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02. (90/98)

 외전 02.

 매일같이 회사에서 만나고 간간이 그의 집에서 시간을 즐기는 둘이었지만, 서로의 일상이 바쁜 탓에 아직 제대로 된 데이트는 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10년 전 수능 끝나고 했던 어린 날의 서툰 만남이 더 제대로 된 연애에 가까웠달까.

 그런데 이번 주말에 드디어,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자니.

 “글쎄.”

 뭘 하면 좋을까···.

 그의 품에 안겨 골똘히 생각하던 다경의 머릿속으로 데이트라 할 만한 것들이 하나둘 스쳐 지나갔다.

 같이 영화 보기, 밥 먹기, 차 마시기, 산책하기 등.

 일상적이지만 둘이기에 데이트라 할 수 있는 몇몇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런 건 굳이 데이트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이미 종종 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장소만 밖이 아닐 뿐 도하의 집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이 나이에 또 놀이동산이니 하는 곳에 가는 건 좀 또 그런데.

 그때, 골몰하던 뇌리 가운데로 불현듯 한 장면이 스쳤다.

 “아, 있다.”

 다경이 손뼉을 짝, 치며 생기 어린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도하가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갸웃한다.

 “뭔데 그래?”

 “생각났어, 너랑 하고 싶은 거.”

 그를 마주 보는 말간 낯에 기대로 가득 찬 아이 같은 웃음이 번졌다.

 대체 뭐길래 저러지?

 물끄러미 다경을 보는 도하의 얼굴 위로 의구심과 불안함이 동시에 스친다. 하지만 그런 도하와는 달리 데이트를 앞둔 다경의 눈은 모처럼 생기를 띠고 반짝였다.

 10년 전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어른의 연애를 할 시간이다.

 * * *

 드디어 돌아온 주말.

 “뭐야, 데이트하자며.”

 다짜고짜 이끄는 다경을 따라 백화점 8층에서 내린 도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맞아, 데이트.”

 “근데 왜 여기서 내려. 이 위층에 있는 레스토랑이라도 가려는 건가 했더니.”

 며칠 전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자던 제안 그 후. 대체 어딜 가서 뭘 하려는 거냐고 계속해서 물었지만 다경은 백화점까지 차를 몰고 온 오늘까지도 이 만남의 정확한 목적을 말해주지 않았다.

 때문에 이 근처 어디 맛집이라도 가려는 건가 하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더니.

 “거기도 좋은데, 레스토랑은 일단 너랑 나 볼일부터 본 다음에 가자.”

 “무슨 볼일? 이 층 어디에 룸이라도 있대? 은밀하게 붙어 있기 좋은?”

 “하여간 변태.”

 입만 열었다 하면 갓길로 새는 화법에 다경이 가늘게 눈을 흘겼다. 그러자 농담이라며 장난스레 웃은 그가 작은 어깨로 다정히 손을 얹는다.

 아주 농담도 아니었을 거면서.

 “뭐 사고 싶은 거라도 있어?”

 여긴 왜 온 거냐고 묻긴 했지만, 백화점에 올 만한 이유라면 쇼핑밖에 없을 것이다.

 “응. 있어.”

 그제야 인정한 다경이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린 뒤로 멈춰 있는 그를 이끌며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긴다.

 대체 뭘 하고 싶어서 그렇게 눈을 빛내나 했더니 나랑 같이 쇼핑을 하고 싶었던 건가.

 귀엽네, 윤다경.

 “그런 거였음 말을 하지.”

 피식 웃은 그가 도하가 잠자코 따라나서며 당장 카드라도 꺼내 들 기세로 물었다.

 “뭔데, 사고 싶은 게. 옷, 백? 아니면 둘 다?”

 “옷. 근데 내 거 말고 네 거.”

 “내 거?”

 그 순간, 생각 없이 다경에게 끌려가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내 거라고?

 혹시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잠시 미간을 찌푸린 그가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었다.

 “네 거가 아니고 내 거?”

 “응. 네 거. 네 옷.”

 다경이 단호히 답하며 다시금 답삭 팔짱을 낀다. 그러곤 더 이상의 말도 없이 다짜고짜 매장을 향해 몸을 틀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윤다경, 잠깐.”

 기민하게 뻗어 나간 손이 또다시 다급히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갑자기 내 옷을 왜 사? 나 옷 많은데. 거의 매일 집에 오면서 못 봤어? 방 한 칸이 옷으로 꽉 찬 거?”

