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오냐, 그래. 누가 미친년인지 어디 한 번 밑장 까봐? 엉?”
의미심장한 말을 끝으로, 직전까지 사정없이 머리채를 잡아 흔들던 손이 여자의 클러치백을 열어젖혔다.
저 정신 나간 아줌마가 까긴 뭘 까겠다는 거야?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든 순간, 주미의 눈앞으로 촥―! 웬 종이들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에구머니나!”
“세상에, 이게 다 뭐야···.”
직원들이 남사스럽다는 반응을 보이며 여기저기서 수군거렸다.
대체 뭐길래 저래?
주미는 등허리를 선득하게 훑어내리는 불길함과 함께 뒤늦게 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동시에 발갛게 열 올라 있던 낯이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이, 이게 다 뭐야? 이걸 왜 이 아줌마가···.
“이래도 내가 의부증이야? 이래도 내가 애먼 너 잡는 거니, 이 양심도 없는 년아!”
여자가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마지막 사진 한 장을 보란 듯이 주미의 얼굴을 향해 던져버렸다.
보형물 넣은 이마빡에 부딪혔다가 톡 떨어진 사진이 주미의 발치 끝에 나뒹굴었다.
말도 안 돼.
줄곧 뻔뻔하게 굴던 얼굴에 숨기지 못한 동요가 스쳤다.
여자가 주미의 면상으로 날린 사진 속에는 그녀가 한 중년 남성과 다정히 팔짱을 낀 채 모텔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끈한 대리석 바닥에 어지럽게 흩날려 있는 사진 중에는, 그녀가 바로 어제 재천과 마주 웃으며 D사의 신상백을 집어 드는 모습 또한 기막힌 각도로 담겨 있었다.
이, 이걸 다 어떻게. 설마 이 아줌마, 나한테 사람까지 붙였던 거야?
“야 이년아.”
전문가의 솜씨로 보이는 사진들을 보며 때늦은 멘붕을 겪던 머리가 투박한 손끝에 밀려 툭 뒤로 넘어갔다.
“너 어제도 내 남편 카드 들고 나가서 아주 신나게 긁었더라?”
다정히 백화점을 거니는 두 남녀의 사진을 힐 끝으로 지익 치워버리며 여자가 살벌하게 웃었다. 아씨, 일 났다. 주미가 움찔 뒷걸음질 치며 서툴게 중얼거렸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사모님. 제, 제가 언제 과장님 카드로···.”
“오호라, 이게 어제 산 그 7백만 원짜리 백인가 보구나, 어?”
시치미를 떼자마자 싸늘히 번쩍인 눈이 주미의 어깨에 걸린 D사 신상 백으로 옮겨갔다.
다짜고짜 뻗어 온 손이 주미의 백을 홱 낚아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조강지처도 못 매본 7백만 원짜리 명품이 어찌 생겼나 했더니, 때깔 한 번 좋네. 응?”
빼앗은 가방을 휙휙 돌려보던 눈이 이내 섬뜩한 빛으로 가라앉았다.
“번떡번떡하고 야무진 게, 몽둥이로 쓰면 아주 딱이겠어.”
모, 몽둥이라니!
“사, 사모님··· 지, 진정 좀 하시고.”
“진저엉?”
코웃음을 끝으로 눈이 확 뒤집힌 여자가 들고 있던 백의 핸들을 와득 움켜쥐었다.
“진정은 꽃뱀 짓에 맛 들인 네년이랑 꼴린 대로 갖다 박는 김재천이 그놈이 해야지! 이 양심도 없는 것들아! 오늘 아주 7백만 원짜리 몽둥이로 정신 번쩍나게 맞아봐라! 내가 두 번 다신 그 뻔뻔한 낯짝 못 들고 다니게 해줄게!!”
“꺄아아아악!!”
머리를 감싸쥐고 주저앉는 주미의 등짝으로 번쩍이는 D사의 신상백이 정신없이 날아들었다.
이동이 많은 점심시간. 로비를 잔뜩 메운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주미는 복날의 개 잡듯 사모님께 잡혀 맞았다.
“하, 한 번만 봐주세요, 사모님!!”
“한 번만 봐줘어? 칠백만 원어치 채우려면 한참 남았어, 이년아!!”
새로운 곳에서 새 출발하겠다던 단꿈을 깨는 프란체스카의 날카로운 욕설과 주미의 새된 비명. 그리고 7백만 원짜리 백이 만들어내는 찰진 몽둥이질 소리가 여기저기서 찰칵거리는 셔터 소리와 함께 한낮의 로비를 어지럽게 에워쌌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어설프기 짝이 없는 허접한 쇼에는 그를 상쇄시킬만한 임팩트 있고 화려한 쇼로.
