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너보단, 내가 더 난처해질 테니까.”
비스듬히 입술 끝을 당긴 도하가 슬쩍 제 아래쪽을 눈짓했다.
그 눈길을 따라 무심결에 시선을 옮기고만 얼굴이 이내 확 붉어졌다.
‘뭐, 뭐야, 저게···.’
눈 둘 곳을 찾지 못한 다경이 급히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정한 감색 슈트 위로 도드라진 두툼한 굴곡이 돌연 잊고 있던 감각을 일깨운 탓이다.
“그래도 좀 조심은 하자고. 다른 놈들이···.”
빈 곳 없이 채워진 단추에서 손을 뗀 그가 사뭇 가라앉은 어조로 덧붙였다.
“네 속살 보는 꼴까지 참을 자신은 없거든, 내가.”
경고하는 듯한 음성에 실린 선명한 소유욕이 다경의 가느다란 목을 선뜩하게 감쌌다.
고개를 들자,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다경에게서 완전히 손을 거두었다.
“어때, 이제 좀 안심이 됐어?”
그럴 리가.
다경이 순간 할 말을 잃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래를 저 지경으로 세우고선 안심이 되냐 묻는 것이야말로 그녀를 더욱 불안케 만드는 것이었다.
덕분에 안심되긴커녕, 도리어 경계심만 증폭된 다경이 빨개진 낯을 감추며 급히 몸을 돌렸다.
“···안심은 모르겠고 그럼 난, 그만 좀 가볼게.”
굳이 붙잡지 않은 도하가 도망치듯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웃었다.
귀 끝까지 잔뜩 빨개져선 붙잡힐세라 문밖으로 나서는 그 모습이 날짐승을 대면한 연약한 초식 동물 같았다.
이 정도 수작만으로도 저렇게나 수줍어하는 애인데, 그간 제게 보이는 그 반응들을 보고도 처음일 것이라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니.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물론 가장 어이가 없는 건, 고작 다경의 쇄골 아래 난 자국 하나로 이 지경이 돼버린 제 몸뚱어리였지만.
“하··· 제대로 꼴렸네.”
도하가 상황 파악 못 하고 단단하게 부푼 앞섶을 보며 골때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러니 저 순진한 애가 냅다 줄행랑부터 치지.
금토 이틀간 그렇게나 붙어 먹어놓고, 지칠 줄도 모르는 제 물건이 스스로조차 기가 찼다.
다경의 말마따나 대체 10년을 어떻게 고자로 살았던 건지 믿기지 않을 만큼 왕성한 성욕이었다.
덕분에 금요일 밤, 다경의 도발에 못 이겨 밤새도록 흘레붙어놓고도 다음 날 욕조에서 또 뱉은 말도 못 지키고 그 지경이 되고 말았던 거고.
아마도 저 자국 또한 그때 흥분에 못 이겨 남긴 자국일 터였다.
‘아흐, 무울··· 물이 들어갈까 봐···.’
‘하··· 물 들어갈 틈이 어디 있어. 내 게 이렇게 꽉 여길 채우고 있는데.’
‘흐응··· 자꾸 그렇게 빨지 마. 자국 남을 것 같··· 하.’
‘그러게 적당히 맛있어야지, 다경아. 자꾸 눈앞에서 아른대잖아, 네가. 도저히 안 빨곤 못 배기게.’
안심하고 기대라 해놓곤, 결국 스치는 살결에 서버린 제 것을 주체하지 못해 또 한 번 치렀던 욕조 안에서의 정사.
물에 젖어 반들거리는 게 자꾸 야하게 눈앞에 아른거리기에 못 참고 잘근잘근 씹어댔던 것이 연한 살결에 도장 같은 흔적들을 남긴 모양이다.
그래놓곤 하루 지나 보자마자 이 꼴을 하고 있고.
“양심도 없는 새끼.”
자조하듯 읊조린 그가 털썩 의자에 몸을 놓았다.
지금 이렇게 몸의 대화만 나눌 때가 아닌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자 도하는 문득 속이 답답해졌다.
몸과 표정으론 저토록 저가 좋아 죽겠다는 듯 굴면서도, 입으론 절대 말하지 않는 이유가 분명 있을 텐데···.
‘왜 또 울어?’
정신없이 제 품 안에서 흐트러져 신음하다가도, 어느 틈엔가 보면 흠뻑 젖어 있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냥··· 흐, 이상해서.’
처음엔 그저 흥분하면 보이는 모습인가 보다고 무심코 넘겼다가, 다시 되짚어 보니 말처럼 이상하기만 했던 반응들.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
‘다 이상해. 네가··· 너랑 하는 전부가.’
이상하다고.
좋다, 짜릿하다, 도 아닌 그저 이상하다고.
그 한 단어로 통칭되는 다경의 감정들이 도하는 갈수록 신경에 거슬렸다.
10년 전 제게 받아간 돈을 화대로 쳤다는 말부터 시작해, 제게 불리할 거짓말만 늘어놓는 것도 수상했다.
