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난 아마···.”
무방비하게 있던 뒷머리가 그대로 당겨지며, 이마에 불현듯 그의 입술이 맞붙었다.
“부산에 있는 내내 네 생각뿐일 것 같거든.”
잔잔하지만 진솔한 고백이 귓바퀴를 야릇하게 핥는다. 덥고 습한 숨결이 한여름의 미풍처럼 다경을 휩쓸었다.
발갛게 익은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시야를 차단한 넓고 단단한 어깨가 안기고 싶은 충동이 일 만큼 따스했다.
가벼운 접촉을 끝으로 입술을 뗀 그가 빙긋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쿵쿵, 빨라지는 심장 박동 소리가 둘뿐인 비상계단을 어지러울 만큼 휘돌았다.
나도, 라는 대답이 혀끝까지 기어 나온다.
차마 답하지 못한 다경이 지그시 입술을 깨문 찰나였다.
“어우, 뻐근하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다경이 깜짝 놀라 그에게서 떨어졌다.
“믹스 커피에 얼음 동동 띄워서 한 잔 어때요?”
“좋지이-. 아이스 믹스.”
순순히 그녀에게서 멀어진 그가 피식 바람 같은 실소를 뱉는다.
“우리도 나가서 같이 커피나 한잔할까?”
“마, 말도 안 되는 소릴.”
웃음기 어린 얼굴로 장난스레 건네는 말에 다경이 정색했다.
고작 이마 하나 닿았을 뿐인데 온몸이 핥아진 듯 귀끝까지 열이 올랐다.
“나 먼저 나갈게. 넌 좀 있다가 와.”
덴 것처럼 화끈대는 이마를 문지르며 다경이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서둘러 문고리를 잡았다가 미처 하지 못한 말이 떠올라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굳이 할 필욘 없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들을 대신해 에둘러 제 마음을 전해 줄 소심한 당부.
“···조심히 다녀와, 부산.”
그렇게 무뚝뚝한 인사를 끝으로, 다경이 먼저 비상구를 나섰다.
그녀가 사라지고 홀로 남은 도하의 입가로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가 저를 향한 마음을 반증하듯 붉게 발광할 때마다, 제 가슴에도 짙은 열꽃이 핀다.
어지간해선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짙고도 뜨거운 열꽃.
“하··· 일주일이 10년 같겠네.”
도하가 조금 전 다경의 이마에 닿았던 입술을 가만히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손가락 끄트머리에 심장이라도 달린 것 같다.
부산에 있는 내내 눈앞에 아른댈 다경을 생각하자, 그는 남은 일주일이 벌써부터 아득하게 느껴졌다.
* * *
“하··· 팀장님이 안 계시니까, 뭔가 사무실이 칙칙하다.”
마케팅 2팀의 복지인 권 팀장이 사무실을 비운 지 이틀째였다.
“그러게, 안구 정화 필터가 없어지니 모니터 블루라이트도 유독 따가운 것 같고.”
“저만 그런 거 아니죠? 전 이 나이에 벌써 노안이 와서 그런 줄.”
“어허어- 뭐, 권 팀장만 인물이야?”
텅 빈 팀장실을 내다보며 따분하다는 듯 떠드는 여직원들의 옆으로, 오늘따라 이마가 번쩍대는 오 차장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눈이 영 침침하다 싶거든 날 봐, 날. 후광이 비치다 못해 빛이 번쩍번쩍하잖아, 아주.”
“뭐, 오 차장님 이마가 눈이 확 뜨일 만큼 훤하시긴 하죠.”
“그르치이!”
분위기 메이커인 오유석 차장의 희생으로 지루하던 사무실 분위기가 대번에 화기애애해졌다.
그 틈에서 말없이 웃고 있던 다경이 지잉, 키보드 옆에서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들어올 때 양파 한 망만 사와.]
용건만 간단히 적힌 활자에서 이 순간의 바쁨이 잘 전달되는 엄마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알겠습니다, 정 사장님.]
다경이 장난스레 답을 누르곤 습관처럼 휴대폰 화면을 끄려던 찰나였다. 지잉- 한 차례 더 울린 진동과 함께 노란색 메시지창이 화면 위로 떠올랐다.
[하얏트 로비에서 바이어들 기다리는 중.]
[점심은?]
도하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이틀 전, 전무님과 함께 부산으로 출장을 떠난 그는 이렇듯 짬이 날 때마다 제게 연락을 취하곤 했다.
