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9/98)

 58화.

 “거기서 뭐해, 자기?”

 초조하게 손끝을 물며 두려움에 떨고 있던 다경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과장님.”

 “안 보인다 싶더니 어두운데 혼자 틀어박혀선.”

 자료실로 들어선 송 과장이 손을 뻗어 실내등을 켰다.

 뒤늦게 놀란 기색을 지운 다경이 자연스럽게 둘러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피곤해서 눈 좀 붙이고 있었어요. 사무실에서 대놓고 조는 건 좀 그래서.”

 “그치. 자료실이 사람들 눈 피해서 쉬기엔 딱이지.”

 그녀가 피식 웃으며 비품 바구니 앞으로 다가가 안을 뒤적였다.

 “뭐 찾으러 오신 거예요?”

 “사무용품도 좀 챙기고 자료도 하나 찾을게 있어서. 우리 잘나신 권 팀께서 출장 가시는 날까지 일 쥐여주고 가셨잖니.”

 “아···. 같이 찾아드려요?”

 “아냐. 별거 없어.”

 바구니에서 포스트잍과 스태플러 몇 개를 집어든 송 과장이 자료대 쪽으로 건너갔다.

 그냥 이제라도 조용히 먼저 자료실을 나설까.

 불편한 얼굴로 서서 떨리는 손을 맞잡고 있는데, 자료대를 들여다보던 그녀에게 질문이 건너왔다.

 “근데 김주미씨 말이야, 윤 대리 자기랑도 동창인 건가?”

 “네?”

 맞잡고 있던 손끝이 순간 어긋났다.

 “그렇잖아. 자기랑 권 팀장이랑 동창인데, 그 권 팀이랑 주미 씨도 동창이니까. 셋이 같이 같은 학교 나온 거 아냐?”

 얼마 전 저와 도하가 동창이라는 사실을 안 송 과장이 가벼이 묻는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다경은 괜스레 심장이 조여왔다.

 “아···, 맞아요. 고등학교 동창.”

 “신기하다. 대학교도 아니고 고등학교 동창들끼리 직장에서 이렇게 만나고.”

 “그러게요.”

 송 과장 말마따나 신기하다 여길 우연이었다.

 왜 하필 그 신기한 우연이 제게만 이렇게 연거푸 일어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신기하기만 할 뿐, 딱히 유쾌할 건 없는 재회인데.

 “친했어?”

 캐비넷 안에서 작년 보고서 하나를 꺼내들며 송 과장이 물었다.

 “눈치 보니까 별로 친했던 것 같진 않던데.”

 질문 끝에 덧붙인 웃음기 어린 첨언에 다경은 긴장하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역시 우리 과장님, 눈치 참 빠르셔.”

 “내가 원래 한 눈치 하잖아.”

 그녀가 찡긋 윙크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늘 처음 본 사람 상대로 할 소린 아니지만, 주민가 뭔가 영 인상이 좋아보이진 않더라. 오자마자 권 팀 들먹인 것도 그렇고. 우리 윤 대리는 첨 봤을 때부터 어딘지 정이 가는 인상이었는데 말이야. 엮여서 딱히 좋을 건 없겠어.”

 저에게서 뭔가 좋지 않은 낌새를 차리고 하는 말일 터였다. 하지만 그럴 거라는 걸 알면서도 다경은 그녀의 말들이 어쩐지 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한 그녀 나름의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눈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다경이 대꾸 없이 어색하게 웃고 있자, 송 과장이 조심스레 운을 뗐다.

 “자기 박일호랑 정리한 거지?”

 “네?”

 “아니. 뭔가 좀 그런 느낌이라···. 아냐?”

 박 과장님께서 뭔가를 말한 건 아니고, 분위기 상 추측한 내용인가 보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잠시 망설이던 다경이 조심스러운 어투로 대꾸했다.

 “정리라기보단, 그냥 솔직하게 말씀 드렸어요. 박 과장님께서도 이해해 주셨구요.”

 “역시 그랬구나.”

