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3.
“왜 그래, 사이즈가 안···.”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손목이 당겨졌다.
“뭐···.”
밀폐된 탈의실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도 전, 시야를 덮친 버건디색 가슴팍과 함께 화들짝 고개가 들렸다. 뒤늦게 상황 파악을 마쳤을 땐 이미 더운 품 안으로 몸이 딸려 들어가 버린 뒤였다.
갑자기 왜.
“권ㄷ···.”
“쉬. 조용.”
다소 놀란 목소리로 도하의 이름을 부르려는 작은 입술을 기다란 검지가 지그시 짓눌렀다.
왜 갑자기···.
놀란 토끼처럼 커다래진 눈망울을 시야에 담은 채, 도하가 늘씬한 입매 끝을 당겨 씩 웃는다.
‘안으로 들어오라 했던 게 설마···.’
그 어딘지 음흉하고도 야릇한 미소의 의도를 미처 파악하기도 전, 입술 위를 누르던 손가락이 걷히고 그대로 점막과 점막이 맞붙었다.
“···!”
가볍게 아랫입술을 빠는 듯하더니 그대로 말캉하게 파고드는 혀의 감촉에 다경이 깜짝 놀라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말도 안 돼.’
반사적으로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던 팔이 도리어 당겨지며 두 몸이 밀착되었다.
장신의 도하 혼자 있기도 비좁은 탈의실 안에서, 여백 없이 두 몸을 맞대어온 그가 진득하게 다경의 입술을 빨았다.
“흡···.”
허리가 더 깊숙이 그에게로 당겨지고 입술과 입술의 균열 또한 가늠할 수 없이 밀착되었다. 과육이 흥건한 복숭아를 베어물 듯 조심스럽고 탐욕스러운 입술이 살살 핥듯 점막을 가르고 입 안 살들을 헤집어 놓았다.
질끈 즈려감은 속눈썹 끝이 파르르 떨리고 심장이 터져 나갈 것처럼 튀어 올랐다. 지척에서 엉키는 호흡이 무더위의 공기처럼 뜨거웠다.
문만 열면 타인을 맞닥뜨릴 공간에서 행해지는 야릇한 접촉에 온몸 위로 아스스 소름이 돋았다.
무슨 일이 부른 건가 싶었더니, 들어오자마자 키스라니.
‘이 변태를 어떡하면 좋아, 정말.’
행여 그를 밀어내기라도 했다간 탈의실 안의 마찰음이 밖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할까 봐, 다경이 숨조차 쉬이 뱉지 못한 채 가느다란 몸만 파르르 떨었다.
그러자 얼마간 제 욕심을 취한 듯싶던 입술이 드디어 떨어지며 그가 이마를 맞붙인 채 나직이 속삭였다.
“어때?”
“무, 무슨···.”
“위험하게 짙은 빨강.”
어디 한 번 보라는 듯, 눈짓으로 제 몸을 턱짓하며 그가 야살스레 덧붙였다.
“좀 쌔끈한가?”
“하···.”
이 뻔뻔한 낯 좀 봐.
탈의실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긴장감에 제대로 숨조차 내쉬지 못하던 다경에게서 기막히다는 듯 헛웃음이 터진다.
“그걸 꼭, 이렇게 아슬아슬한 상황을 연출하면서 물어야 해?”
여전히 그의 품에 갇힌 채인 다경이 원망하듯 눈을 흘겼다.
들어와서 봐달란 말에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더니, 이런 야시시한 스킨십을 시도할 줄이야.
“이러려고 굳이 들어가서 옷 입어 봐라 했던 거 아냐? 난 그렇게 이해했는데?”
도하가 특유의 뻔뻔한 낯을 한 채 비스듬히 다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면서도 떨어져나가지 않은 그의 손은 다경의 잘록한 허리춤을 지나 힙선 어딘가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이러려고 입어보라고 한 거라고? 어쩐지, 너무 순순히 들어간다 싶더니.
“넌 정말 모든 발상이 다 불순해.”
다경이 여러 말 하기도 귀찮다는 듯 엉덩이로 감겨오는 불건전한 손을 탁 밀어내며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왜 그러세요, 손님?”
그 바람에 밖에서 뭔가를 들었는지, 매니저의 의아한 목소리가 탈의실 안으로 넘어왔다.
“무슨 문제 있으세요?”
아뿔싸.
당황한 얼굴의 다경이 서둘러 매니저에게 둘러댔다.
“아, 아뇨. 나가기 쑥스럽다고 해서 여기서 좀 보려구요. 금방 나갈게요.”
어색한 변명을 내뱉은 얼굴이 마치 안에서 한 행위를 들키기라도 한 양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풋···.”
앞에 있던 도하에게서 가느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진짜.
“재밌어?”
누군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조여들어 죽겠는데.
얄미워 죽겠다는 듯 노려보며 가슴을 콩- 치자, 그가 도리어 손을 낚아채 촉- 입을 맞추곤 반성하는 기미도 없이 물었다.
“그래서, 네가 골라 준 옷 입은 난 어떤데?”
붙잡은 손을 지그시 아래로 내리며 어디 한번 평가해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한다.
정말이지, 제 명엔 못 살지.
가늘게 눈을 흘기던 다경이 뒤늦게 그의 모습을 훑어내렸다.
그와 함께 직전까지 얄미워 죽겠다는 듯 그를 노려보던 눈매 끝이 슬쩍 무뎌졌다.
