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8/98)

 57화.

 “뭣들 하시는 거예요!”

 더는 참지 못한 다경이 날아드는 손을 잡아채며 빠르게 제 엄마의 앞을 막아섰다.

 “하. 이사장 아들 꼬셨다는 그 딸년인가 보네.”

 붙잡힌 손을 야멸차게 떨궈낸 여자가 가소롭다는 듯 다경을 훑었다.

 다경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을 꾹 말아쥐며 그 냉혹한 눈길에 맞섰다.

 짙은 공포와 분노가 제 안에서 꿈틀댔지만, 애써 떨림을 감춘 채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저희 엄마가 뭘 잘못했는진 모르겠지만, 여기서 이렇게 행패 부리지들 마시고 돌아가세요. 계속 이러심, 아줌마들 전부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이런 어설픈 말이 단체로 찾아와 폭력을 일삼는 저 여자들에게 과연 먹힐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디 기댈 데 없는 두 모녀에게 공권력 말곤 들먹일 만한 협박거리가 없었다.

 “신고?”

 그때, 뒤에 있던 한 여자가 앞으로 나서며 하찮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신고해, 이년아. 우리가 이미 너네 엄마 서에다가 신고 넣고 오는 중이니까.”

 “···무슨.”

 “동네 순진한 남자들 꼬드겨서 돈 뜯어 간 죄, 멀쩡히 가정 꾸리고 사는 남자들하고 붙어먹어 가정 파탄시킨 죄! 사기죄, 간통죄. 죄라는 죄는 다 묶어서 단체로 같이 고소했어. 내일쯤 서에서 연락 올 거야. 와서 조사받으라고.”

 순간 다경의 머릿속이 까매졌다. 엄마를 신고했다니. 사기죄라니, 간통이라니.

 다방 일을 하며 온갖 구설수에 엮이고 험한 꼴을 본 게 한두 번도 아니었으나, 이런 식의 위협은 처음이었다.

 “그게 무슨.”

 “사기 친 적 없어.”

 뒤에 있던 엄마가 억울하다는 듯 앞으로 나서 외쳤다.

 “간통은 무슨 놈의 간통이야! 급해서 급전 좀 빌린 거야. 급한 불 끄면 갚을 돈이었고, 따로 차용증까지 썼다고. 술 몇 잔 따라주긴 했지만, 붙어먹은 적도 없는데 무슨 간통을···.”

 “훗. 그러시겠지. 어디 꽃뱀들이 제 입으로 꽃뱀이라고 하는 거 봤어? 어차피 조사하면 다 나올 거야. 네 그 가벼운 엉덩이로 언놈들이랑 붙어먹고 돈 받아 처먹었는지.”

 여자가 가소롭다는 듯 뇌까리며 엄마의 어깨를 툭툭 밀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알 길이 없어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러니까 엄마가 저 아줌마들의 남편들에게 돈을 뜯어냈다는 건데, 대체 엄마가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하루하루 빚 갚기도 벅찬 인생이긴 했지만, 업자들이 아닌 일반 손님들과는 돈 문제로 엮이거나 사달을 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건 그렇고, 그래서 엄마가 저 아줌마들에게 고소를 당했다고? 내일이면 소장이 접수돼서 조사받으러 가야 할 거라고?

 “너도 어린 게 벌써부터 네 엄마 닮아 사내놈들한테 기생하려 들지 말고 똑바로 정신 박고 살아, 기집애야.”

 사태 파악이 안 돼 멍한 얼굴로 서 있는 다경을 검지 끝으로 툭 밀치며 여자가 말했다.

 “네 엄마 이렇게 사는 거 보면서도 깨닫는 게 없어? 어?”

 “내 딸한테 손대지 마!”

 자신만으로도 모자라 가만히 있는 딸까지 건드는 손을 참다못해 엄마가 여자의 몸을 확 뒤로 밀쳐버렸다.

 “얘가 뭘 잘못했다고,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애한테까지 독설이야!”

 “잘못이 없긴 왜 없어!”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다경의 엄마를 밀친 여자가 삿대질을 해가며 외쳤다.

 “주제도 모르는 게 이사장 아들 꼬셔가지고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거 이 동네에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 그것도 네년이 시킨 거 아냐! 그렇게 해서 너랑 네 딸년 같이 팔자 고쳐보려고!”

 “···이사장 아들? 아까부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도하의 존재에 대해선 짐작조차 못 하던 엄마가 당황한 낯으로 다경을 돌아보았다.

 “말 가려서 하세요. 저랑 도하 그런 사이 아니에요.”

 여기서 굳이 도하를 언급하는 여자의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싸늘한 얼굴로 대꾸하자, 여자가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친다.

 “하. 그런 사이가 아냐?”

 “이 상황이랑 아무 관련 없는 애까지 끌어들여서 더러운 말 얹지 마세요. 저나 걔나, 아줌마한테 그런 말 들을 정도로 잘못한 거 없어요.”

 저로 인해 이렇듯 함부로 남들 입에 오르내릴 존재가 아니었다. 이렇게 될 게 두려워 선을 긋고 밀어냈지만, 그렇다고 잠자코 그 말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어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당돌한 것 좀 봐라.”

 “야, 어디 어린년이 두 눈을 시퍼렇게 치켜뜨고 어른한테 큰 소리야!”

 “어른도 어른다워야 대접해드리죠. 더 당돌한 모습 보고 싶으시거든 계속 더 해보시든가요.”