대체 넌 왜 그러고 있는 걸까.
내게 뭘 숨기고 싶은 걸까.
10년 전 그 밤.
‘허튼짓해줘, 도하야.’
절박한 얼굴로 내게 찾아왔던 너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
도하가 나직이 한숨을 뱉어내며 지끈대는 머리를 두 손으로 짚었다.
도무지 찾을 수 없는 퍼즐 조각 하나가 속을 다 태우는 것만 같았다.
이 까맣게 타들어 갈 것 같은 속을 해결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다경이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는 것.
그 진실이 혹 어떤 후폭풍을 몰고 온다 할지라도, 이젠 어쩔 수 없었다.
* * *
직원 개별 브리핑이 끝나고 오후에는 전체 회의가 소집되었다.
직원들에게서 나온 기획안을 비슷한 유형별로 유목화시켜 팀을 구성한 뒤, 이를 분임 별로 세부화하기 위한 자리였다.
“오, 진미애 아이디어 좋네? 유명 유튜버들 초청해서 클립 띄우면 완전 핫하긴 하겠다.”
“그래요? 전 윤 대리님 생각도 좋은데요? 삼차력 테스트! 뭔가 사람들의 의지를 불타오르게 하는 아이디어 아니에요?”
신임 팀장과 가졌던 첫 미팅 때의 살벌한 분위기와는 달리, 두 번째 미팅은 의외로 화기애애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팀원들끼리 모여 자유롭게 생각을 공유하고 보완해가면서 활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획일적이고 권위적으로 이루어지는 기획 회의가 아닌 허용적인 분위기가 오히려 팀원들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들을 유도해냈다.
“뭐, 어메리칸 방식도 아주 나쁘진 않네.”
첫 회의 때부터 은근 신임 팀장을 탐탁지 않아 했던 송 과장도 이번엔 괜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제가 말했잖아요. 우리 팀장님 능력자 같다고.”
미애가 이때다 싶어 말을 얹었다. 네가 그러는 게 더 싫은 거라며 송 과장이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렇게 웃고 떠들면서도 활발한 소통을 이어가길 한창. 팀장이 코치 중이던 분임에서 사적인 질문이 들려왔다.
“저 그런데요, 팀장님.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혹시 만나시는 분 있으세요?”
동시에 옹기종기 모여 의견을 공유하던 직원들의 눈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부러 그가 있는 쪽은 돌아보지도 않던 다경도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인기가 많은 팀장인 터라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여직원 중 하나가 던진 질문인 듯했다.
“아니, 주은영 쟨 무슨 저런 걸 회의 중에 물어보고 그런데?”
옆에 있던 송 과장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흘기며 소곤거렸다.
“그러게요. 저건 우리 공공재를 훼손하는 행위인데.”
“공공재?”
“좋은 건 어느 한쪽에서 독점하면 안 되는 거거든요. 그저 함께 공유하면서 지켜야지.”
미애가 모두가 누려야 할 권리를 침해받은 양 불쾌한 얼굴을 하곤 은영이 섞인 분임을 지켜보았다. 그 비장한 얼굴을 보곤 송 과장이 기가 찬 듯 코웃음을 뱉었다.
“아이고. 공공재는 개코나.”
“그래도 궁금하긴 하네요. 진짜 연애 중인 분이 있으려나?”
그렇게 모두가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은근슬쩍 그의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딱 한 명 다경만은 도무지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관계가 관계인지라, 저 질문에서 완벽하게 타인으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만나는 사이랄지, 연애랄지 하는 순수한 관계에 해당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과연 저 입에서 무슨 답이 나오려나. 아니, 오히려 왜 그런 사적인 걸 묻냐고 차갑게 자르려나. 근데 그게 뭐가 중요해서 필요 이상으로 골똘하게 고민하는 건데?’
답을 할 사람은 권도하인데, 심각해진 스스로가 어이없어서 불필요하게 뻗어가는 관심을 잘라내듯 앞에 놓인 자몽에이드로 손을 뻗은 찰나였다.
“만난다는 기준이 정확히 뭔진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여자는 있습니다.”
한참 간 말이 없는 것 같던 입에서 드디어 답이 흘러나왔다.
“한국에 오자마자 첫사랑하고 우연찮게 재회했거든요.”
큽―, 잘못 삼킨 에이드가 목구멍에 걸리며 입 밖으로 어지러운 잔기침이 쏟아졌다.
“어머, 왜 갑자기 뿜고 그래, 자기!”
“괜찮으세요, 대리님?”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사레에 들려 기침을 해대는 다경을 보곤 송 과장과 미애가 걱정스런 얼굴로 돌아보았다.
동시에 회의실 대각선 방향에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의 시선도 이리로 몰려왔다.
창피함에 무심코 옆을 돌아본 눈이 때마침 그녀에게 닿은 검은색 눈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
다른 의미로 창피해진 다경의 얼굴이 녹아내릴 듯 새빨개졌다.
벌떡.
“저, 저 수습하러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다경이 도망치듯 부리나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