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맞게 찾아온 건지 걱정했는데.”
허름한 식당 문을 드리운 기다란 발을 옆으로 걷어내며, 한 여자가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무심코 손님을 반기던 눈에 후미진 골목 식당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런 원피스자락이 잡혔다.
누구···.
“오랜만이구나, 다경아.”
다정히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일순 선뜩하게 귓바퀴를 감싼다.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도무지 잊히지 않는 우아하고도 차분한 음성이 다경의 손발 끝을 굳게 만들었다.
이 목소린 설마···.
“그간 잘 지냈니?”
어지럽게 흔들리는 갈색 눈이 부리나케 정면을 향한 순간이었다. 누추한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의 얼굴이 시리게 눈동자를 파고들었다.
털썩, 순간 힘이 빠져 놓쳐버린 행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사람이 여긴 왜···.
두 눈으로 확인하기까지 수도 없이 아니기를 바랐던 목소리의 주인은 불행히도 도하의 모친이었다.
10년 전 그날 이후 얼마간, 매일같이 제 꿈속으로 찾아와 까만 밤을 악몽으로 물들였던 얼굴.
잘 지냈냐고, 감히 양심이 있다면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존재.
그런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여기엔 왜···. 대체 어떻게 여기 있는 걸 알고.
어느 순간 새하얗게 질려버린 안면 전체로 그녀를 향한 공포심이 번졌다.
하지만 누추한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의 여자는, 처음 두 모녀의 집으로 와 차분히 모든 걸 짓밟았던 그때처럼 한없이 우아하고 태연할 뿐이었다.
대체 여긴 왜 온 걸까.
혹시 도하와의 관계를 듣고 찾아 온 건가.
10년 전 그때처럼, 본인 아들 앞에서 사라지라고 엄포라도 놓기 위해서?
학습된 공포에 압도 당한 다경이 미동조차 못 하고 있던 때였다.
“딸, 손님 뭐 드신···.”
주문이 없는 홀을 향해 빼꼼 고개를 내밀던 엄마의 목소리가 마침표를 맺지 못하고 끝났다.
“어, 엄마···.”
“뭐야, 저 얼굴은?”
가릴 새도 없이 객의 얼굴을 알아차린 엄마에게서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당신이 여긴 왜 있어?”
홀 쪽을 내다본 엄마의 눈이 선뜩하게 빛났다.
심장이 둥둥 뛰고, 땅을 짚고 있는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순식간에 바뀌어버린 식당 안의 공기가 날카롭게 날을 세워 살갗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차디찬 주인의 반응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의 얼굴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차분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다경이 어머니도.”
대체 무슨 용건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 것인지, 속을 전혀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오랜만?”
그 인사를 듣자마자 기가 찬 듯 코웃음을 터트리는 엄마를 향해 여자가 말했다.
“괜찮으시면 잠시 안으로 들어가서 얘길 좀 했으면 하는데.”
“이 여편네가 미쳤나!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발을 들여!!”
이어진 여자의 말에 기어이 폭발해버린 엄마가 국자마저 내던지고 주방에서 뛰쳐 나왔다.
“엄마!!”
뒤늦게 정신이 난 다경이 부리나케 제 엄마의 앞을 막아섰다.
“왜 또 나타났어. 우리한테, 내 딸한테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나타났어!!”
“엄마, 진정 좀 해!”
“진정하긴 뭘 진정해, 기지배야!! 저 독한 여편네가 또 어떤 짓을 할 줄 알고!”
10년 전 그 일은 다경뿐만 아니라 엄마에게 또한 트라우마로 남은 일이었다.
말만 들어도 온몸이 떨릴 판에 예고도 없이 직접 대면까지 해버렸으니, 준비하지 못한 마음으로 두려움과 분노가 동시에 치미는 것은 당연했다.
“10년 전에 그렇게 쫓아놓고도 아직 더 뭐가 남았어? 아님, 쫓겨나서 어떤 꼴로 사는지 구경이라도 하러 온 거야?”
