 모든 건, 10년 전 네 마음을 기만하고 도망쳤던 내가 감내해야 할 몫이니까.
“넌 그럴지 몰라도, 난 아닌데.”
하지만 도하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의미 있어, 나한텐. 그것도 충분히.”
그가 이젠 제법 따뜻해진 어깨를 꾹 움켜쥐며 젖은 목덜미에 작게 입을 맞추었다.
“권 도하, 너랑 난···.”
“알아, 무슨 말 하려는 건지.”
단호한 목소리가 다경의 말을 막아섰다.
“남은 건 10년 전 못다 한 계산밖에 없는 사이다. 그게 네가 너랑 내 관계에 대해 내리고 싶은 하나뿐인 정의인 거잖아.”
굳이 네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아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그가 말했다.
다경이 차마 대꾸치 못하고 입술을 꾹 물었다. 입버릇처럼 말해놓고선 새삼 아프게 다가오는 관계에 대한 정의가 마른 목구멍을 깔끄럽게 긁었다.
“앞으로도 넌 계속 그렇게 생각해.”
도하가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아까부터 자꾸만 소리없이 젖어드는 다경의 눈가를 손끝으로 가만히 문질렀다.
“대신에 난.”
그대로 손을 미끄러트려, 짓씹혀 생채기 난 작은 입술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파고들었다.
“10년을 기다린 나한테 온 열 번의 기회라고 나 좋을 대로 생각할 테니까.”
등 뒤에서 기울어져 넘어온 입술이 손끝에 눌려 벌려진 입술을 빨고 피할 새도 없이 혀를 얽었다.
제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숨결을 갈취했다.
더는 흔들려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밀어내지 못한 다경이 결국 포기하듯 그를 받아들였다.
톡, 톡- 그의 몸을 타고 떨어진 물방울이 둘이 함께하는 비좁은 욕조 안에 자잘한 파문을 일으킨다.
아무리 부정해도 숨길 수 없는 마음의 동요처럼.
* * *
같은 시각.
날카로운 휴대폰 벨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울렸다.
서재에 앉아 있던 정운은 시선을 옮겨 액정에 뜬 발신인을 확인했다.
얼마전 도하의 부탁으로 제자인 다경의 행적에 대해 알아봐 달라 부탁했던 친구에게서 온 전화다.
“어. 창현아.”
― 어. 통화되냐?
“응. 말해.”
그가 읽고 있던 책을 접어두며 창밖으로 시선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