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사내놈들 때문에 인생 망친 네 엄마 봐놓고, 하필 저런 독한 여편네 아들놈이랑 눈이 맞아, 맞길!”
조금 전, 도하의 엄마가 두고 간 돈 봉투를 도로 바닥에 홱 패대기치며 서럽게 울분을 터트렸다.
“못 먹는 감은, 옘병! 돈 좀 가진 게 무슨 유세라고!”
바닥에 떨어진 지폐들을 구겨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다경의 눈앞으로 그녀가 비릿하게 속삭이며 짓던 웃음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게, 아무리 배운 게 없어도 딸한텐 알려줬어야죠.’
‘남의 집 감이 좀 탐스럽기로서니 무턱대고 손을 뻗으면 되나.’
꽈득― 힘이 들어간 손아귀 안으로, 손톱이 박힐 듯 파고들었다. 눈물로 범벅돼 있던 눈이 시리게 가라앉고, 그 안에 악착같은 오기가 깃들었다.
감히 넘봐선 안 됐던 남의 집 감.
무턱대고 손을 뻗어선 안 됐던, 본인의 귀한 아들.
“나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동시에 다경이 바닥에 널브러진 지폐들을 주워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시간에 어딜 가려고?”
당황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는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방 안에 챙겨놓은 가방을 끄집어 들어 그 안에 지폐를 쑤셔 넣었다.
“뭐야, 너. 이거 들고 대체 어딜 가려는 건데!”
엄마가 부리나케 쫓아 나와 다경의 팔을 붙잡았다. 딸을 붙잡는 엄마의 얼굴에 불안함이 가득했다.
이전엔 대체 왜 알지 못했을까 후회스러울 만큼, 저를 향한 걱정과 불안이 가득 묻어나 있는 얼굴.
“다녀올 데가 있어서 그래.”
울컥 올라오는 감정들을 누르고, 제 팔에 닿은 젖은 손을 조심스레 물렸다.
“짐 싸놓고 있어, 엄마. 얼굴 보고 약도 좀 바르고. 금방 정리하고 올 테니까.”
눈물에 젖어 시린 손등을 가만히 쥐었다 편 뒤 희미한 웃음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다경아. 다경아!”
빠르게 돌아서는 등 뒤에서 엄마의 애타는 외침이 애처로이 따라붙었다.
그럼에도 다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눈물로 넘실대는 갈색 눈이 비장한 다짐을 품고 서늘히 가라앉았다.
* * *
“왜 이렇게 늦지.”
까만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저녁 하늘에 걱정 어린 입김이 부옇게 번져나갔다.
6시에 가까워지는 손목시계를 보며, 도하가 초조하게 손끝을 두드렸다.
역 앞에서 만나기로 한 게 5시 30분이었다.
곧 있으면 열차가 출발할 시각에 가까워지는데도 다경은 어찌된 게 감감무소식이었다.
혹시 엄마가 허락을 안 하셨나?
추측 가능한 상황들이 걱정되는 마음과 함께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오는 길에 또 머리채라도 잡힌 거 아니야?
역시 집 앞으로 가봐야 했는데···.
데리러 가겠다는 제 말에, 엄마가 저를 보면 경을 칠 거라는 다경의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이 역 앞으로 와 기다리게 된 것이 아무래도 영 마음에 걸렸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가볼까.
해돋이 여행은 불발된다 치더라도, 제 엄마에게 맞고 있을지도 모를 다경이 걱정돼 도하는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 집에서 끄집어 내오든가 해야지.
“씹··· 별일 없어야 하는데.”
미리 끊어놓은 정동진행 티켓을 바삭- 구겨 쥐며 도하가 급히 발길을 돌렸다.
막 택시 승강장으로 한 걸음을 내디딘 순간, 등 뒤에서 기다리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도하야.”
걱정으로 조여들던 가슴이 제 이름을 읊는 가느다란 음성을 듣곤 순간 탁 풀려버렸다.
다행이다.
때늦은 안도감이 가슴을 저릿하게 쓸어내렸다.
“하··· 아슬아슬했잖아. 허락 못 받은 줄 알···.”
초조함을 지우고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하던 도하의 안면이 이윽고 다른 의미로 싸늘히 굳어버리고 말았다.
“너, 얼굴이 왜···.”
뒤늦게 역 앞에 도착한 다경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여기까지 오기 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추운 날씨에 제대로 겉옷조차 갖춰 입지 않고 나온 몸과 퉁퉁 부은 눈, 발갛게 충혈된 눈동자가 덜컥 도하의 가슴을 끄집어내렸다.
“대체 너···.”
뭐라고 물으려다 도하가 나직이 욕설을 짓씹어 삼켰다.
서둘러 제 코트를 벗어 덜덜 떠는 몸에 확 둘렀다.
입김 번지는 시린 겨울날, 청바지에 단출한 니트 하나 입고 뛰쳐나온 여린 몸이 그의 커다란 코트 속으로 파묻히듯 둘러싸였다.
그럼에도 도무지 가실 줄 모르는 떨림이 다경의 어깨를 움켜쥔 손아귀를 타고 잘게 번졌다.
분명 점심 무렵 연락할 때만 해도 별말이 없었는데. 대체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너 꼴이 왜 이래? 무슨 일이야, 응?”
제 이름을 부른 이후로 아무 말이 없는 어깨를 부여잡으며, 도하가 채근하듯 물었다.
“여행 간다고 했다가 혼났어? 설마, 또 맞은 거야?”
“아냐, 그런 거.”