 “봤지, 네 집 옷장에 옷 많은 거.”

 “근데, 왜.”

 “그래도 그중에 내가 사준 건 아직 없잖아. 아냐?”

 다경을 내려다보는 짙은 눈매 끝이 슬쩍 구겨졌다.

 설마 그냥 옷을 사자는 게 아니라, 본인이 내 옷을 사주겠다는 그 말인가?

 “하···.”

 그제야 다경이 여기까지 자신을 데리고 온 의도가 완전히 파악되어, 도하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그렇긴 한데, 네가 굳이 내 옷을 왜 사 줘야 되는데. 마음은 잘 알겠으니까 내 건 그냥 관두고, 오늘은 온 김에 너 옷이랑 백이나 몇 개 좀 고르자. 내가 사줄게.”

 당혹감을 벗은 단호한 얼굴이 다경의 팔을 붙잡으며 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다경은 돌아서긴커녕 그 자리에 버티고 선 채 고집스럽게 말했다.

 “싫어. 오늘은 내가 너 사주려고 온 거야.”

 “윤다경.”

 도하가 다소 엄한 얼굴로 다경의 이름을 불렀다.

 “괜한 고집 부리지 마. 네 집 사정 내가 뻔히 아는데 갑자기 무슨 선물이야. 됐으니까···.”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나, 항상 너한테 받기만 했어.”

 말허리를 잘라낸 음성이 간절하게 도하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매번 당연하다는 듯이 받고, 뭐 하나 너한테 줘 본 적이 없었어. 성인이 된 지금도 넌, 나랑 뭘 할 때도 내가 지갑조차 못 꺼내게 만들잖아.”

 “다경아, 그건.”

 “지금처럼 내 사정 뻔히 안다면서, 네가 다 내는 게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10년 전 학생이었을 때도, 그에게 무언갈 받으면서 단 한 번도 마음이 편한 적 없었던 다경이었다.

 아무리 더 여유로운 사람이 마음을 쓰는 거라고들 할지라도,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받기만 하는 입장이 그저 편할 리는 없었다.

 게다가 그 관계가 그냥 인간관계가 아니라, 서로 애정을 주고받는 연인 관계라면 더욱 그러했고.

 “어른이 된 내가 그때랑 다르게 너한테 뭘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떠올린 거야. 그러니까 더는, 나 무색하게 만들지 마.”

 “하지만···.”

 “나 하고 싶은 거 말해보라고 했던 건 너야. 이 이상 내 선택에 토 달면 이젠 바깥 데이트 안 해. 알았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단호한 다경의 반응에 도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더 제가 버틴다면, 그건 다경에게 더 이상 배려가 아닌 무시로 느껴질 터였다.

 “완전 독재자가 따로 없네.”

 도하가 머리 아프다는 듯 이마를 쓸며 허공으로 눈을 돌렸다.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릴.”

 다경이 피― 말아 올린 입술 끝에 애교 어린 웃음을 머금었다. 덕분에 허공에 닿아 있던 시선이 도로 떨어져 제 옆에 선 말간 얼굴로 향했다.

 이 예뻐 죽겠는 걸 대체 어째야 하나.

 옷이고 뭐고 어디 딱 틀어박혀 종일 물고 빨고 있음 딱 좋겠는데. 생각하며 내려다보고 있자, 다경이 다시금 팔짱을 폭 끼며 그를 매장 쪽으로 이끈다.

 “그만 들어가자. 남들이 보면 싸우는 줄 알겠어, 우리.”

 “잠깐만.”

 곧 죽어도 사줘야 되겠다고 하니 가긴 가겠는데, 매장명을 확인한 걸음이 선뜻 앞을 나아가질 못했다.

 “가려는 매장이 여기야? 이 브랜드 옷 비싼데.”

 “나도 알아, 여기 옷 비싼 거. 너 자주 입는 브랜드잖아. 그래서 온 건데?”

 뭐야. 설마 나 몰래 내가 입는 옷 브랜드 사전조사까지 마친 거였어?

 “하··· 윤다경 너 진짜.”

 “예뻐 죽겠지?”

 하고 다경이 도하가 차마 뱉지 못한 팔불출 멘트를 선수 쳐 뱉었다. 그러면서 볼우물이 파이도록 미소 짓는 얼굴을 보자, 그대로 뒷골이 아찔해졌다.

