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네가 아무리 날 이기적인 놈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어, 이건.”
또다시 그때와 같은 미련을 반복한 채 후회와 죄책감 속에 매몰될 순 없었다. 아니, 무엇보다도 더는 너 혼자 이 모든 걸 감당하고 아파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입으로만 널 지켜주겠다 떠들어대던 그 어리고 한심한 놈은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없다.
“회사는···.”
굳건한 의지를 보이는 그의 말을 잠자코 들어주던 다경이 이내 조용히 입술을 뗐다.
“내일 당장 다시 나가도 괜찮아. 사람들 시선 좀 받으면 어때. 어차피 20년을 그러고 살았는데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
“남은 계산도, 네가 마저 하자 그러면 할 수 있어. 어차피 나도 좋아서 한 거였으니까. 핑곗거리는 대려면 많았는데, 그렇게라도 네 옆에 있고 싶어서 못이긴 척 따랐던 거거든. 내 못다 한 미련 때문에.”
조금 전, 아픈 그를 끌어안고 울던 그때 이미 다 들켜버린 마음이라 더는 숨길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야. 없던 일론 못 돌아가.”
순순히 제 마음을 토로하던 다경이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우리 사이엔 죄책감이 남아 있어. 너 나한테 미안하잖아. 그게 점점 더 네 안을 갉아먹고 아프게 만들 거야. 미안한 마음으로 그 사람 옆에 있는 게 얼마나 괴롭고 아픈 건지. 너랑 몇 번의 밤을 보내면서 뼈저리게 느꼈거든.”
재회의 순간, 도하의 그 억지에 가까운 제안을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였던 건 순전히 제 미련과 부채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열 번의 밤을 보내고 나면 내 못다 한 미련도, 널 향한 미안함도 조금씩 옅어질 것이라 여겼다.
아니, 그렇게 합리화를 반복했다. 하루하루 너와의 밤이 쌓일 때마다 뭔가 내가 생각했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 마음을 인지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듯, 끝을 보지 못해 남은 미련한 감정은 최소한의 이성마저 좀 먹고 점점 더 나를 참혹한 늪으로 내몰았다.
“아마 이젠 네가 그럴 거야.”
그 끔찍한 마음을 너마저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날 보면서도, 날 만지면서도, 날 안으면서도, 매일매일 죄책감에 시달릴 거야.”
10년 전 내게 있었던 일,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아픔들, 그 모든 것의 시작에 네가 있었다는 사실이··· 어쩌면 내가 느꼈던 것 이상의 고통으로 널 잠식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 그냥 좀 편해지자.”
그러지 않기 위해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죄책감 같은 거 그만 털어내고, 응?”
너와 내가 이제 그만 서로의 인생에서 빠져주는 것.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밖엔.
제발, 너까지 이 고통스러운 진창 속에 스스로를 처박으려 하지 말라고. 간곡한 눈으로 응시하자 도하가 물었다.
“안 보면, 안 만나면··· 그 죄책감에서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아?”
끝을 부탁하며 간절히 그를 올려다보던 눈이 잘게 흔들렸다.
“10년이 지나도 놓지 못했던 마음이, 그냥 그렇게 모른 척한다고 해서 사그라질 거라고 생각해?”
그가 씹어뱉듯 읊조리며 바늘 하나 박히지 않을 얼굴로 다경을 내려다보았다.
“죄책감? 당연히 느끼겠지. 널 붙잡고 매달리는 지금도, 감히 나 같은 놈이 너한테 이래도 되는 건지 초단위로 망설임이 스치는데.”
다경이 말하는 죄책감은 굳이 그녀를 만지지 않아도, 안지 않아도 이미 시시때때로 느끼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밀려드는 죄책감에 목구멍이 콱 조여올 정도였다.
하지만.
“근데, 그것보다 더 괴로운 게 뭔 줄 알아?”
