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2)
그리워 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울어본들 바뀔 리 없는 과거임을 알면서도 매일매일이 후회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그때의 제 삶은 지옥인 동시에 악몽이었다.
도하가 없었던, 도하를 떠나와야 했던 지난 10년은 악몽과 지옥 말곤 마땅히 이를 정의 내릴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그래놓곤 10년 만에 재회한 널 상대로 모진 말과 거짓말을 지껄여야 했을 땐, 그 말들이 날선 부메랑처럼 내게로 돌아와 지난 10년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게 되려 제게 더 큰 상처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걸. 다경은 도하와 재회한 후 제 마음을 외면했던 그 시기에 뼈저리게 느꼈다.
“왜 울었어. 그렇게 갔으면 더 독하게 마음 먹고 잘 지냈어야지.”
도하가 어느새 또 젖어들기 시작하는 눈가를 매만지며 말했다.
다경이 저를 추억하지 않았다면 그건 그것대로 서운했을 테지만, 그렇다 하여 매일 저로 인한 죄책감에 울고 있길 바랐던 건 아니었다.
“널 그렇게 만든 게 바로 난데. 그럼 더 통쾌해하면서 살았어야지, 바보야.”
널 그렇게 만든 게 바로 나라고, 아픈 얼굴로 말하는 그를 보다 못해 다경이 폭 도하의 품으로 안겼다.
이런 널 내가 대체 어떻게 원망할 수 있겠어. 이런 널, 대체 어떻게 미워하니.
차마 뱉지 못한 말들을 눈물과 함께 삼키자, 그가 젖은 얼굴을 손끝으로 들어 눈물을 핥았다.
“이제 두 번 다신 너 그렇게 혼자 안 둬.”
“···.”
“좋은 거든, 나쁜 거든, 이제부턴 다 둘이 같이 하자.”
도하의 믿음직스러운 속삭임이 귓가를 무지근하게 휩쓸었다.
다경은 문득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얼굴을 도로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10년 전.
‘맞고 터지는 건 내가 대신 할 테니까.’
꼭 지금처럼 믿음직스럽게 읊조렸던 도하의 얼굴이 지금 제 앞에 있는 얼굴과 정확히 오버랩되어 보인 탓이다.
그때, 내가 널 좀 더 믿고 네게 손을 뻗었더라면 우리의 10년이 지금까지와는 아마도 많이 달랐을 테지.
“···응. 같이 하자.”
다경의 답에 도하가 그제야 비로소 마음이 놓인 듯 마른 등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그러곤 그녀의 이마며 뺨에 하염없이 입을 맞추고 또 맞추었다.
이젠 정말,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함께 하는 거라고.
확답을 받듯 되뇐 그가 좀 더 짙게 아랫 입술을 흡입했다.
부드러운 봄바람 같은 입맞춤에 순응하듯 눈을 감고 있길 한참.
“근데 혹시, 나에 대해 꾼 꿈이 그게 전부였어?”
그가 다경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의뭉스런 얼굴로 물었다.
“응?”
다경이 무슨 뜻이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실은 나도 네 꿈은 많이 꿨는데, 네가 꾼 꿈이 내 꿈이랑은 좀 다른 것 같아서.”
“뭐가?”
뭐가 다르다는 걸까.
도하의 꿈 속에서 나는 어땠길래 저렇게 말하는 걸까. 다경이 두 눈을 반짝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이내 그에게서 그간 그의 꿈을 잠식했던 저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음··· 가령.”
뭘까. 대체 뭐길래···.
“10년 전 했던 첫 경험을 떠올리면서 몽정을 한다든지.”
“뭐어?”
“그때 네 모습을 상상하면서 아래를 부여잡고 흔들었다든지···.”
“아, 정말!”
이어지는 음담패설에 결국 다경이 제발 그만 좀 하라고 입을 틀어막았다. 꿈은 아무래도 무의식의 반영이라지만, 어떻게 된 게 꾸는 꿈마저 저 모양으로 일관성이 있었다.
“그러니까.”
못 말리겠다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바동거린 순간, 그가 멀어지려는 허리를 확 감아 당기며 이마 위로 촉 입을 맞춘다.
“그만 울고, 이젠 나처럼 야하고 좋은 꿈만 꾸라고.”
“좋은 꿈 맞아?”
다경이 샐쭉하게 그를 흘겨 보며 물었다.
“아마도 나한텐?”
천연덕스럽게 답한 도하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아휴, 이 능구렁이를 대체 어떡하면 좋을까.
다경의 입술에서 항복하듯 한숨이 샜다. 그러자 그가 다시 또 그 야하고 좋은 꿈 속으로 들어가자며 다경의 하반신을 잡아 당겼다.
벌써 4번째 이어진 행위에 힘들다며 미약한 반항을 부려보았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새벽마저 야하게 물들일 도하의 꿈이 시작되었다.
* * *
반짝- 감은 눈 안으로 짧게 빛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뭐지.
곱게 감겨 있던 연한 눈꺼풀이 이윽고 빛의 잔상을 쫓아 스륵 말려 올라갔다.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시야로 커다란 손바닥이 보였다가 이내 눈앞에서 걷혔다.