이 순간, 제가 짐작할 수 있는 가장 뻔한 가정을 입 밖으로 꺼내자 다경이 두 눈을 떨구며 부리나케 얼굴을 내저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라는 거야. 씹.
악문 입술을 뚫고 욕설이 터졌다. 들여다볼수록 선명히 보이는 다경의 눈물 자국에 머릿속이 자글자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옷을 뚫고 파고드는 한겨울의 시린 바람도 그의 열을 식혀주진 못했다. 하지만 다경은 제 두툼한 옷으로 감싸주어도 여전히 바들바들 떨기만 할 뿐이었다.
가까스로 화를 눌러 참은 도하가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다경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건, 여기서 이렇게 버틴다고 하여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디 들어가서 몸 좀 녹이자.”
도하가 초조한 손길로 다경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따뜻한 거라도 마시면···.”
“엄마 때문 아니야. 돈···.”
역 안에 있는 카페라도 데려갈까 싶어 당긴 순간. 줄곧 말이 없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돈 때문이야.”
희미하게 입술을 달싹인 다경의 눈이 텅 빈 유리알처럼 힘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돈 때문이라니?
분노와 의구심이 함께 뒤엉킨 눈으로 다경을 보고 있자, 그 순간 물기 머금은 연갈색 눈동자에서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집으로··· 사람들이 찾아왔어.”
조금 전, 제 눈앞에서 벌어졌던 상황들을 떠올리는 얼굴 위로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이 일렁였다.
“그 사람들이 다방도 다 뒤집어엎고, 엄마도 때렸어. 여럿이서 엄마 하날 붙잡고 바닥으로 패대기를 치고 가게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어.”
그리고 그 참혹한 광경의 배후엔 바로 권도하, 네 엄마가 있었다고.
차마 뱉지 못한 말을 혀끝으로 삼키며, 다경이 떨리는 손으로 도하의 옷깃을 파리해질 만큼 꾹 붙잡았다.
“무슨 소리야, 그게. 왜 갑자기 사람들이···.”
“돈 때문이야.”
그래. 이 모든 건, 돈 때문이었다.
“뭐?”
없이 산 저와 엄마의 죄.
타고난 가난으로 인해 선택의 여지가 없이 살아야 했던 삶과 그러고도 주제를 모르고 널 마음에 품었던, 미련한 나 때문이었다.
하지만.
“돈이 필요해서, 그래서 이렇게 된 거야.”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나와 내 엄마에게 해선 안 됐다.
“뭐가 얼마나 필요한 건데. 응?”
제 아들 앞에선 둘도 없는 천사 같은 엄마인 양 갖은 가증을 떨어놓고, 이런 식으로 우리 두 모녀의 가슴에 칼을 꽂아선 안 되는 거였다.
“울지만 말고 말을 해봐, 윤 다경!”
그러니, 나도 똑같이 갚아줄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줄까. 어떻게 해주면 돼, 다경아. 응?”
당신 아들 가슴 깊은 곳에. 독한 화농으로 남아, 당신이 두고두고 이날을 상기할 수밖에 없도록.
“여기선··· 얘기하기 싫어.”
아무리 당신에게 나와 내 엄마가 하찮은 존재였다 할지라도.
“다른 데로 가고 싶어. 사람들 눈 없는 곳으로.”
그렇게 여린 가슴에 대못을 박고,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갈기갈기 찢어 짓밟아선 안 됐던 거라고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도록.
“윤다경···.”
“부탁이야, 도하야.”
오늘 이날을 기억하고 곱씹으며 처절하게 아파하는 당신 아들을 보면서, 두고두고 오늘의 그 만행들을 후회할 수밖에 없도록.
“나 좀··· 어디로 데려가 줘, 제발.”
당신 아들의 마음 한 줌을 꽉 틀어쥔 채 사라져줄 것이다.
당신이 원했듯, 그렇게.
* * *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삐릭- 카드키를 가져다 대자마자 울리는 기계음이 오늘따라 날카롭게 귓속을 갈랐다.
잠금이 해지 된 낯선 문을 여는 손에 긴장과 망설임이 교차한다.
도하는 선뜻 잡아 내리지 못하는 문고리를 손에 쥔 채 심란한 얼굴로 제 등 뒤를 돌아보았다.
‘나 좀··· 어디로 데려가 줘, 제발.’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다는 다경의 간곡한 애원에 마지못해 선택한 장소였다.
그러면서도 도하는 제 등 뒤에 선 창백한 얼굴을 보는 내내 망설임과 심란함에 휩싸였다.
물론 이 방에 다경과 단둘이 들어선다 하여 꼭 무슨 일이 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제가 꼭 다경의 약한 틈을 타 몹쓸 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비칠까, 괜한 노파심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일지도.
1월 1일.
정동진 여행을 계획하면서, 드디어 성인이 된 기념으로 그간 미뤄왔던 욕심을 좀 채울 수 있으려나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둘이 그럴 분위기로 갔을 때의 가정과 바람일 뿐이었다.
눈물 바람인 다경을 안고 제 욕정을 채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도하는 이미 문까지 열어놓고서도 이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가 계속 망설여졌다.
차라리 어디 24시간 편의점에 눌러앉아 있는 편이 안전하려나, 하는 한심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안 들어가?”
그런 그의 망설임을 알아챈 듯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넘어왔다.
“나 추운데.”
다경이 창백한 얼굴로 바닥을 바라보며 말했다. 코트에 폭 감싸여 있는 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다.
아씨, 모르겠다.
“어, 그래.”
줄곧 고민하던 것도 잠시. 도하가 결국 문을 열고 룸 안으로 앞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