그보다 그를 더 괴롭게 하는 것이 있었다.
“널 못 보는 거.”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이 있었다.
“너한테로 뻗어가는 내 마음을 잘라내고 숨기는 거.”
재회 이후, 저를 마주 보지 않는 다경에게 차마 나 좀 봐달라 애원하지 못하고 못된 말을 할 때마다 도하는 되려 제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느꼈다.
못난 자존심에 아직도 너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말은 차마 못 하고, 그 마음을 날 선 원망으로 뱉을 때마다 제 마음이 같이 생채기 나고 그어져 나갔다.
그런데 그 괴로운 짓을 또 반복하자고. 아니, 아예 이 마음을 죽이고 부정하고 살라고.
안 될 말이다. 그거야말로 저 스스로 제 목을 조여 죽으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주문이었다.
“우리 이제 그만 좀 솔직해지자, 다경아.”
도하가 힘없이 늘어진 가느다란 손을 꽉 움켜쥐며 간절하게 속삭였다.
“너 나 좋아하잖아. 10년 전 그때도, 날 너무 좋아해서 떠나기 전에 나 보러 왔던 거잖아. 지금은,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내가 다 알고 상처받는 게 싫어서 멀어지려는 거고.”
“도하야.”
줄곧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다경이 절박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몰라. 네 대답이 뭐건 간에, 난 그렇게 해석하기로 했어.”
도하는 그런 다경의 음성을 외면한 채 고집스럽게 제 할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널 향한 죄책감. 그깟 거 그냥 내 몸의 일부라 생각하고 평생 너한테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면 그뿐이야. 이미 10년 전부터 네 개가 되겠다고 자처했던 놈인데, 이참에 진짜 네 개처럼 살아보지, 뭐.”
생각지 못한 그의 말에 그를 마주 보는 갈색 눈이 걷잡을 수 없이 일렁였다.
모른 척 한다고 해서 사라질 죄책감이 아니라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걸 안고 평생 네 개가 되어 사는 삶을 택하겠노라고.
단호한 얼굴로 다짐하는 그를 보며 다경은 더는 그를 밀어낼 핑곗거리를 잃고 말았다.
“10년 전 그때 일도, 네가 두 번 다신 떠올리고 아파할 일 없게 내가 눈앞에서 다 치워버릴게.”
도하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며 말했다.
“잘못 끼운 단추도 얼룩진 옷도 그냥 집어 던져버리고, 깨끗하고 예쁜 새 옷으로 갈아입혀 줄게.”
다경이 제게 오는 길에 방해가 되는 것들이 있다면, 감히 그 걸음을 막을 수 없게 치워버리면 될 일이었다.
“못 믿겠으면 일단 지켜보고 결정해, 다경아.”
비록 10년 전엔 아무것도 모르고 너 혼자 그 모든 걸 감당하고 도망치게 만들었지만, 이젠 아니다.
“10년 전에 못 지켰던 그 약속, 이번엔 꼭 지킬 거야. 내가.”
처음 만난 그때보다도 훨씬 단단해진 얼굴이 비장한 각오를 드러낸 채 선뜩하게 빛났다.
* * *
“내리지 마. 혼자 갈 테니까.”
집까지 오는 내내 한 마디도 없던 다경이 싸늘히 말하며 택시에서 내렸다.
제 차로 직접 데려다주겠다는 걸 극구 반대하기에 같이 택시를 탔더니, 아픈 몸으로 자꾸 안 해도 될 무리를 한다며 탐탁지 않아 했다.
“조심히 들어가. 어머니껜 안 혼나게 잘 설명 드리고.”
“너나 좀 무리하지 마. 갈게.”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며 다경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가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멀어져가는 야멸친 등을 보며 도하는 낮게 웃음을 뱉었다.
“조금만 있다가 출발할게요, 기사님.”
