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4/98)

 63화.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뇌가 용암이라도 뒤집어쓴 듯 철철 끓었다.

 언제부턴가 저들이 뭐라고 떠드는지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제 옆에서 위태롭게 파들거리는 다경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어떻게 감히.

 감히 누굴 상대로 저딴 소리를.

 “티, 팀장님···.”

 당황한 은영에게서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직전까지 신랄하게 떠들어대던 입이 뱉는 가증스런 호칭에, 그들을 겨누는 검은 눈이 한층 더 선뜩해졌다.

 다경과 종종 담소를 나누며 어울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 여직원이었다. 송 과장이나 미애처럼 어딜 가든 붙어다닐 정도는 아니나, 꽤나 살갑게 지내는 듯하던 관계.

 그래놓곤 사무실 중앙 자리에 서서 보란 듯이 험담을 지껄이다니. 대체 어디서 무슨 소릴 들었길래, 씹.

 그가 팀장이라는 직위 때문에 차마 뱉지 못한 욕설을 가까스로 목젖 아래로 삼켰다.

 “두 사람 다 즉시 팀장실로···.”

 “팀장님.”

 온갖 인내심을 끌어모아 말문을 연 순간, 등 뒤에서 뻗어온 가느다란 손이 다급히 그의 옷깃을 붙잡아 당겼다.

 “저, 죄송한데···.”

 분노에 들떠 있던 두 눈이 잠시 잊고 있던 존재에게로 뒤늦게 향했다.

 차마 앞을 바로 보지 못하는 갈색 눈에 물기가 그득했다.

 다경이 그의 재킷 끝자락을 꾹 쥔 채 힘겹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오늘은 연가를 좀 내야 할 것 같습니다.”

 “윤 대리.”

 “먼저 가볼게요. 죄송합니다.”

 붙잡을 틈 따윈 없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몸을 돌린 다경이 도망치듯 사무실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윤 대리?”

 뒤늦게 그의 등 뒤편에 선 인영을 알아챈 송 과장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대리님···. 어떡해.”

 옆에 있던 미애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다경의 뒷모습을 좇았다.

 “씹···.”

 결국 참다못해 욕설을 내뱉은 그가 서둘러 다경을 따라나섰다.

 “윤 대리! 윤다경!”

 사무실 안에서 다경에 대해 지껄이는 소릴 듣던 그때부터, 이미 그에게 남들의 시선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다경아! 윤다경!”

 아무리 불러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도망치는 다경의 팔을 그가 기민하게 낚아챘다. 출근 중이던 사람들의 눈이 의아함과 호기심을 가지고 둘에게로 따라붙었다.

 “진정해. 일단 진정하고.”

 “놔.”

 도하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다경을 보호하듯 몸으로 막아서자, 다경이 붙잡힌 팔을 야멸치게 떨궈냈다.

 “다경아.”

 “놔줘, 제발.”

 다경이 이번엔 좀 더 간곡한 목소리로 부탁하듯 말했다. 그러면서도 두 눈은 차마 그를 마주 보지 못하고 그를 피해 돌아서 있었다.

 그런 다경을 내려다보는 도하의 마음이 철철 끓었다.

 부산에 있는 내내 일렁이던 불안이 현실이 되어 그를 덮쳤다.

 대체 너에게, 내가 없는 며칠 사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도망치지 말고 가서 차분히 얘기하자.”

 도하가 한 손아귀에 들어오고도 남는 가느다란 손목을 꽉 붙잡으며 설득하듯 말했다.

 “내가 다 해결해 줄 테니까···.”

 “네가 어떻게 해결해줄 건데.”

 줄곧 그를 외면 중이던 갈색 눈이 흘러넘칠 것처럼 출렁이며 그를 향했다.

 “방금 그 말들을 듣고도 모르겠어?”

 절망으로 넘실대는 두 눈동자가 도하의 심장을 콱 찍어 누르는 것만 같았다.

 “네가 이러는 게, 날 더 비참하게 만드는 거야.”

 다른 사람에겐 다 보여도.

 “나한테 지저분한 구설수만 더 얹어줄 뿐이라고.”