“엄마아!”
머리채라도 잡아 흔들 것 같은 손을 붙잡아 내리자, 엄마가 그런 다경을 홱 옆으로 밀쳤다. 그러곤 믿기 힘들 만큼 태연한 얼굴로 그 악다구니를 받아내는 여자 앞에 성큼 다가서 소리를 내질렀다.
“우리 두 모녀가 얼마나 아등바등 사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온 거냐고!”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줄곧 말이 없던 여자가 역시나 방금 전까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어조로 말을 뱉었다.
“할 말? 10년이나 지난 일 가지고 대체 무슨 할 말!”
애써 강한 척 굴지만, 여자에 대한 두려움을 숨기지 못한 엄마가 떨리는 손을 움켜쥔 채 제 딸 앞을 막아선 순간이었다.
“도하랑 같은 회사에 다닌다는 얘긴 전해 들었다.”
초점 없이 허공을 보는 듯하던 여자의 눈이 돌연 다경을 향해 움직였다.
무엇 때문에 자신이 이곳에 방문한 것인지를 알려주듯, 여자가 빤한 눈으로 다경과 시선을 맞추었다.
역시 용건은 그거였나.
여자가 이 안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떨리고 있던 손아귀가 꽉 조여들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둘이··· 이 여편네 아들이랑 다경이 너랑 같은 회사라니?”
날 세워 여자를 바라보던 엄마의 눈에 뒤늦은 의구심이 깃들었다.
“얘, 다경아.”
엄마가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옆을 돌아본 순간, 다경의 입술이 떨어졌다.
“네, 맞아요.”
다경은 흔들리는 두 눈을 애써 다잡은 채 비장한 얼굴로 여자의 앞에 섰다.
“저희 둘, 얼마 전에 회사에서 다시 만났어요. 도하가 저 다니는 회사로 발령 나면서.”
“다경이 너···.”
“하··· 인연이라는 게 참.”
당황한 눈으로 다경을 바라보는 엄마의 앞에서, 여자가 허탈한 실소를 터트렸다.
인연이라는 단어를 곱씹는 코랄색 입술이 씁쓸하게 뒤틀린다.
그러다 여자는, 이윽고 이어진 다경의 당돌한 물음에 이내 싸늘히 입술을 가라앉히고 말았다.
“그래서요?”
다경이 떨리는 혀끝을 내리누르며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말을 이었다.
“그러는 아주머니께선, 대체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여기까지 오신 건데요?”
뱉어내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오랜 시간 사무친 분노가 어렸다.
잘 다듬어진 여자의 정갈한 속눈썹 끝이 날카롭게 올라섰다.
“또 저더러 회사 관두고 나가라는 말씀이라도 하려고 오셨나요? 10년 전 하곡에서 쫓아내셨던 그때처럼, 협박이라도 하시려구요?”
그녀가 어떤 유의 사람인지 알고 있다. 이런, 세습된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들은 상대가 공포를 드러내고 동요할수록 더욱 얕잡아보고 악랄해진다.
그러니 저 또한 최대한 태연한 척 굴어야 했다.
그 옛날, 못 먹는 감을 운운하며 돈봉투를 내밀던 여자의 앞에서 아무 소리도 못 하고 덜덜 떨기만 하던 어린 소녀는 더 이상 이 자리에 없다는 듯이.
“아주머니께서 또 어떤 협박을 하시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그냥 그렇게 당해드리지 않을 거예요. 이미 들어서 알고 계시죠? 도하가 그날 일, 모두 알고 있다는 거.”
다경이 여자의 유일한 약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말없이 다경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여자가 이내 차게 웃으며 답했다.
“그래. 다 알고 있더구나. 너희 모녀가 10년 전 하곡을 떠났던 이유도, 왜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됐는지도.”