아무래도 문 앞까지 바래다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도하는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느 쪽이 다경의 방인지 알 수 없어 보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왼편 바깥쪽 방에 불이 켜졌다.
저기가 윤다경 방인가 보네.
그렇게 계산을 하고서야 안도감을 느낀 도하가 뒤늦게 기사에게 말했다.
“가죠, 이제.”
한참을 다경의 집 앞에 멈춰 있던 차가 그제야 천천히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검게 내려앉은 어둠을 헤치고 차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도하는 다경의 방에 난 창이 점처럼 멀어지고서야 겨우 차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못 믿겠으면 일단 지켜보고 결정하라는 제 말에 다경은 끝까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부정하는 말도 더는 없었다.
그리고 도하는 그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일단은 제게 기회를 주겠다는 그녀 나름의 신호로.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겠지. 다경이 오는 길에 더는 그 어떤 방해요소도 남아 있지 않도록.
도하는 휴대폰을 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측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너 괜찮아?
“삼촌.”
받자마자 그의 안위부터 살피는 목소리의 주인은 오늘 낮, 제 애꿎은 원망의 대상이 되어주었던 삼촌 정운이었다.
― 너 손은 어쨌어? 치료는 받은 거야?
“응급실 다녀왔으니까 걱정 마.”
안심하라는 듯 뱉은 대꾸에 그제야 저쪽에서 안도의 한숨이 들려왔다.
다행이다, 소리와 한숨만 반복하는 삼촌을 향해 도하는 긴 망설임 끝에 사과의 말을 뱉었다.
“아까 그렇게 화내서 미안해, 삼촌.”
― ···.
“삼촌 잘못이 아닌 거 아는데도, 그 순간에 원망을 돌릴 사람이 삼촌뿐이더라고.”
물론 정말 원망해야 할 이는 따로 있었으나,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르는 당사자를 대신해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삼촌에게 애먼 화풀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 알아, 인마.
소리 없이 조카의 말을 들어주던 정운이 이내 가벼운 어조로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 만만한 게 죄지, 뭐. 어린 조카놈도 그렇게 열정적으로 사랑을 하는데, 나이 먹고 여태 솔로라 만만했지. 네놈한테.
엄중한 말로 훈계를 하기보다는 장난스럽게 받아치는 그 말에 굳어 있던 도하의 입매 또한 느슨하게 풀리고 말았다.
오랜 시간, 어쩌면 부모보다도 제 마음을 더 잘 알고 저의 의지가 되어주는 존재.
― 그나저나 정리는 잘 된 거야?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고마움을 곱씹고 있자, 삼촌이 물었다.
― 목소리 들으니까 그래도 상황이 아주 나쁜 것 같진 않은데.
“정리는 지금부터 해야지.”
도하가 단호히 답하며 정운에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삼촌한테 마지막으로 부탁이 하나 있어.”
― 뭔데, 또.
부탁이라는 단어와 함께 전화 너머에서 잠시 끊겼던 한숨이 다시 들려왔다.
― 마지막이 맞긴 하냐? 이젠 네 입에서 부탁의 ‘부’자만 나와도 아주 심장이 다 떨린다, 인마.
“진짜 마지막이야.”
정운의 너스레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도하가 곧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이번엔, 아마 삼촌도 듣고 나면 속이 뻥 뚫릴 부탁일 거고.”
― 호오, 내 속이? 뭔데 그래?
도하의 비장한 장담에 정운이 의아함과 호기심이 발동한 목소리로 물었다.
비좁은 골목길을 지나 화려한 네온사인에 휩싸인 차창 밖을 바라보는 눈이 선뜩하게 가라앉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렇담 쇼에는 쇼로 답을 해줘야지.
“일단 흥신소 그 친구분께 나 좀 직접 연결해 줘.”
간결히 용건을 읊은 늘씬한 입매가 가느스름하게 말려 올라갔다.
다경이 마음 편히 제게 올 수 있도록, 길을 닦아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