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도하의 가슴에 독한 화농처럼 남아 있으리라고.
그 마음이 못나서. 그러곤 10년 만에 재회한 지금도 솔직하지 못한 스스로가 미워서, 못 하는 것이다.
이런 비틀린 마음을 가진 채로 대체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와 연애를 한단 말인가.
“왜 그래, 딸. 너 진짜 무슨 일 있어?”
계속해서 자책을 반복하는 다경의 팔을 붙잡으며 엄마가 물었다.
안타까워하는 그녀의 마음이 전해졌지만, 다경은 차마 이런 속마음을 도저히 모두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아냐. 아무것도 없어.”
“근데, 왜.”
“그냥 아직은, 내가 누군가에게 속을 다 털어놓을 만큼 여유롭지 못해서 못 하는 거야. 그러니까 엄마도 너무 신경 쓰지 마.”
좀처럼 의구심이 걷히지 않는 엄마의 손을 꽉 붙잡으며 다경이 간곡하게 말했다.
“내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믿음직한,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그땐 나도 연애해 볼게. 엄마.”
과연 제게 그런 인연이 또다시 허락될지 알 수 없지만···.
* * *
폭풍 같던 주말이 지나고, 또 다른 폭풍을 몰고 올 월요일이 돌아왔다.
“자기 왜 말 안 했어? 권 팀이랑 둘이 동창인 거?”
각오는 했다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쏟아지는 질문에 다경이 당황한 낯을 애써 감추며 옆을 돌아보았다.
“아, 그게···.”
“그르니까요! 덕분에 저희 그날 완전 깜놀했잖아요. 송 과장님, 저, 그리고 박일호 과장님까지 셋 다 하나같이 벙쪄선.”
아, 그 자리에 박 과장님까지 계셨었던 건가 보다.
그러고 보니 그대로 뒀다간 박 과장님 품에 안겨 가는 꼴을 봐야 해서 어쩔 수 없이 나섰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괜히 또 경계하며 이상한 낌새나 흘린 건 아닌지 모르겠네.
“굳이 알릴 만큼 친했던 것도 아니라서···.”
“뭐야, 그쪽에선 오히려 우리더러 뭐라고 하던데? 굳이 사적인 부분까지 알릴 정도로 친분 있는 사이는 아닌가 보다고.”
“아···.”
다경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튼지 간에 그 밉살맞은 말만 골라 내뱉는 입술은 알아줘야 했다.
어떤 식으로 빈정댔을지. 안 봐도 눈에 선해서, 다경은 도리어 제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 자기 반응 보니까, 저도 막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니었던 것 같구만.”
“하하. 네, 맞아요···.”
어색하게 끌어 올린 입가가 잘게 경련했다. 그러곤 행여나 또 둘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쏟아질까 봐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아무튼 금요일 일은 정말 죄송했어요. 어쩌다 보니까 제가 너무 과음을 해서, 괜히 여러 사람한테 민폐를···.”
“민폐는 뭐가 민폐야? 살다 보면 뭐 그런 날도 있는 거지. 어떻게 매번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사니? 미애 쟤를 봐라. 굳이 술까지 안 마셔도 수시로 정신줄 놓잖아?”
“아이, 과장님은. 왜 또 가만히 있는 저를 디스하고 그러세요오!”
미애가 억울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송 과장이 다경에게 슬쩍 고개를 기울인 채 조용히 속삭였다.
“그리고 팀장이랑 자기 동창인 건 다른 직원들한텐 따로 말 안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송 과장을 보는 다경의 눈이 커졌다.
“자기가 굳이 우리한테 말 안 한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 흔들며 말하자 옆에 있던 미애도 발랄하지만 소곤소곤한 어조로 장난스레 덧붙였다.
“저도 입에 자물쇠 꽉 채웠어요, 대리님.”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는 다경의 얼굴에 잔잔한 동요가 스쳤다.
두 사람의 생각지 못한 배려가 괜스레 마음을 울렸다.
항상 실없는 농담을 하며 가벼운 듯이 구는 송 과장과 미애였으나, 둘은 보기보다 훨씬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4년간 알고 지내온 내내 그러했다.
가깝게 지내는 듯하면서도 어딘지 사적인 부분은 이야기하길 꺼려하는 그녀에게 절대 무리한 질문을 퍼붓는다든지, 불편하게 하는 법이 없었다.
분명 사적으로 미심쩍은 부분도 있었을 텐데 깊게 파고들지 않고, 외려 다른 직원들에겐 말하지 않았으니 신경 쓰지 말란 말까지 덧붙여주다니.
그런 그들의 배려가 다경은 고마웠다. 그리고 그래서 또 미안하기도 했다.
아마도 저는, 앞으로도 이들에게 모든 걸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순 없을 테니까.
“알겠어요.”
감사하다 말하는 게 어쩐지 더 이상할 것 같아서, 다경이 살포시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막 모니터 앞으로 몸을 돌리려던 찰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팀장단 회의를 마친 그가 가벼운 인사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안녕하세요~.”
가벼이 맞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틈에 섞여 다경도 작은 목소리로 그를 향해 인사했다. 무심히 옆을 스쳐 가는 듯싶던 도하가 사람들의 눈을 뒤로 한 채 흘깃 그녀를 내려다본다.
“···!”
습관처럼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던 다경이 사고처럼 마주친 시선에 저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주말에 있었던 일들 때문일까.
‘흣··· 너무, 읏, 그만.’
‘하··· 물이 뜨거운 거야, 네 여기가 뜨거운 거야?’
‘네가 더, 응, 뜨거워. 바보야.’
‘응, 인정.’
금요일 밤의 일만으로도 모자라, 그다음 날.
