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60/98)

 59화.

 ― 응. 너도 알지? 네 동창이었던 주미라는 애 모친.

 도하는 잠시 말을 멈춘 채 삼촌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존재를 떠올렸다.

 서림 미술관 큐레이터 이정미. 그리고 그녀의 딸 김주미라.

 미술관 큐레이터까진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주미는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인물이긴 했다.

 제 어머니가 서림 미술관에 근무한다는. 저는 관심도, 기억도 없는 이유로 그에게 치근거렸던 애였으니까.

 또한, 당시 학교에서 활개를 치고 다녔던 일진 여자애들 중 유독 다경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계집애기도 했고.

 그런데 그런 애가 그때의 일과 관련이 있다니.

 아니, 그 애의 엄마가?

 ― 일단 알아보는 중이니까 너무 조급해하진 말고 조금만 기다려봐.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삼촌에게서 전화를 마치는 음성이 들려왔다.

 ― 학생들 들어왔으니까 내가 한가할 때 다시 연락할게.

 “알겠어요.”

 묻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삼촌인 정운도 아직 정확한 사정까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기에 말을 아끼고 전화를 끊었다.

 그와 함께 조금 전 미처 이어가지 못했던 생각이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김주미. 서림 미술관 큐레이터인 엄마를 둔, 고등학교 동창인 동시에 다경과 시시때때로 부딪혔던 앙숙 같은 계집애.

 설마하니 10년 전, 그 일에 걔가 개입을 한 걸까?

 눈엣가시같이 여기던 윤다경을 그렇게 해서 동네에서 쫓아내려고?

 하지만 굳이 그 시점에 그럴 이유가 있었을까. 어차피 졸업하면 마주칠 일도 없는 사이인데, 하려면 더 신속하게 일을 처리했겠지.

 그보다도 당시 고작해야 20살 된 애가 여러 어른을 선동해 그런 일을 벌였다고 하기엔 좀···.

 “권 팀장.”

 어딘지 명쾌하지 않은 실마리를 쥐고 골몰하던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음성이 넘어왔다.

 상념을 깨며 귓가를 파고든 목소리의 주인은 숙부인 권형준 전무였다.

 “내가 좀 늦었지?”

 “아닙니다, 전무님.”

 떨쳐 지지 않는 고민을 애써 던져두며, 도하가 단정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행사장이 어디라고 했더라? 나이 먹으니 자꾸 깜박깜박하는군.”

 “그러실 수 있죠.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도하가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전무를 안내했다.

 그러면서도 해답을 찾지 못한 문제는 여전히 머리에 머물러 있었으나, 그는 심중에 이는 불안을 밀어둔 채 행사장을 향해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 * *

 아침부터 사무실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권 팀장이야 어렸을 때부터 인기 많았죠.”

 새로이 들인 사람 한 명이 몰고 온 변화였다.

 “오, 정말요?”

 “하긴. 그 외모 어디 안 가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한 주미는 딱 보기에도 있는 집 여식의 분위기를 풍겼다.

 그 나이대의 적당한 허영심을 가진 여직원들은 그런 주미의 겉모습을 보며 모두들 호감을 가졌다.

 거기에.

 “쉬는 시간마다 권도하 보러 온 애들 때문에 창이며 문이 다 막혀서, 빛 들 곳이 없었다니까요.”

 첫 출근 기념이라며 사 들고 온 다과와 함께 풀어놓는 사내 최고 이슈메이커에 대한 이야기는, 자칫 새 사람이라 소외될 수 있는 주미를 단숨에 사무실 중앙 자리로 올려놓았다.

 “근데 그 소문 사실이에요? 권 팀장님, 지역 유지 아드님이라던데?”

 여직원 하나가 주미의 너스레에 슬쩍 질문을 얹었다.

 “그냥 지역 유지 정도가 아니지 않아? 듣기론 무슨 재단 이사장이 부친이라던데.”

 다른 여직원도 궁금한 얼굴로 두 눈을 반짝였다. 그러자 주미가 싱긋 웃으며 대단한 정보를 풀 듯 말했다.