 송 과장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그녀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미안해. 자꾸 자긴 맘도 없는데 무리하게 훈수 두고 밀어붙여서.”

 “네?”

 “박일호가 워낙 사람이 진국이라, 나도 우리 윤 대리 예뻐하기도 해서 좋은 사람들끼리 만나면 참 좋겠다 싶어서 그랬던 거거든. 근데 다시 생각하니, 마음 없는 입장에선 그게 이래저래 부담이었겠더라.”

 그녀가 박 과장과 저와의 관계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어주려 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한편으로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곤 미처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불편했던 것도 어느 선에선 사실이었지만, 이렇듯 미안하다는 말까지 듣게 되자 다경은 당혹스럽고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아녜요. 과장님께서 사과하실 문제는 아니죠.”

 “왜 아냐. 내가 나서서 오지랖 넓게 푸시하는 바람에 자기도 박 과장도 적잖게 불편했을 텐데.”

 다경이 선뜻 아니라고 답하지 못하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저를 불편하게 하려 부린 오지랖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앞에서 한 말처럼 상사 이상으로 저를 아꼈기에 좋은 사람과 엮어주고 싶어 그랬다는 걸.

 다만, 그녀의 말처럼 서로의 관계가 진전되기도 전에 타인의 의도가 개입되다보니 난처했던 건 사실이었다.

 이미 끝난 상황이긴 하지만, 이제라도 그녀가 그 부분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주자 다경은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암튼 그렇게 됐다니 아쉽지만, 나도 앞으론 좀 더 조심할게. 자기한테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한테도 불편할 일 없게. 이 나이 먹고도 날로 새롭게 깨닫는 것들이 있다, 이렇게.”

 “마음 써주셔서 항상 감사드려요, 과장님.”

 “내가 맘 써준 게 뭐 있다고, 참.”

 다경의 인사에 송 과장이 머쓱한 얼굴로 어색하게 눈을 돌린다. 그러다 뭔가가 떠오른 듯 조심스레 다경을 불렀다.

 “그리고 자기야.”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왼쪽 팔을 문지르고 있던 다경의 눈이 다시금 정면으로 향했다.

 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듯한 그녀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송 과장이 이내 망설임을 뿌리치며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힘든 일 있음, 너무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주변 사람한테도 좀 털어놓고 그래.”

 잔잔한 미소를 띠던 다경의 얼굴에 옅은 동요가 스쳤다.

 내 마음의 어지러움을 주변인도 눈치 채고 있었던 건가.

 당황함을 지우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자, 송 과장이 그녀답지 않은 진지한 어투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근심이란 게 그렇더라. 혼자 짊어지려고 하면 자꾸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 몸이며 마음을 짓눌러. 그러다 감당 못 하게 되면 나가떨어지는 거고. 정 힘들 땐 차라리 주변 사람들한테 털어놓기라도 하면, 해결책까진 못 찾더라도 속은 후련하지 않겠니?”

 “···.”

 “그냥··· 아닐 수도 있는데. 요즘 자기, 내가 보기엔 좀 힘들어 보여서.”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감정을 숨기는 것에 익숙한 타입이었고, 그래서 주변인들이 이런 저를 눈치채고 마음 쓰고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그 정도로 과장님이 저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해야 맞는지도.

 사회에서의 인연은 그저 가벼이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왔으니까.

 그러기에 알지 못했다.

 나의 힘듦이, 나의 고뇌가, 내게 마음을 써주는 주변인에게 비슷한 값으로 근심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나 날 생각해주는 타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온정이라는 것을 받아본 일이 드문 터라, 거기까진 감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죄송해요. 신경 쓰이게 해드려서.”

 “아니, 뭘 또 죄송하대. 그냥 안타까워서 해본 말인데.”

 습관처럼 뱉은 사과에 송 과장이 도리어 멋쩍다는 듯 반응했다. 그러다 어설피 웃는 다경을 보곤 나직이 당부하듯 덧붙였다.

 “나 보기보다 입 무겁다, 윤다경. 그냥, 그렇다고.”

 “···.”

