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마왕 생존기-9화 (9/544)

〈 9화 〉 마계 # 8

* * *

나는 카르티에게 연신 감사를 퍼부으면서 극한의 칭송을 시전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예 마족 음유시인으로 전직해서 카르티의 착한 마음씨를 널리 퍼트릴 노래를 짓고 싶을 정도였다.

구라 안치고 마왕 안 했으면 음유시인 했다.

이런 내 운명이 너무 저주스럽다!

음유시인의 꿈이여!

"카르티는 알고 있는 것이 정말 많아. 아마 궁전에서 카르티보다 똑똑한 마족은 없을걸? 다른 마족들은 책에 그렇게 큰 관심이 없거든."

카르티는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 하는듯했다. 정말 너무 순수하게 기뻐하면서 말을 하고 있으니 나마저도 마음이 치유되는 듯하다.

얼마 만에 경험하는 착한 사람이란 말인가.

남쪽 요새에서 병신처럼 지낼 때는 이렇게 말 붙일 사람도 없었다.

"흐흐흐, 그러게. 책도 보면 재밌는데. 근데 카르티. 진짜 도서관에 다들 마족들 없는 거 보니까 다들 확실히 책에 좀 관심이 없는 것 같기는 한데."

"한데?"

"이렇게 큰 도서관이 있는 거야?"

"아, 응. 그건."

카르티의 설명.

"도서관에 있는 책들은 전부 어머니 여공작님께서 직접 모으신 것들이야. 독서를 좋아하셨다고 해. 오랜 세월 동안 모아오셨으니 당연히 도서관이 커질 수밖에 없었던 거지. 다른 혈족들이 책을 안 읽는 거랑은 상관없어."

카르티는 조금 슬프다는 듯이 덧붙였다.

"...지금은 도서관에 오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엄마의 사랑에 목말라 있긴 한가 보다.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본능. 여공작 케라시스는 가히 암흑의 여신이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정신을 빼앗을 정도로 아찔한 몸매와, 마음을 뒤흔드는 향기... 그런 존재인데 심지어 우리들은 그녀의 알에서 탄생한 존재들이다. 당연히 어떤 본능 같은 것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ㅡ...

여공작에 대한 것을 떠올리니 정신이 어디론가 날아갈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카르티에게 집중했다.

"뭐, 그래도 카르티가 혼자서 독차지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응! 맞아! 도서관은 카르디꺼야! 저기 있는 사역마들 보이지?"

"저것들?"

ㅡ꾸물럭.

부정형의 슬라임 같은 시꺼먼 사역마가, 민달팽이처럼 책장을 기어오른다.

ㅡ파닥파닥.

날개짓을 하는 털뭉치가 촉수 비슷한 것을 뻗어 책장을 정리한다... 솔직히 말해서 징그럽고 무서웠다. 마수. 몬스터. 괴수. 진짜 영화나 게임. 만화에서나 보던 것들이다.

어떻게 저런 걸 다 조종하지.

"저 사역마들도 다 카르티가 만든 거야."

"아닛! 진짜?!"

그렇게 유능하다고?!

"응! 책에는 그런 지식들이 전부 담겨 있으니까. 아. 그런데 오빠도 책을 좋아한다고 했지. 혹시 무슨 책 읽었어? 응? 카르티 오빠랑 책 이야기하고 싶어."

책 이야기라.

당장 궁금한 것은 강림제나 마족. 힘을 키우는 법 등에 관한 것들이었지만 어차피 강림제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있는 편이다. 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다.

카르티랑 이야기할 시간은 조금 더 있을 터. 애초에 카르티가 일방적으로 내 편의를 봐주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 해야지.

"책이라... 남쪽요새에는 이렇게 큰 도서관이 없어서 많이 읽지는 못했어. 주로 교육에 쓰는 책 같은 걸 많이 읽었는데."

글자 공부를 하면서 참 많이도 봤다.

이게 내가 영어나 일본어 중국어를 배우는 게 아니라 쌩 다른 차원에서 듣도보도 못한 마계어를 익혀야 하다 보니 애로사항이 존나 많았다.

모든 단어. 말. 그 뜻을 하나하나를 전부 다 내가 해석하고 외워야 하는데, 알다시피 마족들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말을 잘 못하는 내게 신경을 써주는 일 따위는 없다. 메이드들도 날 무시하는 마당에 무슨 신경. 막혀도 딱히 물어볼 수 있는 곳도 없고, 궁금한 것이 있어도 누가 속 시원하게 한국어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전부 다 내가 악으로 깡으로 혼자 해야만 했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렸었지. 순수하게.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겨우 말하기 듣기 쓰기를 전부 다 제대로 할 줄 알게 되었다.

당연히 그러면서 교육에 있는 책들도 미친 듯이 탐독했던 것이다.

"흐응... 그러면 `지식을 얻는 수단으로서의 책`밖에 보지 못한 거네?"

"어. 그렇지. 왜? 다른 책이 있나?"

