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5.
“···연락처를요?”
그 순간, 더는 평정심을 찾지 못한 눈이 큼지막하게 뜨이고 말았다.
“대박이다. 곧 죽어도 연예인인데 완전 적극적이네요.”
“그러게. 권 팀이 하유리 맘에 완전 쏙 들었나 본데?”
옆에 있던 미애와 송 과장도 거기까진 의외였던 듯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냥 호감을 표한 것도 아니고 연락처까지 적어서 줬다니···.
잠깐 딴 여자 눈에 들었었다는 사실과는 비할 수 없는 찝찝함과 조바심이 삽시간에 속으로 밀려들었다.
그래서 권도하는 그 연락처를 대체 어쨌다는 거야?
“이래서 남자건 여자건 잘생기고 봐야 돼. 인물 하나로 힘들 계약도 10분 만에 성사시켜버리고 말이야.”
연락처라는 폭탄을 던져놓곤 중요한 알맹이는 빼먹은 채 샛길로 빠지는 오 차장을 보며 다경은 문득 애가 탔다.
그렇다고 해서, ‘그래서 하유리 연락처를 받은 거예요?’라는 속이 뻔히 보이는 질문을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차마 뱉을 수는 없었다.
설마 권도하, 여배우가 줬다고 넙죽 받고 돌아온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면 우리 윤 대리도 입사했을 때 떠들썩했던 건 마찬가지잖아요.”
괜스레 꿍해지는 마음에 애꿎은 팀장실 문을 노려보고 있을 때, 송 과장이 말했다.
“내가 윤 대리 사수 맡으면서 타부서 남직원들한테 로비를 얼마나 받았는데. 윤 대리랑 연결 한번 해달라고 매일매일 먹을 거며 마실 거며 어찌나 갖다 바치던지. 나 이렇게 살찐 게 70퍼센트는 윤다경 자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예전 입사 당시 이야기를 꺼내는 송 과장의 너스레에 다경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민망하게 또 왜 그러세요, 과장님은.”
“민망하긴 뭐가 민망해?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건데.”
“맞아요. 우리 윤 대리님이야 소문난 2팀 여신인걸요. 뭐.”
갑자기 왜 이렇게들 띄워주고 그러지.
으쓱해지긴커녕 머쓱한 마음이 들어 “이제 그만 일들 하시게요.” 하고 다경이 애써 서류로 눈을 돌렸다. 그때.
“그러니까 하유리 따위한테 쫄지 마, 윤다경!”
송 과장이 두꺼운 손바닥으로 다경의 한쪽 어깨를 톡 쳤다.
“네에?”
아니, 이 과장님이!
“괜찮아! 우리 윤다경이 하유리보다 훨 예뻐. 위축될 거 하나 없어!”
“아니, 제가 무슨 언제 위축이 됐다고.”
당황한 다경이 서둘러 입술을 뗐다. 하지만 세트로 오지랖을 부리기 시작한 미애와 송 과장에게 다경의 이 미력한 부정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빠져나갈 뿐이었다.
“맞아요, 대리님! 아마 그래봤자 우리 팀장님은 다경 대리님밖에 안 보일 거예요.”
“아냐, 미애씨. 나 신경 안 쓴다니까?”
“그래, 진짜 괜찮아! 연예인이 뭐 별거 있니? 우리 권 알바님은 완전 윤 대리 바라기니까···.”
“아이참!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과장니임!”
결국 참다 못한 입에서 새된 소리가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래, 그래. 괜찮아아~.”
까르르 웃는 송 과장과 미애의 목소리가 조용하던 사무실 안을 화기애애하게 떠돈다.
정말이지 이놈의 회사 하루를 마음 편히 못 다니겠다!
“아니라구요오!”
귀까지 빨개진 다경의 숨죽인 외침이 애타게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 * *
하아, 정말 아니라니까아···.
퇴근하고도 떨쳐지지 않는 송 과장과 미애의 말을 귓전에서 치워내듯, 다경이 식탁에 앉아 두 귀를 문질렀다.
사람 놀릴 때만큼은 둘이 어찌나 쿵짝이 잘 맞는지, 정말이지 얄미워 죽겠다.
과장님이야 그렇다 치고, 미애 마저 저를 놀리듯이 할 줄이야.
‘진미애, 이거 연애하기만 해 봐라.’
조곤조곤 송 과장의 장난스러운 말에 맞장구를 맞추던 미애를 떠올리며 괘씸하다 여기고 있을 때, 안쪽 드레스룸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도하가 주방으로 오며 물었다.
“오늘 저녁은 간단하게 리조또나 해 먹을까?”
“응.”
다경은 다소 무뚝뚝한 목소리로 답하며 아일랜드 식탁 위에 턱을 괴고 앉았다.
둘은 퇴근 후, 별일이 없으면 회사 앞 도하의 빌라로 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다경의 집으로 귀가를 하곤 했다. 때문에 오늘도 당연한 듯 따라오긴 왔으나, 낮에 들은 이야기 때문인지 괜스레 마음이 뚱해진다.
“토마토가 좋아, 아님 로제가 좋아?”
오랜 유학 생활로 웬만한 음식은 다 섭렵한 도하가 각종 재료가 잘 채워진 냉장고 문을 열며 물었다.
“아무거나.”
다경은 여전히 뚱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딱딱하게 답했다.
“뭐야, 그럼 그냥 나 좋아하는 거로 한다.”
“그러든지.”
