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낮게 숙여진 정갈한 정수리가 보는 이의 눈을 시리게 파고들었다.
여자의 사과에 엄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대꾸 없는 엄마의 앞에서 한참을 그러고 있던 여자가 느릿하게 허리를 세웠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없겠지만 혹 나중에라도 마땅히 떠오르는 게 있거든 꼭 연락 주세요. 못난 사람···.”
“···.”
“숨 쉴 구멍 하나쯤 만들어 준다 생각하고.”
말을 마친 여자가 클러치에서 명함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오늘따라 창백하게 보이는 매끄러운 손이 조심스레 명함을 놓고 떨어졌다.
그런 뒤 여자는 잠시 허공을 보는 듯하던 눈을 돌려 다경에게로 향했다.
차마 미안하다 말하진 못한 채 죄책감이 가득 담긴 눈으로 짧게 다경을 응시했다가 곧 문 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만 가볼게요.”
쓸쓸한 가을바람 같은 인사를 끝으로 여자가 식당을 나섰다.
분노했던 것 이상으로 밀려드는 허탈함에 다경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10년을 괴롭혔던 환영이, 밤마다 찾아들었던 그 악몽이, 이렇게 허무하게 스러져버리다니.
그때, 한참을 미동 없이 서 있던 엄마가 돌연 테이블에 놓인 명함을 들고 여자의 뒤를 쫓아 나섰다.
대체 뭘 어쩌려고.
“엄마!”
놀란 다경이 서둘러 그런 엄마의 뒤를 쫓았다.
엄마가 막 골목에 주차된 차 앞으로 도착한 여자를 다급히 붙잡아 돌렸다. 그러곤 당황하는 여자의 손에 그녀가 놓고 간 명함을 억척스레 쥐여주었다.
“갖고 가요, 이거.”
“다경 엄마.”
“당신한테 손 벌릴 일 없어. 있더라도 그러고 싶지도 않고.”
단호한 엄마의 말에 여자가 그 명함을 받지도, 도로 주지도 못한 채 망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엄마는 그 눈을 똑바르게 직시한 채 여자에게 말했다.
“대신, 저 불쌍한 아이들 인연에 더는 관여치 말아요.”
혹시 또 무슨 소란이 이어질까 싶어 따라 나온 다경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아까 당신 입으로 그랬지. 부모 된 입장에서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자식 앞에서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명함을 쥐여준 채 여자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 마음 이해해.”
이해한다고, 뒤늦게 긍정한 화영은 저만치 걸음을 멈춘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딸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당신의 그 말처럼, 나도 내 딸한테 차마 인정하고 뱉지 못한 과오가 있어. 부모라는 이유로, 딸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하나뿐인 자식한테 저질렀던··· 부모로선 절대 해선 안 됐던 만행들.”
딸을 담아낸 엄마의 눈에 어느새 뿌옇게 눈물이 차올랐다.
후회와 죄책감이 한데 엉킨 눈물이 연한 눈동자 가득 담겨 위태롭게 넘실댔다.
생각지 못한 엄마의 고백을 듣고, 다경은 붙박인 듯 미동조차 하지 못한 채 그녀를 응시했다.
아프게 일렁이는 엄마의 시선이 아릿하게 심장 끝을 저며왔다.
“결국 그 일에 대해선 미안하단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난 하루하루 내 딸한테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어.”
흐르진 않지만, 흘러넘치고도 남을 만큼 차오른 눈물이 오랜 시간 엄마가 감내해야 했던 미안함을 대변했다.
“내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겪지 않아도 될 수모를 겪으며··· 겪지 않아도 될 아픔을 감내해야 했던 저 애한테.”
선택할 수 없었던 삶에 대한 비참함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면, 어리고 여린 너한테 누구 씬 줄도 모르는 걸 낳아주고 길러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라고 외쳤지만, 실은 알고 있었다.
부모인 나로 인해, 네 몫이 아닌 슬픔과 아픔까지 감당해야 했던 너야말로 누구보다 안쓰럽고 안타까운 인생이라는 것을.