 “맞아요. 아버지는 서림재단 이사장, 어머니는 그 재단 소속 미술관 관장이세요. 아마, 다음번 총선 때 국회의원 출마하신다는 것 같던데.”

 “와, 진짜?”

 “네. 유력하시다고 들었어요. 그 집안이 원래 정재계 인사도 꽤 되거든요.”

 “대박. 국회의원이라니. 정말 소문대로 금수저였구나, 팀장님.”

 주미의 몇 마디에 그에 대한 사적인 정보가 무분별하게 풀렸다. 하지만 어느 한 명 그런 주미의 말에 제재를 가하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감탄하는 듯한 반응과 함께 여직원 하나가 입을 뗐다.

 “그나저나 진짜 김주미 씨 권 팀장님에 대해서 완전 빠삭하게 알고 있네요. 어쩜 이렇게 잘 알아요?”

 그 옆에서 언젠가의 기억을 떠올린 직원 한 명이 테이블을 탁 치며 말했다.

 “그러게. 아, 혹시 우리 팀장님이 전에 말한 사람이 김주미 씬가?”

 “뭐가?”

 “왜, 지난번 팀 회의 때 은영 씨가 만나는 사람 있냐니까 팀장님께서 그러셨잖아. 한국 와서 우연히 재회한 첫사랑이 있다고. 혹시 그게 김주미 씨 아녜요?”

 “어머, 진짜?”

 함께 있던 직원들이 혹시나 하는 눈초리로 주미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자 힐끔 등 뒤 책상을 넘어다 보던 주미가 이내 새침한 어조로 답했다.

 “아, 음··· 글쎄요. 얼마 전에 보긴 했는데, 별다른 내색은 없던데.”

 “웬일이야! 얼마 전에 봤으면 맞나 보다!”

 “어떡해. 우리 회사 여직원 여럿 울겠어요. 안 그래도 그 이야기 돈 후로 남몰래 권 팀장님 흠모하던 여직원들 완전 다 우울해하던데.”

 “에이···, 그렇다고 제가 도하 첫사랑이라는 건 아니구요.”

 “뭐가 아녜요. 이미 그림 나오는구만, 뭘.”

 “그런가요?”

 깔깔깔,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가 시끄러운 소음이 되어 사무실 안을 울렸다.

 그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각자의 책상에서 일을 하던 송 과장과 미애가 조용히 혀를 찼다.

 “왠지 역대급 푼수 하나 온 것 같다.”

 “그러게요. 다른 건 몰라도 김주미 씨가 권 팀장님 첫사랑은 아닐 것 같은데. 안 그래요, 윤 대리님?”

 “글쎄.”

 제게로 돌아온 미애의 질문에 다경이 관심 없다는 듯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송 과장과 미애가 파티션 너머를 내다보며 숙덕댔지만, 다경은 가벼운 맞장구조차 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속으론 도저히 못 들어주겠는 주미의 말들을 곱씹으며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김주미가 권도하의 첫사랑이라니.

 아닌 걸 뻔히 알 텐데 어쩜 저렇게 직원들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할 수 있는지. 보고 있을수록 황당하다.

 어차피 사실도 아닌 문제라 제가 발끈하여 나설 것도 없었지만, 다 아는 입장에서 잠자코 듣고 있기가 민망하긴 했다.

 ‘옆집 개 짖는 소리에 하나하나 신경 쓰지 말자.’

 불필요하게 뻗어 나가는 주의를 차단하곤, 다경이 다시금 일에 몰두하려던 찰나였다.

 “아, 저 RS그룹 관련 찌라시 하나 들은 거 있는데 그거 사실이에요?”

 “뭔데요?”

 “백화점 사업본부장이라는 분 어머니가 무슨··· 윤락가 출신이라던가? 그렇다면서요.”

 때마침 귀로 파고든 이야기와 함께 막 컴퓨터 마우스를 거머쥔 손이 순간 멈칫했다.