‘뭐야···, 뭔데 이렇게 잘 어울려.’
보나 마나 잘 어울릴 것이라곤 생각했지만, 제가 고른 옷을 입은 도하의 모습은 기대 이상이었다.
캐시미어가 섞여 얇고 소재감 좋은 검붉은 옷감이 탄탄한 가슴팍을 쓸고 허리까지 매끄럽게 떨어졌다. 덕분에 군더더기 없이 자리한 근육의 굴곡들이 얇은 니트 위로 은근히 비쳐 보였다.
각 잡힌 슈트를 입은 것도 아니고 깔끔한 슬랙스에 그저 니트 하나 걸쳤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도하에게선 어딘지 섹시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너무 붉지도 그렇다고 너무 어둡지도 않은 적당한 채도의 버건디가 어딘지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연출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대로 살짝 들춰 올리면 드러날 것만 같은 탄탄한 근육의 실루엣도 꽤나 아찔했고.
어쩌지. 이거···.
데이트 할 때면 몰라도 회사엔 절대 못 입고 가게 해야겠는데?
“뭘 그렇게 빤히 봐?”
“어?”
약간 넋이 나간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다경의 앞으로 도하가 다시 불쑥 거리를 좁혀왔다.
“눈빛이 꽤 불순한데.”
문득 짙어진 도하 특유의 시원한 향이 더운 체온과 뒤섞여 뭉근하게 코끝을 핥는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응?”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도하가 오만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다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하···.”
유려하게 말려 올라간 입매 끝이 야살스럽기 그지없었다. 권도하 특유의 장난기 다분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앞에 선 그에게선 남성적인 분위기가 넘칠 듯 흘렀다.
아니라고 딱 잡아 시치미를 떼고 싶은데, 이미 보여버린 반응이 저조차 양심에 찔리는 터라 도무지 부정하는 말이 나오질 않는다.
결국 백기를 드는 쪽을 선택한 다경이 부러 더 당당하게 말했다.
“어, 인정. 완전 쌔끈해. 됐어?”
“오. 그럼 통과.”
그가 유쾌한 미소를 만면에 드리운 채 거만한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뭐가 됐든, 난 너만 꼬실 수 있음 됐거든. 물론···.”
잠시 말을 멈추더니 말없이 올려다보는 다경의 귓가에 입술을 기울이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벗고 꼬시는 게 제일 자신 있지만.”
정말 지극히 정상인의 범주의 있는 저로선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는 남자다.
“하여간 변태.”
다경이 새침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곤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그럼 다 봤으니까 난 나간다-.”
여기서 더 버티고 있었다간 또 어떤 이상한 짓을 하려 들지 몰랐다. 탈의실을 나서려 막 문고리를 손에 쥔 순간, 더운 체온이 등 뒤에서 넘어왔다.
설마 또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걸까.
“너 또···.”
깜짝 놀라 당황한 목소릴 내뱉던 말끝으로 생각지 못한 달콤한 속삭임이 따라붙었다.
“고마워. 잘 입을게, 이 옷.”
방금 전까지 보이던 장난기는 어디 가고.
진중한 목소리로 말한 그가 가녀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덕분에 그와 키스를 하던 때보다도 더 얼굴이 빨개져버린 다경이 쑥스러운 듯 허공을 응시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뭘, 겨우 이런 거 가지고 그래. 네가 나한테 준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왜 아무것도 아냐. 넌 대신 더 값진 걸 나한테 줬잖아.”
바로 날 향한 네 마음과 진심. 그거면 난 정말 충분하다고, 그가 너른 품 가득 그녀를 끌어안은 채로 고백을 토해냈다.
나야말로 너 하나면 충분한데.
울컥하는 목울대 너머로 튀어나오려는 그 말을 삼킨 다경의 눈시울이 괜스레 붉어진다.
겨우 이런 옷 하나가 뭐라고, 이렇게나 좋아하는 그를 보자 마음이 터질 것처럼 벅찼다.
10년 만에 너와 재회했던 그 순간만 해도, 이렇게 다시 네게 사랑받는 행운을 누리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질 못했는데.
‘참 다행이다. 너와 다시 그렇게 만나서.’
그렇게 되뇐 다경이 제 작은 어깨를 감싼 팔을 꽉 마주 잡았다.
* * *
도하에게 한 선물을 끝으로 막을 내리리라 생각했던 쇼핑은 결국 점심 식사 후 오후 시간까지 쭉 이어졌다.
겨우 니트 하나를 선물한 다경과는 달리, 그는 옷이며 백, 거기에 저의 사심이 가득 담긴 야한 속옷까지 풀세트로 사주고서야 사색이 된 다경을 데리고 백화점에서 빠져나왔다.
백화점을 빠져나온 차는 그가 제대로 된 데이트 코스를 밟기 위해 미리 예약해 두었다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입맛을 돋우는 에피타이저부터 메인디쉬까지.
순서에 맞춰 나오는 많은 접시를 다 비울 즘엔, 어지간해선 나온 적이 없는 납작한 배가 결국 볼록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뒤, 언제나처럼 그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는 근처에 있는 호텔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왜 마지막 종착지는 호텔이냐는 다경의 빤한 물음에 도하는···,
“하난 너 원하는 거 했으니, 또 하난 내가 원하는 거 해야지.”
라는 그 다운 답을 뱉으며, 다경을 이끌고 객실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