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3)
“민망할 게 뭐 있어? 며칠만에 보니까 반가워서 그러는데. 잘 왔어! 우리 윤 대리 오니까 칙칙하던 사무실에 불이 환히 켜진 것 같네.”
송 과장이 양 손을 옆으로 펼친 채 부산스러운 리액션을 취했다. 그 손을 지그시 아래로 끌어내리며 다경이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과장님 국밥농성은 도저히 감당 못하겠더라구요.”
“그래. 잘 생각했어. 나도 뱉고 보니까 며칠씩 국밥 먹는 건 좀 물릴 것 같긴 하더라.”
“오셨어요, 대리님? 사무실에서 뵈니까 더 좋네용!”
때마침 커피 한 잔을 뽑아 자리로 돌아온 미애도 살갑게 다경을 맞이했다.
미애의 말마따나 바로 어제 봤는데도 장소가 바뀌어서인지 다경 또한 괜스레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저를 기다려주고 있었다는 사실에 다경은 새삼 마음이 벅찼다.
이 좋은 사람들에게 이젠 더 이상 숨길 것이 없다는 사실이 더욱 제 마음을 홀가분하게 하는 걸지도.
“그러게. 우린 역시 여기서 봐야 더 좋은가 봐.”
“밖에서 봐도 좋던데, 뭐.”
다경이 웃으며 말하자 송 과장이 어제의 갑작스러운 만남을 떠올리며 말했다.
“어머니도 완전 미인이신데다가 유머까지 겸비하셔서 웃느라 배 아파서 혼났잖아, 어제.”
하긴 어제의 과장님은 꽤 즐거워 보이긴 했다.
매일 식당 일로 바빴던 엄마 또한 덕분에 죽이 잘 맞는 친구 하나를 만난 듯 즐거워 하시기도 했고.
“그래도 그런 식으로 연락도 없이 오시는 건 이제 안 돼요. 아셨죠?”
“아, 알았어. 알았다구요.”
다경이 엄한 표정으로 말하자 송 과장이 정말 알아먹긴 한건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답했다.
하여간, 가만 보면 진짜 무대뽀야.
어찌 된 것이 제 주변엔 이리도 말이 통할 듯 말듯한 사람들만 있나 싶어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나저나 아침부터 권 팀 얼굴은 왜 저렇게 뚱해?”
“그러게요. 윤 대리님 오셔서 화색이 도셔도 모자랄 판에.”
송 과장과 미애가 출근길부터 영 기분이 저조해 보이는 도하를 가리키며 말했다.
왜 저렇게 뚱하긴. 누구 덕에 모닝섹스건이 미수로 끝나서 그런 거지.
“글쎄요. 왜 저러실까요.”
다경은 하마터면 터질뻔한 웃음을 꾹 입안에 감춘 채 아이처럼 뾰로통한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다른 땐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만큼은 송 과장 덕에 저 물색 없는 짐승으로부터 그나마 제 몸을 지킬 수 있었다.
‘아씨, 송 과장 진짜아!’
송 과장에게서 걸려온 모닝콜에 부리나케 침대 위를 벗어나던 제 뒤에서 울부짖던 분노 어린 목소리가 귓전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듯 했다.
그러고 보면 송 과장과 도하 둘 다, 서로에게 있어선 은근한 방해꾼이며 천적들이다.
“참, 아까 보니까 둘이 비슷하게 출근하는 것 같던데.”
일부러 회사 근처 횡단보도에서 내려 걸어왔는데, 비슷한 시간대에 들어온 걸 본 것인지 송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뭐야아-. 간밤에 둘이 같이 있었어?”
또 시작이다, 이분.
“아, 아뇨. 무슨. 요 앞에서 만난 거예요.”
“오, 정말? 때마침 딱! 둘이서 그렇게 만난 거야?”
“네에.”
암만 봐도 미심쩍다는 듯 눈을 흘기는 송 과장을 피해 다경이 어설피 눈을 돌렸다.
그러자 옆에서 일도 하고, 연애도 하는 누군 좋겠다며 미애에게 키들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언젠가는 박 과장과 못 이어줘서 난리더니, 아무래도 앞으론 도하와 제 연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실 모양인가 보다.
“후···.”
다른 의미로 피곤함과 걱정이 밀려와 낮게 한숨을 쉬던 그때, 지난주와는 달리 비어있는 한 자리가 보였다.
다름 아닌 김주미의 자리.
그리고 그 옆에서 어색한 얼굴로 눈을 돌리고 있는 은영의 무리 또한 보였다.
사무실에 있는 대부분의 팀원들이 다가와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와중에도, 선뜻 제게로 다가서지 못하는 몇 사람들이.
“···.”
힐긋 제 쪽을 돌아보는 듯하다가 사고처럼 시선이 부딪히자마자 빠르게 파티션 너머로 숨어버리는 몇 사람들을 다경이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저들을 질책하고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은영에게도 주미의 그 말들에 휩쓸려 저를 험담할 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굳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지도, 또한 이해해주고 싶지도 않다.
인간관계라는 것은 여러 무수한 일들을 겪으며 오래 곁에 둘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게 되는 것이니까.