“그러니 당신도 죄인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
어느덧 눈가를 축축하게 적신 눈물을 억척스레 문질러 닦으며, 화영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저 두 아이들 인연에서 전적으로 손 떼고 부모로서 할 도리만 하면서, 그렇게 살아. 그게 내게, 불쌍한 우리 자식들한테, 당신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야.”
그것밖엔 더는 바라는 것도, 당신이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다고.
화영이 힘없이 늘어진 손에 명함을 꽉 쥐여주며 새겨주듯 읊조렸다.
복잡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여자가 흘깃 눈을 돌려, 저만치 떨어져 울고 있는 다경을 보았다.
차마 곁으론 다가서지 못한 채, 다경이 제 엄마를 보며 숨죽인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미안해하지 않겠다며 비겁한 오기를 품던 가슴이 사르르 아려왔다.
난 참, 저 안타깝고 안쓰러운 아이에게··· 못되고 또 못난 어른이었구나.
“알겠어요, 그렇게 하죠.”
마지못해 명함을 손에 쥔 여자의 입가로 이내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근데 손을 떼고 말 거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어차피 아들한텐 내 의사나 의지 따윈 고려 대상이 아닐 테니까.”
아들에게 부정당한 순간, 저 둘의 인연은 이미 제 손을 떠난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도 저들의 안심을 위해 약속은 필요할 테니, 여자는 다시한 번 “알겠습니다.” 하고 굳게 답했다.
그러곤 여전히 숨죽여 울고 있는 다경에게서 눈을 떼 허공으로 떨구었다.
남의 자식 우는 모습에 이렇게나 심장이 저며올 줄이야.
어쩌면 멀찌감치 떨어져 조용히 울음을 삼키는 저 모습이 며칠 전, 눈물과 원망 대신 피를 뚝뚝 흘리던 아들과 겹쳐 보여서일지도.
“다경 엄마도 나도, 참··· 못난 엄마들이네요.”
자조 섞인 목소리가 씁쓸히 휘어진 입술을 뚫고 바람처럼 흩어졌다.
“물론 더 못난 건, 나지만.”
힘없이 덧붙인 뒷말 끝에 짧게 묵례를 하곤, 여자는 기사가 열어준 차 문 안으로 몸을 실었다.
엄마는 저만치 멀어지는 차를 보고서야 비로소 안심이 된 듯 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차마 아무 말도 못 하고 소리 없이 우는 다경을 꽉 품으로 끌어안았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고.
엄마가 우는 다경을 품에 안은 채, 오랜 시간 본인 안에 묻어두었던 죄책감을 몇 번이고 토해냈다.
다 컸음에도 부모 앞에선 여전히 고사리 같은 손이 엄마의 옷자락을 힘주어 움켜쥔다.
켜켜이 쌓여 있던 아픔이 낮게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조금씩 흩날려 사라졌다.
젖은 눈물을 훑고 지나가는 선선한 바람 끝도, 오늘은 어쩐지 그렇게 시리지만은 않았다.
* * *
월요일인 탓일까.
한차례 폭풍이 휘몰아치고 나간 식당은 지나치게 한산했다.
보통 이 시간쯤 되면 저녁 식사를 하려는 인부들이 한두 명씩 모습을 보이곤 했으나, 오늘은 그조차도 없이 조용했다.
덕분에 할 말 많은 두 모녀에겐 모처럼 만에 대화할 시간이 주어졌다.
“그놈이야?”
저녁 장사 준비를 마친 엄마가 옆으로 앉으며 대뜸 물었다.
“뭐가?”
“엊그제 찾아왔던 팀장이란 놈, 그놈이 아까 온 그 여편네 아들이냐고.”
나름 사과를 받았음에도, 아직 고운 말은 나가지 않는 듯 엄마가 다소 투박한 호칭을 붙여 도하에 대해 물었다.
역시 눈치챘구나.