 “그럼 자료실에 있는 건 못 본 걸로 해줄 테니까 마저 쉬고 나와. 급한 일 있음 콜 때릴게.”

 “···네, 과장님.”

 문이 닫히고 자료실엔 다시 그녀 혼자만이 남겨졌다.

 빈 의자에 도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며 다경은 쉽사리 헤어나올 수 없는 고민 속에 다시금 침잠했다.

 대체 이 마음을, 이 이야기들을 어떻게 털어 놓아야 되는 걸까.

 홀로 감당하기엔 버겁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경은 도저히 쉽사리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 * *

 [퇴근했어?]

 살가운 대꾸는 아니더라도 요 며칠 문자를 보내면 늦게라도 답이 오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다경에게선 답장이 오질 않았다.

 “무슨 일 있나.”

 도하가 대꾸 없는 메시지 창을 들여다보며 손끝으로 툭툭 액정 위를 두드렸다.

 혹시 싶어 별일은 없는지 같은 과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기도 했지만, 별다른 전달 사항은 없었다.

 많이 바쁜가. 그도 아니면 또 때아닌 변덕이라도 끓은 건가.

 내가 얘랑 이럴 때가 아니지, 하고 마음이라도 다잡은 거야?

 “하필 이 시점에 출장은 와서.”

 막 분위기가 좋아지려던 차에 오게 된 출장이 생각할수록 못내 아쉬웠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명쾌한 관계 전환은 불가능했다.

 그러고 보니 삼촌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지.

 때마침 떠오른 생각과 함께 도하가 휴대폰을 들어 삼촌 정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가 가자 휴대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도하야.

 “별일 없어요, 삼촌?”

 ― 별일 있을 게 뭐 있냐. 매일 집 아니면 학교만 왔다 갔다 하는데.

 정운이 지루하다는 듯 늘어지는 하품 소리를 내며 전화 너머에서 대꾸했다.

 “별일이 있어야 할 텐데. 심심하지 말라고 따로 일감까지 드렸잖아, 내가.”

 ― 아.

 “지난번에 부탁한 건은 어떻게 됐어요?”

 단도직입적인 용건에 정운의 음성에 피곤함이 가셨다.

 ― 음··· 듣긴 들었는데 좀 더 확인해 볼 게 있어서 아직 알아보는 중이라. 확실해지면 말해줄게.

 “확인해 볼 게 뭔데?”

 무심코 던진 질문이었으나, 전화 너머에선 선뜻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 찰나의 침묵에서, 도하는 어딘지 불길한 망설임이 느껴졌다. 분명 어느 정도선까진 알아봤을 텐데, 왜 말을 안 하고 숨기는 건가.

 “삼촌, 혹시 나한테 뭐 숨기는 건 아니지?”

 ― 아니. 내가 너한테 숨기긴 뭘 숨기냐.

 미심쩍다는 듯 던진 물음에 정운이 펄쩍 뛰며 답했다. 그러곤 방금 전 보인 망설임의 이유라는 듯 뒤늦게 덧붙였다.

 ― 아직 확실한 게 아니라 조심하는 거야. 괜히 긁어 부스럼 내는 꼴 될까 봐.

 “판단은 내가 알아서 해요. 그러니까 삼촌은 알고 있는 그대로만 말하면 돼.”

 도하가 답지 않게 고압적인 어조로 정운을 향해 말했다. 전화 너머에서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던 그가 마지못해 입을 뗐다.

 ― 그게 10년 전 그 무렵, 다경이 모친이 당시에 사기죄로 고소를 당했었대.

 “고소?”

 ― 고소 당한 바로 다음 날 취하 돼서 서류상으론 남은 게 없는데,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어서 알아보는 중이야. 뒤에서··· 그 상황을 조장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고.

 “의심 가는 사람이 누군데?”

 ― 그건 아직 알아보는 중이야. 고소했다는 사람 중에 그 사람도 있더라고. 서림 미술관 큐레이터로 있었던 이정미인가. 너도 알지? 네 동창이었던 주미라는 애 모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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