다경이 딱히 묻지도 않은 본인의 동선들을 공유하고 그러면서 은근슬쩍 그녀의 안위를 체크하는 메시지.
이전 같았으면 읽고도 그냥 넘겨버렸을 그녀였으나, 이젠 굳이 불필요한 날을 세우지 않았다.
사실, 도하가 이렇게 가끔 보내는 문자 메시지가 은근 기분 좋기도 했고.
[그냥 구내식당에서 먹었어.]
다경이 활자에서부터 무뚝뚝함이 느껴지는 투로 답장을 적어 보냈다.
너무 딱딱한가 싶어 ‘안 그래도 사무실에서 네 얘기 중이었어.’ 라고 썼다가, 괜히 왕자병만 부추기지 않을까 싶어 그냥 도로 지워버렸다.
그사이, 도하에게서 또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도 윤다경이랑 같이 밥 먹고 싶다.]
글자일 뿐인데도 마치 육성으로 들려오는 듯한 그의 메시지를 보며 다경이 가만히 숨을 삼켰다.
그렇게까지 가슴이 뛸 문장도 아닌데, 괜스레 심장이 반응했다.
‘다녀오면 먹자.’
그 답이 휴대폰을 쥔 채 멈춰있는 검지 끝까지 내려갔다. 하지만 차마 마음처럼 적지 못하고 투박한 인사말로 대화를 갈음했다.
[미팅 잘해.]
막 화면을 끈 휴대폰을 책상에 내려놓은 찰나, 송 과장이 빼꼼 파티션 너머로 그녀를 내다보며 물었다.
“뭘 보고 그렇게 웃고 있어, 자기?”
다경이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우리 몰래 뭐 재밌는 거라도 봤어?”
재밌는 거라도 본 듯이 웃고 있었다니.
저도 모르는 사이 도하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웃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뇨. 엄마한테서 문자가 들어와서.”
다경이 머쓱한 기분에 희미하게 얼굴을 붉히며 어색한 변명을 덧붙였다.
“그래? 흠···.”
송 과장의 눈이 미심쩍은 기색을 품은 채 가늘어졌다. 그러다 뭔가가 생각난 듯 책상을 툭 쳤다.
“아, 그러고 보니까 자기 엄마 무슨 식당 하신 댔지?”
예전에 대화를 나누다가, 흘려보내듯 엄마의 얘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저와 관련된 사적인 부분을 오픈하는 걸 극히 꺼렸으나, 같이 있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그쪽으로 흘러가 마지못해 뱉었던 답.
“···음, 네.”
망설임을 애써 감춘 채 대꾸하자 송 과장이 물었다.
“무슨 식당 하셔? 우리 회식 때 가서 한 번 갈아드리자.”
“오. 윤 대리님 어머니께서 식당을 하세요?”
뒷자리에 있던 미애도 같이 눈을 반짝인다.
회식 때 가서 갈아주자니.
“아니에요.”
다경이 당황하여 손사래를 쳤다.
“워낙 작고 허름해서 우리 직원들 들어가면 미어터져요.”
“음, 그래? 그럼 우리끼리라도 한번 가면 좋지. 나랑 미애랑 뭐 은영이랑 몇 명만.”
“맞아요~. 친한 몇몇끼리 가서 먹고 오면 되죠.”
좋은 뜻으로 말하는 동료들에게 도저히 단칼에 무 베듯 안 된다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난처한 듯 한숨을 내쉰 다경이 주저하는 투로 조심스레 답했다.
“상황 한 번 보구요.”
아마도 그런 상황은 어지간해선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이런 말이 오갔던 것조차 잊혀질 테니까.
지잉-, 대화를 마치고 다시금 모니터로 눈을 돌리자 놓여있던 휴대폰이 또 한 번 잘게 몸을 떨었다.
미팅 잘하라는 무뚝뚝한 인사를 끝으로 마쳤던 메시지 창에, 도하의 답이 도착해 있었다.
[출장 끝나고 복귀하면 같이 밥 먹자.]
휴대폰을 쥔 가느다란 손끝에 미세하게 힘이 실렸다.
조금 전, 그의 메시지에 대한 답으로 적을까 말까 고민했던 제 마음을 마치 그대로 따라 적은 듯한 메시지였다.
다녀오면 같이 먹자고.
마음은 흘러넘치고도 남는데 차마 뱉어내지 못했던 진심이,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전해진 모양이다.