그러니 저 또한 아닌 인연에 괜한 미련을 둘 필요 없이, 지금 내 옆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진솔하게 최선을 다하면 될 일이다.
“오늘 점심은 제가 쏠게요.”
다경이 뭐가 그렇게 신난지 속닥거리고 있는 송과 미애를 향해 말했다.
“윤 대리가?”
“네. 어제 덕분에 매상 올렸잖아요. 그러니 저도 한 턱 쏴야죠.”
“야야, 아서라.”
유쾌하게 지갑을 흔드는 다경을 보며 송 과장이 격렬히 손사레를 쳤다.
“어제 안주 하라고 서비스로 내주신 것만 해도 얼만데. 배보다 배꼽이 크겠어, 오히려.”
“맞아요, 대리님. 쏘려면 저희가 쏴야 맞죠. 어제 너무 대접 받아서 오히려 죄송하던데.”
“그래, 차라리 우리가 쏠게. 우리가!”
“절대 안 돼요.”
도리어 둘이 밥을 사겠다 나서는 동료들의 말을 다경이 단호하게 잘라냈다.
“다 엄마가 좋아서 해주신 거예요. 사실 그게 우리 모녀한텐 매상 몇 푼보다 훨씬 값졌거든요.”
사실이었다.
대학 시절에도 각종 알바와 학업을 병행하느라 흔한 친구 한 번 소개해준 적 없는 제가 회사에 다니면서도 사적인 이야기 한 번 한적 없는 것에 대해 엄마는 내심 안타까워하고 불안해 하셨다.
그런 집에 딸의 동료들이 찾아와서 보여준 정은 그간 알게 모르게 마음을 졸이고 있던 엄마의 마음을 한결 안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러니 어제의 방문은 돈 몇 푼에 비할 수 없이 값진 것이었다.
밥 한 끼가 아니라 두 끼, 세 끼를 더 사주어도 모자랄 인연들이었다.
“뭘 그렇게까지···.”
“그러니까요. 저흰 진짜 대리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간 건데.”
다경의 진심에 미애와 송 모두가 민망함과 감동을 동시에 내비쳤다.
그런 둘을 보며 다경이 환하게 웃으며 다소 간곡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저 하고 싶은대로 하게 해주세요. 아셨죠?”
“그럼 그 점심 식사에 나도 끼워주나?”
“···!”
생각도 못하고 있던 순간, 등 뒤에서 넘어온 익숙한 저음에 다경이 깜짝 놀라 뒤를 보았다.
“어머, 팀장님?”
“으음-, 권 팀장님도요?”
“왜, 난 안 돼요?”
먼저 그를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 미애와 송을 향해, 도하가 천연덕스런 얼굴로 반문했다.
“송 과장이랑 나, 어제만 해도 윤 대리의 복귀라는 같은 목표를 가진 전우 아니었나?”
“아···.”
냉하기 그지없는 팀장의 철면피에 모두가 그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중에서도 이런 일엔 면역이 없는 다경의 얼굴은 못볼 꼴이라도 본 양 새빨개지고 말았다.
어제를 기점으로 아주 팔불출이 되기로 작정이라도 한 건가.
이 바보가. 사람들 다 있는 앞에서 대놓고 수작을.
“저 팀장님,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뭐, 그렇긴 했죠. 모처럼 맘과 뜻이 맞아서, 어제는.”
도하를 말리려는 다경을 붙잡으며 송이 새침한 얼굴로 앞질러 말했다.
“회식 내내 권 알바로 뛰시느라 고생한 노고도 있으시니까, 밥 사는 사람만 오케이 하면 난 콜!”
“과장님!”
“저도 콜이요!”
다경이 어찌 말려볼 새도 없이 송 과장에 이어 미애마저 옆에서 수락의 말을 뱉어버렸다.
“두 사람 정말···.”
“이럴 때 아니면 제가 언제 권 팀장님이랑 사석에서 밥을 먹겠어요. 완전 좋아요!”
“야야, 그래 봤자 임자 있다니까? 눈앞에서 보면서도 미련을 못 버리네, 얘는.”
“아이 참, 과장니임-.”
제 의사와는 별개로 순식간에 한쪽으로 몰아 세워진 분위기에 다경이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뒤에 서서 재밌다는 듯 상황을 지켜보던 도하가 으쓱 어깨를 올리며 물었다.
“자. 어떻게 할래요, 윤 대리?”
이 여우가 정말.
원망스러운 얼굴로 도하를 흘겨보던 다경이 이내 한숨을 폭 쉬며 마지못해 답하고 말았다.
“···콜.”
“아싸아!”
좌절에 가까운 다경의 답에도 불구하고 미애와 송 과장에게선 쾌재와 수선스러운 박수가 쏟아졌다. 뒤에 서 있던 도하의 입가에도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왠지 이 간악스러운 트리오들에게 제대로 말려버린 것 같은데···.
뭔가 손해 본 기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그때.
“자, 그럼. 복귀했으면 일해야죠, 윤대리?”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얼굴로 도하가 까닥, 팀장실 쪽을 고갯짓했다.
“잠깐 팀장실로 와요.”
아주 제대로 부려먹을 것 같은 오만한 팀장님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