 “아, 그게 거기까지 소문이 퍼졌나 보네. 정확한 건 본인들만 알겠지만, 들리는 바로는 그렇더라구요.”

 “음, 그렇구나. 그럼 윤락가 출신이 유부남 재벌 꼬셔서 신분상승한 거네요?”

 “그렇다고 봐야죠?”

 “참. 어딜 가나 그런 부류는 있나 봐요. 저 학교 다닐 때도 있었는데, 동네 유부남들 꾀어내서 팔자 고쳐보려고 애쓴 아줌마.”

 막 컴퓨터 마우스를 거머쥔 손이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정말요?”

 “덕분에 여러 가정 파탄 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근데 결국 그 집도 끝이 좋진 않더라구요. 사기죄니 뭐니 잔뜩 고소 당하더니, 두 모녀가 몰래 밤에 도망갔던가.”

 누굴 겨냥하고 말하는 것인지 모를 수 없는 말들이었다. 핏기가 가신 얼굴이 파리해지고,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느낌에 다경이 마우스를 쥔 손끝에 소리 없이 힘을 주었다.

 “쯔쯧. 인생들을 왜 그렇게 사는지 몰라요.”

 “꼭 그렇게 편하게 살아보려는 족속들이 있죠.”

 주미의 말에 사람들이 하나둘 동조하는 반응을 보였다. 주미가 진저리를 치듯 팔뚝을 쓸며 말했다.

 “그러게요. 그래놓곤 지금은 언제 그렇게 살았냐는 듯 뻔뻔하게 우리들 틈에 끼어있을 걸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 거 있죠.”

 당장에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고 싶었다. 언제까지 옛 과거를 들먹이며 저를 괴롭힐 셈이냐고 붙잡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제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보이는 즉시, 김주미는 그것을 빌미로 저를 사람들이 씹고 뜯기 좋은 먹잇감으로 내던지려 들 테니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눈앞이 어지럽게 넘실거린다.

 다경은 어떻게 해도 차단되지 않는 두 귀를 대신해,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 * *

 점심시간.

 “잠깐 얘기 좀 하죠, 김주미 씨.”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경이 양치를 하고 나오는 주미를 붙잡았다.

 잠깐 얘기 좀 하자는, 다소 급작스러운 제안에 주미는 마치 이럴 것을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으며 순순히 다경을 따라나섰다.

 탁, 비상계단의 문이 닫히자 먼저 입을 연 것은 주미였다.

 “왜, 끝까지 모른 척할 줄 알았더니.”

 “너 이러는 의도가 뭐야?”

 예의를 갖추던 다경이 차가운 얼굴로 주미를 돌아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글쎄. 내가 왜 이러는 것 같아?”

 주미가 있는 대로 빈정거리며 되물었다.

 굳이 질문을 던지긴 했지만, 주미가 이러는 의도가 무엇인지 아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 옛날 끝내지 못했던 악연을 다시 끌어와, 그때와 다르지 않은 제 처지를 잔인하게 일깨워주려는 것일 테다.

 예나 지금이나 정말이지 한 끗도 달라진 것이 없는 계집애.

 “뭐야, 그 표정은?”

 마음 같아선 당장에 머리채라도 잡고 뒤흔들고 싶은 걸 꾹 참고 바라보자 주미가 빙글 웃으며 다경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꽤나 빡친 얼굴이네? 왜애? 내가 좀 전에 네 과거 얘기 들먹여서 화났어?”

 “다 끝난 일이야. 이미 청산한 과거고.”

 그러니까 너도 그만 주제넘게 떠들라는 듯, 다경이 음산한 어조로 대꾸했다.

 “뭐야. 그때처럼 큰소리치면서 당당하게 나올 줄 알았더니, 반응이 영 싱겁네.”

 “반응할 가치도 없는 말들이니까.”

 “씨발, 예나 지금이나 고고한 척은 쩔어요.”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친 주미가 상스럽게 지껄였다. 그런 주미를 보며 다경 역시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참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지. 더러운 주둥이 함부로 놀려대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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