어쩐지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눈동자를 조용히 감았다 뜨며 다경이 천천히 메시지 창에 답을 적었다.
[그래.]
더 예쁜 말이 있을 텐데, 더 좋아할 말이 있을 텐데. 차마 다 적지 못하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다경은 손안에 꾹 움켜쥔 휴대폰을 가만히 제 가슴 앞으로 가져다 댔다.
쿵쿵, 약동하는 심장이 도무지 가라앉질 않는다.
주제넘은 줄 알면서도 접지 못했던 10년 전의 그 마음처럼.
* * *
자신이 너무 보고 싶어 너도 모르게 발길이 닿을지 혹시 아느냐고 했던 그의 말은, 어떤 점에선 명중했다.
“누가 권 팀장 책상에 이것 좀 올려놓고 와.”
차마 그의 집까진 못 찾아간 마음이 반응하듯, 때아닌 부장의 말에 몸이 벌떡 일으켜졌다.
“제가 할게요, 부장님.”
다경이 두툼한 서류철을 들고 굳게 닫힌 팀장실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 그가 없음에도 남아 있는 그 특유의 체취가 콧속을 희미하게 파고들었다.
“며칠 새 쌓인 먼지 좀 봐.”
주인 없는 자리는 이래서 티가 난다고.
고작 사흘 비었을 뿐인데 책상 위엔 희미한 먼지들이 쌓여 있었다.
그대로 둔 채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다경은 티슈를 꺼내 들어 그의 책상 위를 닦았다.
바쁘게 간 출장이라 미처 정리하지 못해 흐트러져 있는 용품들도 마저 정리해놓곤 뿌듯한 얼굴로 그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금요일쯤 다시 들어와서 치워주면 되겠지.
그땐 사람들 몰래 디퓨저 하나 들고 와서 슬쩍 책상 위에 놓아둘까.
너무 삭막해 보이지 않게 작은 화분 하나 가져다 놓는 것도 괜찮겠다.
“금요일엔 좀 일찍 출근해야겠네.”
월요일에 출근한 도하가 그의 책상을 보곤 놀랄 모습을 떠올리며 피식 웃고 있는데, 사무실 쪽에서 희미한 소음이 들려왔다.
‘뭐지?’
좀처럼 소란스러워질 일이 드문 사무실에 웬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다경이 대충 정리를 마치고 팀장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사무실 중간 회의 테이블 쪽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씨가 오니까 우리 마케팅2팀 분위기가 확 사네.”
누가 우리 팀으로 새로 온 건가?
“C계열사에서 그 정도 근무하셨으면, 마케팅 쪽으론 빠삭하시겠네요.”
“아뇨, 광고 쪽을 맡긴 했지만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한 마케팅이랑은 또 달라서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안쪽에서 오가는 대화를 듣곤, 다경이 슬쩍 송 과장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과장님.”
“어, 윤 대리.”
“뭐예요, 누가 왔어요?”
“아. C계열 쪽에서 우리 부서로 파견 나왔대. 내일부터 출근인데 오늘은 먼저 인사하러 왔다나 봐.”
C계열사에서 파견 나온 직원이라.
“그렇구나.”
그제야 궁금증이 풀린 다경이 사람들 틈 사이로 빼꼼 파견 나온 직원의 얼굴을 확인했다.
‘젊은 여직원인가 보네.’
목소리부터 이미 저와 비슷한 연령대인 게 느껴졌지만, 희미하게 눈에 들어오는 옆모습을 보곤 나이대를 가늠하고 있을 때.
“듣기론 여기 팀장님이 권도하 팀장님이시라고···.”
생각지도 못하게 익숙한 이름을 거론한 여자가 슬쩍 옆으로 몸을 틀었다.
동시에.
“어라? 주미 씨가 우리 권 팀장은 어떻게 알아?”
“···!”
파견 온 여직원의 얼굴을 확인한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저 얼굴은 설마.
“아, 권 팀장님이랑 제가 실은 고등학교 동창···.”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마주쳐버린 상대의 눈동자 역시 다경을 보자마자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와 함께 예리한 실처럼 가늘어진 눈매가 이내 비릿하게 휘어졌다.
“하, 참···.”
선뜩한 냉기가 다경의 등줄기를 타고 날카롭게 흐른다.
“인연이란 게 재밌네.”
김주미.
다경의 불운한 과거의 나머지 조각을 쥔 인물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