단답에 가까운 답들에 대놓고 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도하는 별생각이 없는지 “그래, 뭐든 상관없단 말이지.” 하며 냉장고 속만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다.
‘권도하, 너 대체 연락처는 받은 거야 만 거야?’
다경의 따가운 눈초리가 사람 속도 모르고 식재료들만 꺼내고 있는 너른 등을 뚫을 듯이 응시했다.
오 차장이 떠들고 다니는 바람에 팀 전체에 하유리와 권도하의 일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정작 도하는 퇴근길에 함께 타고 온 차 안에서도, 집에 들어오고 나서도, 그 부분에 대해선 일절 언급조차 없었다.
설마, 도하도 마음이 동한 걸까. 그래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하는 건가.
하긴 그렇게 예쁜 연예인이 저 좋다며 연락처를 다 주고 갔다는데 마음이 들뜨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그래서. 진짜 연락처까지 덥석 받고 와버린 거야?
“종일 뭐가 그렇게 심각해?”
평상시라면 저도 뭐라도 좀 해보겠다며 싱크대 앞으로 다가올 다경인데, 미동조차 않은 채 그만 쳐다보고 있는 눈을 보며 도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뒤늦게 빤한 눈빛을 갈무리한 다경이 끄트머리가 샐쭉해진 눈매를 식탁 위로 툭 떨구었다.
“아닌 것 같은데?”
그 반응에 뒤늦은 눈치를 챈 듯, 도하가 들고 있던 식재료를 내려두고 식탁 앞으로 다가왔다.
“나 봐봐. 진짜 뭐 없어?”
“글쎄. 없대도.”
다경이 더욱 뚱해진 얼굴로 아예 고개마저 홱 돌려버렸다.
뭐야, 이건. 나 뭐 완전 있어요, 하고 알아달라는 표정이잖아?
순간 피식, 웃음이 난 도하가 잠시 골똘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돌아선 고개 앞으로 슥-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뭔데. 내가 뭐 너 서운하게라도 했어?”
딱히 그럴 일은 없었을 것 같은데, 왜 그러나 하고 다경의 갈색 눈동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늘 좀 바빠서 회사에서 뽀뽀를 못 해줘서 그러나?
그러자 슬그머니 끄트머리가 무뎌진 눈이 데구루루 굴러 도하에게로 향한다.
뭔데? 하고 그가 입 모양만으로 뻥긋하자, 다경이 이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입술을 뗐다.
“너, 하유리한테 연락처 받은 거 왜 나한텐 말 안 해?”
“하유리? 누구···, 아. 오늘 새로 광고 계약한 연예인.”
습관처럼 입을 연 도하가 잠시 두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응.”
다경이 의심과 원망이 가득한 얼굴로 그런 도하를 바라보았다.
말해, 빨리.
도하를 응시하는 다경의 연한 눈에 조바심과 오기가 일렁였다.
받은 연락처는 어떻게 한 건데? 혹시 그사이에 나 몰래 연락이라도 한 건 아니겠지?
아니, 설마 그랬대도··· 내가 뭐라 할 입장은 아닌가?
물어놓고도 밀려드는 오만가지 걱정에 남몰래 애가 타들어 갈 때쯤.
“받자마자 버렸는데, 왜. 그걸 말해야 돼?”
제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몸을 바로 세운 도하가 여상한 어조로 다경에게 답했다.
근데 잠깐, 뭐. 버렸다고?
그를 응시하는 눈 안 가득 오기를 싣고 있던 것도 잠시.
“버렸어?”
다경이 연한 눈망울을 크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버렸지. 내가 걔 번호를 왜 챙겨.”
도하가 당연한 걸 묻는 그 질문이 도리어 황당하다는 듯 간결하게 답했다.
동시에 혹시 몰라서 졸이던 가슴이 솨아아- 풀려버리고 만다.
“아···.”
함께 갔던 오 차장이 긴장해야겠다던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연락처에 대한 이야기만 던져준 터라, 그가 받자마자 그걸 버렸을 거라곤 차마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사실 그런 예쁜 여자 연예인이 준 연락처라면 받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싶어 저 혼자 속단을 내린 것도 있었다.
그런데 받자마자 버린 거였어? 받고선 말 안 했던 게 아니고?
근데 그것도 모르고 여태 난···.
“뭐야, 너 그래서 질투한 거야?”
뒤늦게 찾아드는 민망함에 뺨이 홧홧해져 옴을 느낀 순간, 그가 말했다.
“···어?”
“내가 걔 연락처 받아놓고 너한테 말 안 한 줄 알고?”
한 템포 늦은 순진한 반응에 피식 웃은 도하가 다시금 식탁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이며 다경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 쪽팔려···.’
이미 다 들켰다는 듯 장난스레 응시해오는 검은 눈동자 덕에 얼굴이 숨길 수도 없이 달아올라 왔다.
“지, 질투라기보단.”
“몰랐네, 우리 윤다경이 질투의 화신인 줄은.”
도하가 시치미 떼봤자 소용없다는 듯 짓궂게 중얼거렸다.
치, 이럴 거면 차라리 진즉에 연락처 받았는데 그냥 버렸다고 말이라도 좀 해주든가!
“뭐, 질투는 나만 해? 자기가 훨씬 심하면서.”
민망한 마음에 다경이 부러 볼멘소리를 뱉으며 복숭앗빛 뺨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난 그냥 그런 질투 정도가 아니지.”
도하가 부정하기는커녕 순순히 인정하며 다경의 턱 끝을 슥, 제게로 잡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