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실은, 오늘 낮에 아주머니께서 식당으로 찾아오셨어.”
“누가···.”
다경의 말을 듣고, 누굴 말하는 건가 싶어 잠시 갸웃하던 얼굴이 곧 싸늘한 빛으로 굳어 내렸다.
“너···.”
“괜찮아.”
혹여 도하가 잠시라도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다경이 서둘러 뒷말을 덧붙였다.
“첨엔 좀 당황했는데 오신 김에 10년 전에 말씀 못 드린 얘기도 드렸고, 아주머니께 약속도 받았어.”
괜찮다는 그녀의 말에도 긴장과 경계를 지우지 못하던 얼굴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약속?”
“앞으로.”
잠시 숨을 삼킨 다경이 단단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 둘 인연에 대해 절대 관여치 않겠다는 약속.”
제 어머니에 대해 언급한 순간부터 차게 굳어 있던 얼굴이 그제야 희미하게나마 긴장을 풀었다.
그러곤 내색은 안 했지만 적잖게 마음을 졸였던 듯 길게 한숨을 몰아쉬며 답답하게 조여진 넥타이를 손끝으로 걸어 늘렸다.
“왜 어머닌 말도 없이···.”
“네가 두 번 다신 안 볼 것처럼 냉담하게 굴었다며. 온갖 무서운 말까지 다 하고.”
다경이 허공을 보고 있는 도하의 얼굴을 지그시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도하가 여전히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단호히 읊조렸다.
“앞으로도, 아직 뵐 생각은 없어.”
제 어머니의 약속을 들었지만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는 감정이 있는 듯, 냉담한 눈이 고집스레 밤거리를 바라보았다.
도하 어머니가 오늘 둘 앞에서 말했던 부모와 자식 간의 신뢰.
아마도 그 부분까진 제가 어찌 강요할 수 없는 영역일 테지.
저 또한 마음으로 그분을 모두 용서한 건 결코 아니니까.
“어쨌건, 오늘 오셔서 10년 전 그 일에 대해 사과도 하시고 너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들을 하시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다경이 오늘 그렇게, 도하의 어머니를 마주하고서야 깨달은 생각을 조곤조곤 그의 앞에 털어놓았다.
“만약 내가 그때 그런 식으로 오기 부리듯이 너와 밤을 보내지 않고, 그 밤 솔직하게 내 얘기를 털어놨더라면. 내 방패막이가 되어주겠다던 널 믿었더라면··· 우리의 지난 10년이 지금과는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아들이라는 존재 때문에 저와 엄마에게 그런 짓을 해놓고, 또 그 때문에 무너져내려 둘을 찾아온 그녀를 보며 다경은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때 그렇게 도하에게 모두 털어놨다 할지라도 저와 제 엄마가 받은 상처는 어쩔 수 없었을 테지만, 적어도 우리 둘이 이렇게 돌아돌아 다시 만날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때늦은 안타까움이.
“그래서 말이야, 도하야.”
그래서 이제는.
“이제라도 널 한번 믿어보려고.”
더는 주춤거리지 않고, 네 손을 잡아 보려 한다.
“왜, 예전에 네가 그랬잖아.”
다경이 지난 후회를 털어놓는 순간부터 다시 그녀를 바로 보기 시작한 도하의 손을 꽉 붙잡아 당겼다.
“나한테 튈 구정물까지 네가 다 막아주겠다고. 이번에야말로 널 믿고, 얼마나 잘 막는지 한 번 지켜볼까 하는데.”
그래도 되겠냐고, 저에 비해 한참은 큰 그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지그시 거머쥐며 해사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늘따라 유독 밝은 보름달.
그 달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듯 반짝이는 눈망울이 올곧게 도하를 직시했다.
저로선 거절할 이유도, 도리도 없는 제안을 하며 눈앞이 아찔해지도록 어여삐 웃는 다경의 손을 도하가 절대 놓을 수 없도록 꽉 붙잡았다.
“그래, 잘 생각했어. 어디 한 번 믿어 봐. 내가 원래 막는 거 하난 기똥차게 잘하니까.”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린 도하가 특유의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렇게 잘해?”
“잘하지, 그럼.”
다경이 싱긋 웃으며 그의 팔에 자연스레 팔짱을 끼자, 그 또한 자연스레 팔짱 낀 손을 깍지껴 잡으며 당당히 덧붙였다.
“오늘 봤다시피 김주미 같은 구정물도 잘 막고, 뭣보다 윤다경 네 아래 막는 건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일··· 윽!”
“으휴!”
뭘 그렇게 잘한다는 건지, 잠자코 듣고 있던 다경이 결국 팔짱 끼려 감고 있던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팍! 찔러버렸다.
“한 번을 그냥 못 넘어가지, 한 번을!”
“아, 왜! 틀린 말도 아닌데!”
제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도하가 잘났다는 듯 큰소리를 친다.
하필 이 상황에. 아무튼 무드라곤 없는 자식!
다경이 새침하게 눈을 흘기며 옆구리를 부여잡는 도하를 뒤로하곤 쌩하니 가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귀엽다는 듯 큭큭대던 도하가 몸을 바로 펴며 성큼 다경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아, 욕구불만이라서 그래. 부산 가기 전에 한 번 하고 그렇게 일 터지는 바람에 한 번을 못했잖아.”
그것이 방금 전 그 망측한 발언의 이유라는 듯 도하가 말했다.
“뭐래는 거야, 진짜.”
덕분에 그와 함께 했던 마지막이 밤이 떠올라버린 다경이 간질거리는 귀를 빠르게 문지르며 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아, 진짜 너무하네.”