누군가가 걸어올 길을 깔끔하게 처리한 얼굴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 * *
“또 오세요.”
점심 타임의 마지막 손님이 식당을 나섰다.
한차례 폭풍이 휘몰아치고 지나간 듯 정신없는 점심시간이 끝나자, 다경은 잠시 미뤄뒀던 고민이 다시금 머릿속에 되풀이되었다.
‘못 믿겠으면 일단 지켜보고 결정해, 다경아.’
단단하고도 간절한 그의 애원에 결국 차갑게 끊어내지 못하고 돌아와 버린 며칠 전이 떠올랐다.
테이블을 치우고 잠시 엉덩이를 붙인 다경의 입 밖으로 나지막한 한숨이 흘렀다.
일단 받아준 것도, 아닌 것도 아닌 채로 상황을 흘려보내고 말았지만, 상념이 찾아들자 여지없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10년 전에 못 지켰던 그 약속. 이번엔 꼭 지킬 거야, 내가.’
10년 전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며 그는 안타까워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영역이기에 그렇게 된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빈말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지켜보고 결정하라는 그 말이 다경에겐 어떤 때보다도 비장하게 다가왔다.
대체 뭘 어떻게 하려는 걸까.
10년이나 지난 일들을, 그리고 이미 다 엎질러져 버린 물들을 이제 와서 대체 뭘 어떻게 하려고.
심란한 얼굴로 숨을 돌리고 있을 때, 주방에서 나온 엄마에게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구구, 허리야.”
얼마 전 근처 공사판에 뚝배기를 나르다가 삐끗했다던 허리가 아직 성치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게 나 있을 때 병원에 좀 가시라니까.”
다경이 안채로 건너가 파스 몇 장을 꺼내오며 잔소리를 쏟아냈다.
“가봤자 침 맞고 지지는 것밖에 더하니? 어디 부러진 것도 아닌데 뭣하러 나가서 시간을 축내? 그럴 시간에 국밥 한 그릇이라도 더 팔지.”
“그래서 안 된다니까, 엄마는. 엄마처럼 몸 써서 일하는 사람들은 몸이 돈이에요. 이렇게 아구구 아구구 하고 버티다가 어느 순간 앓아눕는다고.”
다경이 볼멘소리를 쏟아내며 엄마의 앙상한 등판에 파스를 쫙 뜯어 붙였다.
10년 전 다방을 할 땐 겉모습을 가꾸는 건 물론이거니와 나름 몸도 애지중지 챙겼던 엄마인데, 그렇게 하곡을 떠나오고부턴 본인 몸이 무슨 무쇠라도 되는 양 함부로 다뤄댔다.
아직 빚을 갚으려면 한참이었지만, 그래도 고금리 대출 건은 다 정리했고 이제 남은 건 제 앞으로 받은 저금리 신용대출 정도였다.
어느 정도 긴장의 끈을 놓아도 되는데, 딸 앞으로 잡혀 있는 빚이 영 마음에 걸려 도무지 쉴 생각이 들지 않는 모양이다.
“오후에라도 잠깐 병원 좀 다녀와요. 막말로 그냥 삐끗한 거 아니고 어디 진짜 금이라도 간 거면 어쩌려구.”
“뭐야? 이 노무 지지배가. 엄마를 무슨 칠팔십 먹은 노인네로 보고 있어. 그거 좀 삐끗했다고 금이 가면 그게 뼈니? 가시지?”
“가시라고 해도 틀린 말도 아니네, 뭐. 말 나와서 하는 말인데 엄마 요즘 너무 말랐어.”
방금전 파스를 붙일 때 보았던 등뼈 도드라진 허리를 떠올리며 다경이 작게 툴툴댔다.
예전부터 마른 체형이긴 했지만, 그냥 날씬한 것과 고된 일 때문에 앙상하게 마른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네가 몰라서 그렇지, 이 엄마가 원래 통뼈에 강골이야.”
“아이구. 진짜 통뼈들 다 말라 죽었나 봐요.”
“아휴, 기지배가 왜 이렇게 잔소리야!”
연거푸 이어진 잔소리에 결국 듣다못한 엄마가 빽! 소리를 내질렀다.
“괜히 갑자기 휴가는 쓴다고 해선! 너 그냥 들어가서 쉬어! 옆에 앉아서 귀 아프게 하지 말고!”
“아. 알았어~. 그 아줌마 되게 앙칼지네, 참.”
그제야 다경은 잔소리를 멈추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며 엄마의 손에서 행주를 낚아챘다. 일이나 도울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들을 훔쳐냈다.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흘겨보던 엄마가 종일 서 있느라 뻐근한 종아리를 주물대며 물었다.
“그나저나 회사는 언제까지 쉬는 거야?”