뭔가 말랑해진 분위기에 휩쓸려 욕조에서 가졌던 마지막 정사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라, 다경은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작 틈만 나면 음담패설을 골라 하는 저 위인은 주말 동안 잘 들어갔냐는 인사 한마디도 없이 저리 멀쩡해 보이는 얼굴로 출근했는데, 왜 나만 이러고 있는 건지.
‘그새 저 변태에게 변태 같은 생각들이 옮기라도 했나 봐.’
술 취해서 도하를 상대로 뱉었던 망측한 발언들도 그렇고.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스스로의 반응에 낭패감을 느끼고 있을 때,
“아, 오늘은 지난주에 말했던 기획안 한 명씩 팀장실에서 개별 브리핑받겠습니다.”
이미 이 공간을 지나쳤을 거라 여겼던 이의 목소리가 정수리쯤에서 들려왔다.
한 명씩 팀장실이라니.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때마침 그녀가 있는 쪽을 내려다보고 있던 검은 눈과 찰나처럼 시선이 엉켰다가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조금은 악의적인 미소를 띤 그의 입술에서 아찔한 명령이 떨어졌다.
“대리 직급부터 순차적으로.”
매끄럽게 당겨 올라간 입술선에서 의도를 간파한 새하얀 얼굴에 옅은 당혹감이 번졌다.
흘깃 그 얼굴을 내려다보는 듯하던 그가 짓궂은 웃음을 보이며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부러 대리 직급부터 팀장실로 호출하는 그 저의가 뻔했다.
설마···.
“으이구. 저 독한 인간, 월요일 아침부터 저러고 싶을까 정말. 쯔쯧.”
옆에 있던 송 과장이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오늘도 여전히 우리 권 팀장님은 나이스으.”
뒤에 있는 미애는 그래도 좋다며 멀어지는 멀끔한 뒤태를 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필 저런 사악한 녀석하고 상사로 재회해서.’
다경이 주말의 숙취가 깨지 않은 듯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끙, 한숨을 뱉었다.
오늘만큼은 윤 대리가 아닌 윤 과장이고 싶다.
* * *
왠지 모를 긴장감이 감도는 팀장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소셜 마케팅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젊은 소비층에도 효과적인 홍보 효과를 불러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상입니다.”
다경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기획안의 브리핑을 마쳤다.
“네, 좋네요.”
의외로 허튼수작 없이 꼼꼼하게 기획안을 살피던 그가 사무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참신함은 좀 떨어지지만 기존에 해왔던 방식을 좀 변형해,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보완하는 쪽으로 가도 괜찮겠어요. 일단 다른 직원들 기획안도 살펴보고 또 이야기 나누기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
팀장실을 들어설 때부터 남모를 긴장감에 휩싸여 있던 다경이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이제 나가봐도 되려나.
눈치를 살피듯 하다가 조심스레 운을 뗀 찰나였다.
“그럼 전 이만···.”
“그래서, 주말에 어머니께 머리채는 안 잡혔고?”
들고 있던 서류를 덮어두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가 물었다.
줄곧 예의와 격식을 차리던 말투는 벗어던지고 원래의 도하로 돌아온 물음이었다.
“사적인 얘기는 굳이 회사에선.”
“내 부하 직원의 안위가 달린 문제니까 그것도 엄밀히 따지자면 공적인 문제 같은데.”
그가 책상 끝에 비스듬히 기대서며 말했다. 가만 보면 참,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잘도 넘어간다.
뭐 문제 될 거 있냐는 듯, 팔짱 낀 어깨를 능청스레 으쓱하는 그를 보며 다경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저 뻔뻔한 얼굴을 보자니 사적이네 공적이네, 실랑이를 이어봤자 오히려 저만 더 피곤해질 듯싶었다.
“보다시피 멀쩡하게 살아 돌아왔어. 됐지?”
다경이 부러 새침한 톤으로 말한 뒤, 이제 서로에게 남은 용건은 다 끝났다는 듯 먼저 몸을 돌렸다.
“잠깐.”
하지만 한 걸음을 미처 내딛기도 전 손목이 붙잡히고 말았다. 동시에 머리카락에 덮인 가느다란 목덜미로 불현듯 그의 손이 파고들었다.
“갑자기 무슨···!”
밀폐된 사무실을 틈타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싶어, 다경이 깜짝 놀라 가까워진 그를 밀어낸 순간이었다.
“여기 보여.”
목덜미를 감아 당길 줄 알았던 손이 그대로 쇄골로 내려와 그녀의 블라우스 사이를 가리켰다.
“내가 지난 주말에 남긴 거.”
“···!”
다경이 당황한 낯으로 부리나케 그가 눈짓한 곳을 살폈다.
맙소사. 저도 모르는 사이 풀어져 있던 블라우스의 윗단추 덕에, 그가 며칠 전 새겼던 흔적이 고스란히 보이고 있었다.
“···못살아, 정말.”
다경이 빨개진 얼굴로 서둘러 단추로 손을 옮겼다. 더운 손이 당황하는 바람에 허둥대는 작은 손을 잡아 끌어 내리곤 대신 그녀의 단추를 채워주었다.
“긴장 풀어.”
절제된 저음을 타고 흘러나온 익숙한 숨결이 이마를 훑고 내려와 코끝을 두드린다.
“여기선 너한테 손 안 대.”
톡, 하고 잠긴 단추와 함께 시선이 마주쳤다.
“너보단···.”
비스듬히 입술 끝을 당긴 도하가 슬쩍 제 바지 앞섶을 눈짓하며 덧붙였다.
“내가 더 난처해질 테니까.”
동시에 다경의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단정한 슈트 위로 선명하게 도드라진 굴곡이 경험으로 알고 있는 야릇한 장면을 대번에 떠올리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