그리고 그 뒤로 곧···.
“깼어?”
다정한 목소리로 달콤하게 속삭이는 이가 눈을 파고들었다.
한 손으로 옆머리를 받치고 누운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흐트러진 그 모습이 익숙하고도 낯선 나의 연인, 권도하.
“아···.”
“더 자라고 일부러 햇빛 가린 건데.”
유연하게 말려 올라간 입술선이 아직 잠 가운데를 헤매는 정신을 파드득 깨게 했다. 모로 누워 한 손으로 옆머리를 받친 덕에 널찍하게 펴진 잘 짜인 가슴이 괜스레 낯을 달아오르게 한다.
간밤, 저 탄탄한 가슴팍을 양손으로 짚은 채 몇 번이고 몸을 들썩였던 게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탓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그렇게나 몸을 섞고도 둘이서 함께 아침을 맞이한 건 또 처음이라 어쩐지 이 광경이 낯설기도 했고.
“어라, 왜 또 얼굴이 빨개져?”
괜스레 간밤의 일이 떠올라 눈을 떨구자 도하가 피식 웃으며 다경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했길래?”
어느새 얼굴까지 빨개졌던 모양이다.
“무, 무슨 생각을 하긴···.”
짓궂은 물음에 다경이 가슴께에 흘러내려 있던 이불을 뒤늦게 턱 밑까지 당겨 올리며 말했다.
“그냥 이러고 있으니까 창피해서.”
“창피하기만 해?”
막 턱 밑에 닿은 이불이 도로 쇄골이 보이도록 홱 끌려 내려갔다.
“다른 느낌은 없고?”
끄트머리만 살짝 휘어진 눈매에 장난기와 음흉함이 그득했다.
간밤.
‘아··· 제발. 그만··· 흣.’
‘밤새도록 울려달라더니. 위도 아래도 자꾸 우네, 우리 다경이.’
제가 울며 흐느낄 때까지 몰아 세워놓곤 흡족한 듯 미소짓던 바로 그때처럼.
위험해.
“다, 다른 느낌은 무슨···.”
“난···.”
그 순간 몸이 뒤로 눕혀지며 커다란 몸이 기민하게 그녀 위로 자리를 잡았다.
“자는 너 보면서 이 지경이 된 상태라, 지금 굉장히 난처한데.”
뭉툭한 부피감이 무엇이 얼마나 난처한지를 일깨워주듯 다경의 다리 사이를 쿡 찔렀다.
뭐, 뭐야. 이게?
새벽까지 그렇게나 사람을 괴롭혀 놓곤, 피곤이라곤 모르는 이 짐승은 양심마저도 없는 모양이다.
익히 아는 감촉에 힉, 숨을 들이켠 다경이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며, 몇시야? 출근할 시간 되지 않았어? 오늘은 꼭 간다고 송 과장님한테 약속했는···.”
“이제 고작 7시야.”
상황을 피하려 곰지락대던 몸이 붙잡히며 그대로 침대 위에 바제 당했다.
“빌라는 회사 바로 앞이라, 아직 한 시간 반 정돈 여유 있는 상태고.”
음흉하게 웃은 그가 다경이 유독 약해 하는 귓불을 슥- 손 끝으로 훑어 올렸다.
“너만 잘 협조해주면 한 발은 거뜬히 빼고도 남을 시간이지, 아마.”
“미쳤어. 밤새 그렇게 해놓곤.”
“잊었나 본데, 밤새도록 울려달라고 한 건 너였어. 윤다경.”
그래놓곤 어디서 발뺌하려 드냐며 야살스레 속삭인 그가 물러서려는 하반신을 확 붙당겼다.
대체 그 한 마디를 언제까지 우려먹을 참인지 모르겠다.
“10년 회포 풀려면 그 정도론 어림도 없다고, 응?”
그럼 대체 어느 정도여야 그 회포가 풀리는 건데에!
이러다 또 꼼짝없이 이 무자비한 짐승에게 잡히는 걸까.
어느 틈에 허벅지 안쪽을 잡아 벌리며 파고드는 덕에,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 그의 품에서 아등바등대던 그때였다.
지이잉―
또 다시 집어삼킬 듯 다가오던 그의 입술 사이로 어딘지 요란스럽고도 질긴 진동음이 울렸다.
살았다!
“자, 잠깐!”
그 바람에 황급히 뻗어나간 손이 부리나케 도하의 턱을 밀어냈다. 졸지에 거부당한 도하가 입을 막은 손을 마뜩잖은 눈으로 내려다본다.
그나마 한숨 돌렸다!
내심 쾌재를 지른 다경이 서둘러 휴대폰을 귀에 갖다 붙이자, 이윽고 전화 너머에서 구세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윤 대리이!!! 오는 중이지?
모처럼 적절한 때 등장해 주신 송 과장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 * *
“어서와! 윤 대리!”
사무실로 들어오자 오늘따라 요란스러운 목소리가 반갑게 다경을 반겼다.
며칠 회사 비운 게 뭐 그리 잘한 일이라고. 소란스러운 환호에 민망함이 몰려와 다경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조용히 좀 말씀하심 안 돼요, 과장님? 민망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