 “너 쇼핑 끝나고 각오해, 진짜.”

 결국 그가 늑대 같은 얼굴로 경고하며 마지못해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 * *

 옷걸이가 받쳐주니 뭘 갖다 대건 빛이 났다.

 “이건 어때?”

 가을옷 선물이라 뭐가 좋을까 고민하던 다경이 여러 종류의 상의가 걸린 매장 옷걸이에서 니트 하나를 꺼내어 도하에게로 내밀었다.

 “뭐든, 네 취향에 맞으면 난 그냥 오케이.”

 옆에 서서 지켜보던 도하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다.

 내 취향에 맞으면 그저 오케이라.

 평상시엔 참 다루기 어려운 애인인데, 또 이럴 땐 더없이 순종적인 애인이기도 하다.

 “카멜도 잘 어울릴 것 같긴 한데 너무 무난한가 싶고. 음··· 보자, 가을이니까 버건디는 어때?”

 “버건디?”

 “왠지 너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찐하고 짙은 빨강.”

 다경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말간 붉은 빛이 아닌 짙은 핏빛에 가까운 검붉음이 어쩐지 도하와 어울리는 것 같았다.

 제 앞에선 언제나 새카맣게 탈 때까지 열정적으로 구는 그와.

 “흠··· 좋은 의미로 어울린다는 거지? 위험을 나타내는 적색 경고등 같은, 그런 건 아니고?”

 “그럴지도?”

 “뭐?”

 혹시나 하고 던져본 말에 기다렸다는 듯 답이 돌아오자, 도하의 한쪽 눈썹 끝이 휙 치켜 올라간다.

 그 모습을 보고 풋, 웃은 다경이 도하의 손에 니트를 덥석 들려주었다.

 “농담이야. 들어가서 입고 나와 봐.”

 “입어보기까지 해야 돼?”

 “왜, 싫어? 안 봐도 멋질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직접 보고 싶은데?”

 “큼, 뭘 굳이···.”

 안 봐도 멋질 것 같단 소리가 민망했던 걸까.

 “이리 줘.”

 쑥스러운 듯 뺨을 붉힌 그가 이윽고 마지못해 니트를 든 채 몸을 돌린다.

 탈의실 안으로 들어가는 귀 끝이 안 어울리게 빨개져 있었다. 저러니 울 엄마가 얘만 보면 주인 앞에서 꼬리 흔드는 강아지 같다고 하지.

 귀여워.

 뒷모습을 지켜보는 다경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사실 저 얼굴 저 몸매에 뭔들 안 어울릴까 싶었지만, 다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 하나만 고르기가 쉽질 않았다.

 내가 돈 많고 능력 있는 여자였다면 정말 다 사주고 싶은데.

 언젠간 내게도 그런 여유가 올까.

 “애인분이신 거죠?”

 도하에게 맞는 사이즈로 옷을 건네준 뒤 곁으로 다가온 매장 매니저가 다경을 향해 물었다.

 애인이라.

 “아, 네.”

 아닌 것도 아니지만 그런 호칭으로 타인에게 불리는 것이 왠지 쑥스러워, 말갛던 뺨이 순식간에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모처럼 뵙는 선남선녀 커플이네요. 고객님도 예쁘시고, 애인분도 근사하시고.”

 서비스 멘트인지, 진담인지 매니저가 살가운 어투로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다경이 민망한 얼굴로 답하며 도하가 들어간 탈의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를 기다리는 마음속으로, 마치 오랜 시간 미뤄두었던 숙제를 하나 마친 것 같은 뿌듯함이 밀려왔다.

 너무 좋다.

 당연스럽게 받기만 하는 관계가 아닌, 도하에게 뭐라도 줄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에.

 조금씩 더 내 삶에 여유가 와서, 종종 이렇게 둘이 함께 나오는 것도 좋겠구나. 생각하던 찰나.

 “다경아.”

 탈의실 안쪽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이리 와서 나 좀 잠깐 봐줘.”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밖으로 나오지 않은 그가 도움을 요청했다.

 뭐지. 옷이 잘 안 맞았나?

 “저, 잠시만요.”

 옆에 서 있는 매니저에게 조심스레 인사하곤 걸음을 옮겼다.

 니트라 딱히 안 맞을 건 없을 것 같은데.

 의아한 얼굴로 탈의실 쪽을 건너다보던 다경이 문고리를 돌려 밀며 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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