다경의 냉정한 반응이 외려 서운하다는 듯, 도하가 매정히 걸어가는 등에 대고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밤마다 너랑 내 방 침대에서 뒹굴었던 기억 떠올리면서 아래 잡고 흔드는 내 외로움을 네가 알아?”
“아, 제발! 권도하아!”
미쳤나 봐, 진짜!
시도 때도 없이 발정하는 이 짐승은 당최 부끄러움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조용히 좀 해, 좀!”
결국 무시하고 가길 포기한 다경이 입만 열었다 하면 음담패설인 입술을 꽉 눌러 막았다.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누가 좀 들으면 어때.”
발칙하게 제 입술을 막은 작은 손을 붙잡아 확 끌어 내리며, 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어차피 이젠 넌 내 건데. 안 그래?”
믿어보겠다 말했던 주제에 어디 아니다 소리 하기만 해보라는 듯, 그가 위압적인 눈으로 다경을 바라보았다.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손아귀의 힘이 그가 제게 지닌 집념을 방증하듯 억세게 조여들었다.
언젠가.
‘좋아해. 나랑 사귀어, 윤다경.’
소유욕 짙은 늑대의 본성을 드러내며 오만하고 막무가내로 고백을 내뱉었던, 10년 전 그 여름처럼.
어쩌자고 이런 녀석에게 10년째 코가 꿰이고 말았을까.
“오케이.”
한숨과 같은 답을 마지못해 입 밖으로 읊자, 그가 그제야 한발 물러서듯 다경을 놓아주었다.
그러곤 이내 주인 눈치 살피는 강아지처럼 다경의 표정을 보며, 조심스레 저 나름의 절충안을 던졌다.
“그래도 나 오늘 나름대로 이쁜 짓 여럿 했는데, 마감하고 같이 영화나 한 편 보는 건 어때?”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한 모습이 볼수록 기가 찼다.
근데 그 모습조차 이젠 제 눈에도 제법 귀여워 보이니, 이쯤되면 저 또한 중증이지 싶다.
“안 피곤해?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다경이 슥, 다시 몸을 돌리며 새침하게 말했다.
“영화 하나 보는 게 뭐 얼마나 피곤하다고.”
거절의 뜻으로 알았는지 도하가 기운 빠진 얼굴로 뒤를 따르며 불퉁스레 중얼거렸다.
귀여워.
그런 도하를 돌아보며 남몰래 웃음을 삼킨 다경이 내숭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영화만 보면야 그렇겠지만, 다른 것도 하려면 그냥 일찍 집에 들어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
우뚝, 등 뒤를 따라붙던 걸음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돌아보자, 제가 이해한 뜻이 맞나 가늠하는 듯하던 얼굴이 이내 떠보듯 그녀를 향해 물었다.
“해도 돼?”
피식, 다경의 입가에 더는 숨기지 못한 웃음이 번졌다. 성큼 그와의 거리를 좁힌 다경이 답삭 그의 얼굴을 양손에 쥐곤 뒤꿈치를 올려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두 눈을 터질 듯 키운 채로 미동 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그를 향해 사랑스럽게 속삭였다.
“밤새도록 울려줘, 도하야.”
수줍고도 야릇한 고백이 달콤한 숨결과 함께 흩어졌다. 눈앞에 두고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듯, 그가 다소 멍한 얼굴로 다경을 향해 물었다.
“뭐야···. 나 지금 꿈꾸는 중인가?”
“아마도 아닐걸?”
다경의 발칙한 대꾸에 그의 입 밖으로 짧은 탄식이 터진다.
있는 그대로 마음을 내보이는 윤다경은 정말 날 미치게 만드는구나.
“하··· 이 환장하게 예쁜 게.”
동시에 그대로 다시 팔이 당겨지며 그가 깊숙이 입을 맞추었다. 순응하듯 그를 받아들이는 입술을 깊고 짙게 빨아들이며 뿌리칠 수 없이 단단하게 혀를 얽었다.
얼마 만에 취하는지 모를 달콤한 숨결이 감질나게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인내심이 한계를 치는 느낌에 겨우 입술을 떼어낸 도하가, 이 밤의 시작을 되새겨주듯 읊조렸다.
“각오해, 진짜 밤새도록 울려줄 테니까.”
각오할게, 하고 다경이 수줍게 답하며 푸흐흐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이 모든 게 꿈인가 싶어 가슴이 벅찬 그가 와락, 다경을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러곤 아까는 미처 하지 못했던 고백을 간절히 입 밖으로 내뱉었다.
“고마워, 다경아. 날 믿어줘서.”
사랑한다, 그 한 마디보다도 이 순간만큼은 더 깊게 가슴을 파고드는 그의 음성을 가슴에 새기며 다경도 마주 답했다.
“나도. 나도 고마워, 도하야.”
날 놓지 않아 줘서. 이렇게 다시 또 잡아줘서.
두 팔 벌려 힘껏 그를 안은 다경이 믿음직스러운 품 안에 저를 맡기며 폭 얼굴을 묻었다.
네가 있어서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고, 너의 것이기에 잡을 수 있는 손이었다.
오랜 시간 돌아와야 했던 길을 이제라도 함께 걸어 보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던 건 모두, 너와 나이기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걷다가 지치면 가끔 네 품에 안겨 쉬기도 하고, 너무 뒤처지면 네 등에 업혀 가기도 하고.
그래도 너무 힘들어서 울고 싶어질 때면, 믿음직스러운 네 품에 안겨서 목놓아 엉엉 울기도 하면서.
그렇게 걷고 또 걷다 보면 언젠가, 함께라서 더 행복한 내일에 둘이 같이 닿아 있겠지.
눈부신 달빛이 서로를 꼭 끌어안은 둘의 머리 위를 비춘다.
둘의 마음이 닿아 더 가득 찬, 만월의 밤이었다.
- 울어봐요, 윤대리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