오늘 아침까지 제가 쉬는 줄도 모르고 있던 엄마에게, 얼마간 휴가를 냈다고 대충 둘러댄 차였다.
“한 일주일쯤? 내키면 좀 더 쉴 수도 있고.”
“무슨 휴가가 그래? 정해놨음 딱 정해놓은 대로 쉬고 끝내야지?”
두루뭉술한 다경의 말에 엄마가 결국 미심쩍다는 투로 되물었다.
“회사도 안 다녀 보셨으면서 그걸 어떻게 아셔? 엄마가 몰라서 그렇지 원래 휴가가 그래요.”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뭐라 설명하기도 난처했다. 다경은 대충 구렁이 담 넘어가듯 질문을 넘기곤 흐트러진 의자들을 바르게 넣었다.
“진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무슨 일이 있을 게 뭐 있어.”
한 번 더 돌아온 찔러보는 말에, 다경이 천연스레 시치미를 뗐다.
“요것 봐라.”
그 천연덕스러운 반응이 외려 의심을 불러온 듯, 엄마가 다경의 앞으로 건너와 손에 잡힌 행주를 낚아챘다.
“왜 그래, 갑자기.”
“너 엄마가 매번 모르는 척해주니까, 진짜 하나도 모르는 것 같지?”
의심이 가득한 얼굴이 다경을 다그쳤다.
“무슨 일이야. 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입사하고부턴 휴가라곤 다 반납하고 살던 게 상의도 없이 쉬느냐고.”
이번에야말로 그냥 그렇게 넘어갈 생각 말라는 듯, 엄마가 엄한 얼굴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없어, 그런 거.”
엄마의 걱정되는 마음이야 알겠지만, 다경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아 또다시 답을 회피했다.
“아님, 그때 온 그 팀장이랑 무슨 일 있었어?”
엄마의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순간 감추지 못한 당혹감이 표정을 스쳤다.
“맞네, 그놈이랑 뭔 일 있었네.”
찰나의 반응을 놓치지 않은 엄마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테이블을 탁쳤다.
“그래서 팀장이란 놈이 일개 직원 집 앞까지 찾아온 거구나? 우리 딸이랑 뭐가 있어서?”
“아냐, 그런 거. 금요일에 말했잖아. 팀장님이 나한테 전달받을 게 있어서 잠깐 오신 거라고···.”
“잡아뗄 걸 잡아떼, 이노무 지지배야. 그 얼굴이 어딜 봐서 못 받은 일감 받으러 온 얼굴이야. 주인 찾아온 강아지 얼굴이지?”
엄마가 더는 시치미 뗄 생각 말라는 듯 가늘게 눈을 흘겼다.
“어머니, 소리 해가며 너랑 얘기 좀 해도 되냐고 묻더니 너 보자마자 꼬랑지 바로 내리던걸, 뭘.”
아주 잠깐, 제대로 된 대화조차 없이 마주쳤을 뿐인데도 엄마는 그 사이에 도하가 저를 바라보는 눈빛을 읽었던 모양이다.
“무슨 사이야? 그 팀장이 너 좋아한대? 아님 이미 사귀는데 네가 찼어?”
엄마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다경에게 물었다.
다행히 10년 전에도 도하의 얼굴을 본 적은 없는 엄마라 그가 누구인지까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집요해지는 질문에 다경은 문득 명치 쪽이 답답해져 왔다.
“사귀긴 뭘 사귀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
“왜애? 보기엔 얼굴도 잘생기고 허우대 좋아 보이던데. 우리 딸 눈엔 영 아니었나? 응?”
“아이, 그런 거 아니래두. 엄마.”
회사 일을 깊게 파고들지 않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애먼 쪽을 파고드는 엄마의 말에 난처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에.”
엄마의 장난스런 말투가 계속되던 순간, 점심시간이 지난 식당 문 쪽에서 불현듯 인기척이 전해졌다.
“어, 손님 오셨다!”
다경이 구세주라도 온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시간에?”
“이 시간이건 저 시간이건 손님이 오시면 일어나야죠. 이상한 소리 그만 하시고 빨리 주방이나 들어가세요, 정 사장님.”
자꾸 집요해지는 질문이 난처했는데 때마침 잘됐다 싶다. 버티려 드는 엄마를 주방으로 밀어넣은 다경이 부리나케 문 쪽으로 다가갔다.
“이 시간대에 웬 손님이래.”
때아닌 객의 방문에 의아해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다경이 환한 얼굴로 손님을 맞이한 순간이었다.
“어서 오세···.”
“맞게 찾아온 건지 걱정했는데.”
허름한 식당 문을 드리운 기다란 발을 옆으로 걷어내며, 한 여자가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