 너에게만큼은 정말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본 다경이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옥죄어드는 손아귀에서 억척스레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다경아.”

 “갈게, 그만.”

 차갑게 선을 긋듯 몸을 돌린 그녀가 다시 빠르게 도하를 등지고 멀어졌다.

 제게 지저분한 구설수만 더 얹어줄 뿐이라는 그 말에 발목이 묶여 따라나서지 못한 그가 빈주먹만 허무하게 움켜쥐었다.

 힘이 바짝 실린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터질 것처럼 돋아났다.

 끓는 듯한 분노와 시린 안타까움이 지켜보기만 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스스로의 안에서, 거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대체 나 없는 며칠 동안 네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누가 감히 너에 대해 떠들었길래.

 아니, 내가 모르는 시간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널 그토록 힘들게 했길래.

 소리 없이 안으로 곪아 터져가는 다경은 모르고 흘러가는 시간만 믿고 있었던 스스로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한심했다.

 하지만 비참해지더라도, 다경은 제 옆에 있어야 했다. 그래야 구정물이건 뭐건 제가 대신 뒤집어써 줄 수 있을 테니.

 이대론 못 보내.

 더는 그녀 혼자 그 모든 걸 감당하게 둘 수 없다는 결론과 함께 도하가 멈춰있던 다리를 다시금 다경이 간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대론 안 된다. 또다시 그때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널 놓칠 순 없었다.

 네가 뭘 해줄 수 있느냐고 다경은 물었지만, 분명 있을 것이다.

 내가 윤다경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다···!”

 “하. 쟨 또 왜 저래? 아침부터.”

 막 승강기로 오른 다경을 보며 다급히 그녀를 부르려던 찰나, 비릿한 실소가 귓바퀴를 긁었다.

 “아주 비련의 여주인공 납셨네.”

 막 승강기에서 내린 여직원 하나가 뛰어들 듯 올라탄 다경을 보곤 대놓고 비웃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동시에 그 여직원에게 닿은 검은 눈이 예리한 칼처럼 가늘어졌다.

 분명 낯선데, 어딘지 낯익은 얼굴이 시선을 붙잡고 그의 심기를 거슬렸다.

 다경을 향해 지껄이는 비릿한 말투와 표정.

 ‘어디서 봤지, 저 얼굴을.’

 그때, 방금 전 사무실에서 들었던 주은영의 말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 왜 저한테 그러세요, 과장님은! 어제 김주미 씨가 그랬잖아요!

 ‘설마···.’

 혹시나 하며 의구심을 삼킨 도하가 제 옆을 무심코 스쳐 지나려는 팔을 서둘러 낚아챘다.

 “아! 갑자기 뭐예!”

 “뭐야, 너.”

 앙칼지게 그를 올려다보던 눈이 제 팔을 낚아챈 손의 주인을 알아보곤 즉시 말을 멈추었다.

 그와 함께 선뜩하게 가라앉은 눈이 찢어발길 것처럼 제 앞에 선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억양의 고저가 없이도 충분히 음산한 음성이 서늘하게 공기를 가른다.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그를 올려다보던 얼굴이 이내 어색하게 입가를 당긴다. 그러곤 싱긋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인사했다.

 “어? 오랜만이네, 권도하. 아니, 팀장님?”

 그가 알지 못하는 다경의 지난 10년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을 한 사람, 김주미였다.

 * * *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자마자 또 한참을, 목적지도 없이 정신없이 뛰었다.

 로비를 벗어남과 동시에 흘러내린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얼굴 전체를 적셨다.

 한여름에 비해 싸늘해진 바람이 뺨을 할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헉, 흑···.”

 턱 끝까지 차오른 거친 숨소리도, 조금 전 마주했던 경멸 어린 시선과 목소리를 떨쳐내 주진 못했다.

 사라지긴 커녕 더욱 더 선명해지는 비난과 의구심 어린 목소리가 날카롭게 심장 한 가운데를 그어낸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지금 사무실에서 뭣들 하는 겁니까!’