역시 그날 어머니와 대치하고 왔던 게 맞았던 모양이다.
여자의 순순한 답에, 며칠 전 어머니에 대해 말하며 처절하게 무너지던 도하의 얼굴이 문득 머릿속을 스쳤다.
네 어머니의 또 다른 모습을 대면하고, 넌 얼마나 아팠을까.
그와 함께 울컥 목구멍을 치받는 감정을 느끼며 다경이 부러 더 뻔뻔하다 싶을 만큼 당당하게 말했다.
“그럼 그것도 잘 아시겠네요. 저한테 또 무슨 짓을 하셨을 때, 그쪽 아드님께서 어떻게 나올지도.”
가늘게 떨려오는 손아귀를 꾹 말아쥐며, 다경이 악착같은 눈을 한 채 여자를 응시했다.
속을 알 수 없는 까만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미 모든 걸 아들에게 들켜버린 마당이라 제 이런 어설픈 협박이 통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쥐뿔도 없는 저와 엄마로선 이것밖에 무기가 없었다.
“그럼 그만 돌아가세요. 저도 엄마도, 더는 아주머니께 치졸한 협박을 들을 이유 없어요.”
떨치고 또 떨쳐도 완전히 숨겨지지 않는 공포에 돌아서는 몸이 가늘게 떨렸다.
여전히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당황하여 바라보는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그만 들어가자고.
다경이 소리 없이 그녀의 손을 지그시 잡아끈 순간이었다.
“10년 전 그날.”
악다구니를 쓰든지, 아니면 그냥 식당에서 나가든지 할 것이라 여겼던 입술에서 생각지 못한 물음이 튀어나왔다.
“우리 집 우체통에 구겨진 지폐 넣어놓고 간 게 혹시 너였니?”
10년 전 그날 일을 언급하는 여자의 말에 우뚝, 걸음이 멈추었다.
그 반응을 긍정의 답으로 받아들인 여자가 피식 웃으며 돌아서 있는 등을 향해 물었다.
“왜 그랬니? 그때 그 돈 들고 떠났으면, 아직까지 이렇게 고생하며 살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뭐라고? 이 정신 나간 여편네가!”
줄곧 잠자코 듣고 있던 엄마의 목소리가 확 높아졌다. 여자를 향해 튀어나가려는 엄마를 다경이 다급히 붙잡았다. 그러곤 허공을 담던 눈을 돌려 다시 여자를 바라보았다.
“제가 그 돈을 왜 받아야 하는데요?”
퍽 당돌한 반문에 여자의 입꼬리가 재밌다는 듯 말려올라갔다.
하지만 이어진 다경의 말에 여자는 더이상 그 표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만약 제가 그때 그 돈을 갖고 떠났다면, 좋은 건 제가 아니라 아주머니셨겠죠. 꽃뱀은 아니라더니 결국 돈 몇 푼 주니 챙겨 떠났다며, 도하에게 나중에라도 변명하기 좋으셨을 테니까.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다경이 여자가 저를 향해 지었던 웃음과 닮은 미소를 입가에 드리웠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나 제 엄마가 아주머니께 그 돈을 받을 이유는 없더라구요. 제가 도하를 좋아한 게 아주머니께 돈 받을 만큼 잘한 일은 아니잖아요? 물론.”
“···.”
“그런 식으로 살던 곳을 잃고 쫓겨날 만큼 몹쓸 짓도 아니었지만.”
그 말과 함께 다경은 희미하게 남아 있던 미소마저 싸늘히 입가에서 지워버렸다.
여자가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런 다경을 마주 보았다. 하지만 여자는 기가 차 하지도, 분노를 내비치지도 않았다.
다만,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뒤엉킨 눈을 한 채 말없이 바라만 볼 뿐.
그런 여자를 향해, 다경이 오랜 시간 품고 있던 제 안의 독을 꺼내 던졌다.
“뭣보다, 그냥 그렇게 아주머니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고 싶지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