하긴. 그냥 찾아온 것만으로도 이미 둘 사이에 뭔가가 있다고 의심했던 엄마인데, 더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응.”
민망한 마음에 짧게 답하자 엄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쯔쯧- 혀를 찼다.
“그러니까, 딱 보기에도 널 보는 눈이 주인 찾아온 강아지 같더라니.”
“왜 자꾸 멀쩡한 애를 강아지에 비유하고 그래. 걔가 어딜 봐서 강아지 같다고.”
“얼씨구. 그럼 뭐라고 할까, 그냥 아예 개새끼라고 할까?”
“아, 엄마아!!”
강아지에 비유하지 말랬더니 더 말도 안 되는 격한 대상을 갖다 붙이고 있다.
기함하며 소리를 내지르자 엄마가 좋다며 깔깔깔 웃기까지 했다.
아무튼 연세에 안 맞게 장난스럽고 짓궂은 건 알아줘야 했다.
‘아주 권도하랑 죽 맞으면 딱이겠어.’
못지않게 경악스러울 말만 골라 하는 또 다른 인물을 떠올리며, 다경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이제 그 개새끼랑은 어쩔 거야?”
“아, 엄마 진짜!”
“네가 생각해도 강아지가 더 낫지? 그 강아지랑은 앞으로 어쩔 건데?”
결국 그 호칭을 써먹으려 그런 무리수를 둔 듯, 엄마가 장난스런 목소리로 다경을 향해 물었다.
못 말린다, 정말.
새침하게 눈을 흘기던 다경이 이내 고뇌가 깊어진 얼굴로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글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오랜 시간 쥐고 있던 매듭이 어느 정돈 풀렸지만, 아직 확실한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
도하의 엄마도 손을 떼겠다고 약속한 터라 더는 10년 전과 같은 미래를 그리지 않아도 됐지만, 그렇다고 아무 고민 없이 도하를 받아들이기엔 명쾌하지 못한 부분들이 있었다.
일단 회사로 복귀했을 때 마주쳐야 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저뿐만 아니라 도하에게 미칠 여파까지도.
물론 도하는 그조차 별 상관없다며, 본인이 모두 감당할 것이라고 단언할 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도하의 입장일 뿐이다.
사람들의 저를 보는 시선이, 편견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둘은 여전히 편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기 힘들 터였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딸.”
미처 다 털어놓지 못한 일 때문에 말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상념 속으로, 엄마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한 번쯤은 이것저것 너무 재고 따지지 말고, 상대방을 좀 믿어 봐.”
엄마가 믿어보라는 상대가 혹시 도하인가?
무슨 뜻인지 명확히 다가오질 않아 의아한 표정을 짓자, 엄마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다정히 쓸어 넘겨주며 말했다.
“강아지, 아니 그 도하라는 녀석. 제 독한 엄마까지 저렇게 너한테 와서 사과하게 할 정도면 한 번쯤 믿어 봐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강단이랑 의지를 가진 녀석이면 어떻게든 너 지켜주지 않겠어?”
“···.”
“다른 무엇보다도, 널 잃는 게 제일 무서운 녀석이니까.”
뺨 위로 흩어진 머리칼을 귀 뒤로 꽂아준 엄마가 싱긋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다경은 잠시 대꾸 없이 그런 엄마를 바라보았다.
도하를 한번 믿어보라고.
입 밖으로 뱉지 않은 제 망설임을 엄마는 이미 알아차린 듯했지만, 그냥 그럴까? 하고 답하기엔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엄만··· 괜찮아?”
“뭐가?”
“도하 보면서, 속상하고 마음 아프지 않겠어?”
다경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도하의 어머니로부터 예상치 못한 사과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완전히 용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영영 용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모녀가 감당해야 했던 10년의 아픔은 그렇게 미안했다, 잘못했다 몇 마디로 치울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제겐 도하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 그리고 세월이 흘러도 가시지 않는 미련이 있었다. 이기심을 부린다면, 도하 엄마에 대한 미움은 일단 차치하고 그를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엄마는 아닐 것이다.