 제 이 비참한 상황을 두 눈과 귀로 모두 함께 보았던 도하의 모습도 같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초라한 제 앞을 막아서며 대신해 외치던 그의 고함. 끓는 화를 어쩌지 못해 부들부들 떨리던 주먹.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저를 지켜보려 단단한 등 뒤에 저를 숨기던 커다란 몸.

 분명 고마울 일이었으나, 고마운 것 이상으로 수치스럽고 비참했다.

 동료라 믿었던 사람들의 입에 신랄하게 오르내리는 저를 보며, 도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지.

 형용할 수 없는 참혹한 감정들이 흐느낌이 되어 입 밖으로 흩어졌다.

 “흡, 흐···.”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발이 목적지를 잃고 길바닥에 멈춰섰다.

 숨이 차도록 달렸으나 뜨거워지긴커녕 더욱더 차가워지기만 하는 심장이 얼음장처럼 아려온다.

 모르겠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어떻게 살아야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더는 모르겠다.

 결국 쓰러지듯 길 한복판에 주저 앉아버린 다경이 갈 곳을 잃은 아이처럼 엉엉 울고 말았다.

 * * *

 “오랜만에 본다, 우리.”

 잠깐 팀장실로 가서 이야기 좀 하자는 말을 끝으로 한 마디도 없는 서늘한 입술을 보다 못해, 주미가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보는 거지, 아마. 도하 너 유학 갔단 소식은 들었는데.”

 살가운 인사에도 불구하고 묵묵부답인 얼굴이 얼어붙을 만큼 싸늘하게 주미를 응시했다.

 주미는 괜스레 바짝 말라오는 목구멍 너머로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하필 그 상황에서 마주칠 건 뭐람.

 그래도 뭐, 없는 소릴 한 건 아니니까 별일이야 있겠냐고 생각하며 천연덕스럽게 말문을 연 찰나.

 “인상 좀 펴. 10년 만에 만난 동창을 뭐 그렇게 살벌한 눈으로···.”

 “너였냐?”

 줄곧 말이 없던 입매를 뚫고 발밑이 선뜩해질 만큼 싸늘한 물음이 돌아왔다.

 중요한 서술어는 다 빠져 있는데도 어쩐지 간담을 서늘케 하는 질문에 주미가 주저하듯 되물었다.

 “머, 뭐가?”

 “윤다경 사생활로 입방정 떤 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잘생기긴 정말 지독하게 잘생겼는데, 말투는 동네 양아치도 오금이 저릴 만큼 살벌했다.

 윤다경을 제외하곤 제대로 웃어주는 법 한 번 없었던 무표정한 얼굴을 간신히 올려다보며 주미가 남몰래 침음을 삼켰다.

 여기서 괜히 쫀 기색을 드러내봤자, 권도하에게 쓸데 없는 의심거리만 줄 뿐이었다.

 자고로 불리할 땐 뻔뻔함과 당당함이 답이라고 결론을 내린 주미가 자꾸만 굽어드는 허리를 부러 꼿꼿하게 폈다.

 “아, 그거 때문에 아침부터 쟤 뛰쳐 나간 거야? 웃기네. 굴러온 돌 취급하면서 뭔 말을 해도 꿈쩍도 안 할 것처럼 굴더니, 겨우 그거 몇 마디 했다고 저렇, 꺄아악!!”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떠들어대던 입에서 비명이 터진 건 그때였다.

 쾅―! 소리를 내며 터진 굉음과 함께 주미의 얼굴 옆으로 날아든 커다란 화분이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개소리 그만 지껄이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어느 틈에 거리를 좁혀든 도하가 겁에 질린 눈을 빤히 응시한 채 서늘하게 뇌까렸다.

 “그 상황 파악 못 하고 떠드는 주둥이 확 다 찢어버리기 전에.”

 회사 안이라 내심 방심하고 있던 주미가 공포에 휩싸인 눈으로 가열차게 말을 더듬었다.

 “뭐, 뭐야. 지,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피식- 시린 바람 같은 소리가 얼어붙은 공기를 가로질렀다.

 “네 귀엔 이게 그냥 협박으로 들리냐?”

 쌍꺼풀 없이 시원한 눈매를 나붓하게 휜 그가 슬쩍 몸을 낮추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난 진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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