 “뭐야아? 이거 아주 버르장머리를 쌈 싸먹었네?”

 한 번만 더 도하에 대해 얘기하면 정말로 어른이고 뭐고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듯. 다경이 싸늘한 경고와 함께 제 엄마에게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내가 뭐랬어. 쟤 원래 버릇도 없고 양심도 없다니까?”

 그때, 돌아선 등 뒤에서 넘어온 익숙한 음성이 매섭게 발목을 잡아챘다. 붙박인 듯 멈춰선 발아래로 찬물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이 목소리는···.

 “애들 앞에서 처맞으면서도 너네 아빠 다방 단골인 거 쪽팔리지도 않냐고 되레 큰소리친 년 아냐, 쟤가.”

 키들거리는 음성을 따라 천천히 발길을 돌린 다경의 눈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맞다. 그랬댔지. 아주 꽃뱀 피 받은 애라 그런지 사고방식부터 특화됐어.”

 순식간에 온몸에서 핏기가 가시며 목덜미가 서늘하게 당겨왔다.

 “···김···주미?”

 “이제야 봤니?”

 저와 닮은 아줌마 옆으로 맞붙어서며, 주미가 우습다는 듯 한쪽 입매 끝을 비틀어 올린다.

 “아까부터 이 뒤에 서서 네 엄마 저 꼴 되는 거 보고 있었는데.”

 머리가 물에 잠기기라도 한 듯 먹먹했다.

 어딘가 악의적인 상황이라곤 생각했으나 김주미가 관련 있는 상황일 거라곤 감히 짐작조차 못 했다.

 언젠가, 돌아서는 제 등 뒤에 대고 주미가 악에 받쳐 외치던 소리가 귓가에서 먹먹하게 울리는 느낌이었다.

 “설마, 너···.”

 “그러게 내가 뭐랬어.”

 피식 웃은 주미가 발갛게 물든 다경의 눈언저리를 검지 끝으로 슥― 쓸었다.

 “네 그 도도한 눈꾸녕에서 피눈물 나게 해준댔지?”

 “네가.”

 탁, 제 눈가를 훑는 경멸 어린 손을 다경이 매섭게 낚아챘다.

 “김주미 네가 꾸민 짓이야?”

 씹어뱉듯이 읊조리자 주미가 날카롭게 웃으며 붙잡힌 손을 잡아 뺐다.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꾸미냐? 다 네 업보지.”

 주미가 가소롭다는 듯이 뇌까렸다.

 “뭐?”

 “주제도 모르고 날뛴 네 업보.”

 이게 다 내 업보라니.

 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머릿속이 혼란했다. 서늘한 뱀이 발밑부터 칭칭 동여 감으며 몸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에, 다경은 할 말을 잃은 채 입술만 뻥긋거릴 뿐이었다.

 그때,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다방 문이 다시 열렸다.

 “문이 너무 헐겁네요.”

 동시에 안으로 들이친 싸늘한 한기가 그나마 남아 있던 훈기마저 씻은 듯 밀어내며 이 안을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만들었다.

 “여러 남자가 드나들어서 그런가.”

 청아하고 우아한 목소리가 시린 정적을 눌렀다.

 고급스러운 스틸레토 힐이 다방 문 앞부터 깔린 빨간색 카펫을 짓이기며 점차 가까워져 왔다.

 “···.”

 역광이 흐려지며 서서히 드러나는 얼굴에 다경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입술을 뻥긋댔다.

 저··· 사람은···.

 “오셨어요, 사모님.”

 방금 전까지 엄마와 저를 향해 날 선 욕설을 내뱉던 여자들의 머리가 한 사람 앞에서 일제히 숙어졌다.

 하지만 다경은 미동조차 못 한 채 눈앞에 선 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아주머니가 여기에···.

 당신이··· 여기엔 왜···.

 온화하게 웃지만 텅 비어 있는 눈동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서 있는 다경을 냉혹하게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다경이 겨우 입술을 열어 혀끝을 달싹였다.

 “아···”

 “헐거워진 문은 바꿨어야죠.”

 여자의 나직한 음성이 그녀를 부르려는 다경의 목소리를 차갑게 막아섰다.

 이윽고, 이지적인 입술을 매끄럽게 당겨 웃으며 여자가 말했다.

 “아님, 떠나든지. 안 그러니, 다경아?”

 태어나 유일하게, 저를 색안경을 끼지 않고 바라봐주었던 어른.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었던.

 도하의 어머니였다.

 * * *

 덜덜 떨리는 손이 좀처럼 잠재워지질 않았다.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욕설들이 머릿속을 깨트릴 것처럼 쥐어짰다.

 다경은 온갖 잡동사니가 방패막이처럼 둘러진 자료실에 틀어박혀 10년째 잊히지 않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눈물이 차오르고,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네 그 도도한 눈꾸녕에서 피눈물 나게 해준댔지?’

 가소로웠던 상대가 공포의 대상으로 바뀌고 말았던 날의 기억.

 ‘인연이라는 게 참 재밌네.’

 재밌는 인연이 아니었다. 악마의 농간 같은 악연이며, 벗어나지 못할 참혹한 굴레였다.

 그런데, 그런 상대를 여기에서 다시 만나다니.

 그것도 하필, 도하와 함께인 이때. 이 시점에서.

 “거기서 뭐해, 자기?”

 초조하게 손끝을 물며 두려움에 떨던 다경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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