물론 조금 전 도하 엄마에게 둘의 인연에 관여치 말라 말하긴 했지만, 막상 도하를 보게 되면 불편한 마음부터 들지도 모를 일이니까.
“뭐, 밉겠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던 엄마가 곧 입술을 뗐다.
“저놈이 뭐 그렇게 잘났다고, 그 독한 여편네가 우리 이쁜 딸을 그렇게 쫓아냈나. 볼 때마다 화도 나겠지.”
그것이야말로 본인 안에 남아 있는 진짜 진심이라는 듯, 엄마가 순순히 그 감정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며 다경을 향해 어깨를 짧게 으쓱했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네가 좋다면, 그냥 두고 보는 수밖에.”
“엄마···.”
“어차피 선택은 다경이 네 몫이야.”
엄마가 그녀의 마음을 살피는 딸의 어깨를 지그시 붙잡으며 말했다.
“대신에 그 선택에 대한 뒷감당은 각자 상황에 맞게 하는 거고. 엄만 네 엄마로서 내가 감당해야 할 부분들을 감당해 나갈 거야. 더는 예전처럼 남 탓으로 돌릴 일 없으니까 안심해.”
아마도 엄마는 지난날. 자신의 불행을 딸인 제 탓으로 돌렸던 것을 떠올리며, 이젠 그럴 일 없으니 안심하라 이르는 것 같았다.
이미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된 일이고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저를 아낀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엄마의 안엔 그 지난 후회들이 묵은 짐처럼 박혀 도무지 빼낼 수가 없는 모양이다.
대꾸 없이 엄마를 바라만 보고 있자, 엄마가 다경이 품은 고민의 무게를 덜어주듯 말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10년 전 그 일은 도하 걔가 잘못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잖아. 걔도 어찌 보면 제 엄마로 인한 피해자인데.”
맞는 말이었다.
10년 전 그 일로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엄마와 저일지도 모르나, 아무것도 모른 채 버림받고 이제야 진실을 알게 된 도하 또한 못지않은 상처를 받은 피해자임은 분명했다.
“그러니까 엄만 신경 쓰지 마. 내 마음은 내가 알아서 잘 다독일 테니까.”
“알겠어, 엄마.”
“뭐 그렇게 미울 일이 있을까 싶다만, 그래도 가끔 화나면, 그놈이 남의 집 귀한 자식이건 뭐건 간에 이리로 와서 식당 바닥 좀 걸레로 밀어라! 테이블 좀 닦아라! 뚝배기 좀 날라라! 하면 되는 거고.”
마지막 순간까지 우스갯소리를 빼먹지 않은 엄마가 천연덕스런 얼굴로 너스레를 떨었다.
진지하게 듣고 있던 것도 잠시. 어쩌면 저런 발상이 가능하실까 싶어 다경은 그만 헛웃음이 터져버렸다.
권도하가 식당 바닥을 대걸레로 밀고 뚝배기를 나르는 모습이라니.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는다.
“행여나 진짜로 걔 부려먹을 생각은 마세요.”
“뭐야, 벌써 이 엄마 뒷전에 두고 남자 편 드는 거야?”
“그게 아니라아~.”
“요노무 지지배! 내가 너 때문에라도 오면 실컷 부려먹어야지!”
부려먹으면 된다, 안 된다. 모녀 간에 한창 실랑이가 이어지던 그때였다.
딸랑- 식당 문에 달려 있는 종이 흔들리며, 손님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계실까요.”
식당 손님이라 치기엔 예의 차린 음성과 함께 말쑥한 정장 차림의 기다란 다리가 시야를 파고들었다. 습관처럼 바지자락을 거슬러 올라간 눈이 이내 터질 듯 커졌다.
“어?”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익숙한 얼굴을 보곤 다경이 당황한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침 왔네, 뉘집 강아지.”
옆에 앉아 빼꼼 내다보던 엄마가 장난스레 말을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