"당연히 있어. 이를테면 동화책이라던가, 소설책이라던가. 지식이 아닌 이야기들."

당연히 알고 있다.

"책의 근본은 지식이지만, 응. 그런 것도 좋아. 아! 그럼 읽어본 적이 없으니까 지금부터 읽으면 되겠네! 카르티가 `선정한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소설목록!` 그걸 추천해줄게!"

죽기 전에, 뭐?

ㅡ따악.

카르티가 손가락을 튕기자 저쪽에서 피막 날개를 펼치고 날아댕기던 플라잉 털뭉치들이 책장으로 다가가, 특유의 촉수를 뻗어 책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곧 놈들이 그것들을 일제히 가져왔고, 카르티는 염동력인가 뭔가를 이용해서 그 책들을 공중에 띄운 채 정리하며 내게 건네줬다. 진짜 미친 듯이 신기했다. 내가 마족이긴 한데 아직도 마법은 존나 신기하더라.

"자! 다 읽고 카르티한테 감상평 남겨줘! 독후감 써오면 카르티 더 기쁠 것 같아!"

감상평...?

"큘스오빠 못 돌아올 테니까, 강림제 전까지 꼭이야! 죽기 전에 꼭 봐야 해!"

"아니! 난 돌아올 생각인데! 안 죽는다고!"

우리 카르티 귀여운 얼굴로 나 죽는 걸 이미 상정하고 있었다!

"돌아온다고? 큘스오빠 마왕이 될 거야? 어려울 텐데. 그것도 중간계에서는."

일단 여공작은 날 몰래 빼내 준다고 했으니 말하지 말도록 하자.

"마왕이 아니어도...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 그리고 살아있으면 언젠가 돌아올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카르티. 도와줘. 난 살아남고 싶어."

"도와줄 거야. 애초에 그러기로 했으니까. 아무튼 책들은 다 읽어야 해? 죽기 전에 꼭이야."

"그래. 이것들은 다 읽어보마. 죽기 전에 꼭."

특별히 골라준 것인지 몇 권 되지는 않는다. 보니까 소설. 동화. 뭐 그런 것들이다. 마족들 동화 감각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는데 봐서 손해 볼 것은 없겠지. 죽기 전에 반드시 읽어주마.

"좋아! 그럼 카르티한테 궁금한 거 다 물어봐!"

"그, 강림제에 대해서는 대충 알거든? 이거 하는 의미가 있나?"

"의미는 있을 거라고 생각해."

"무슨 의미?"

"일단 첫 번째. 중간계와 통하는 차원 통로가 문제없이 작동하는지 확인할 수 있어. 끊긴 걸 복구하는 것보다 열려있는 걸 관리하는 편이 더 쉬우니까."

아니 그런 이유가?

그럼 나는 산제물을 넘어서 그냥 잘 되는지 시험 삼아 쏴보는 탄환이네? 마족 이 개새끼들!

"마계는 중간계에 거의 간섭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놔버린다면 결국 완전히 끊기게 될 거야. 그러니까 강림제를 주기적으로 여는 거겠지."

마냥 고리타분한 의식은 아니었군.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 안 한다고 했는데."

"그야 그렇겠지. 카르티도 별로 진지하게 생각 안 해. 카르티 생각에 강림제는 차원 통로 유지보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이런.

"사실 돌아오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커. 가는 건 그래도 할 수는 있지만 돌아오는 건 가는 것보다 더욱 어렵거든."

"어렵다고?! 그럼 나 못 와?!"

여공작이 나한테 구라를 친 것인가?!

"보통은 못 오는 게 정상이야, 큘스오빠. 응. 어려워. 가능은 하지만, 그 어려운 일에 굳이 마력을 사용할 마족은 없겠지."

일단 가능은 하네!

솔직히 여공작의 약속을 믿을 수는 없다. 그냥 그것밖에 없으니까 매달리고 있는 거지... 이거 진짜 존나 막막하구만. 아예 안된다면 몰라 된다고는 하니 그나마 안심이다. 아니. 안심보다는 일말의 희망에 불과하겠지만. 몰릴 대로 몰린 내가 뭘 하겠나. 이렇게라도 마음 잡아야지.

"그럼 그, 마왕은? 일단 명목상으로는 중간계로 내려간 마족이 마왕이 되길 기원하는 의식이잖아? 마왕은 무엇이고, 마왕이 되려면 뭘 해야 하지?"

"너무 포괄적인 질문이지만..."

ㅡ처억.

카르티가 가슴에 손을 얹었다.

"똑똑한 카르티는 다 알려줘! 마왕은 단순한 칭호라고 생각해. 강하고 세력이 큰 마족에게 붙는 칭호."

칭호.

"그리고 강림 의식에 참가한 마족이 해야 할 일은, 응. 그거네. 마족으로서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세력을 키우고 언젠가 있을 중간계에 침공의 기반을 마련하는 거야."

말하자면 전진기지를 세우는 것인가. 그것도 적대적인 종족만이 있는 세상에서 그런 기지를 세워야 한다. 확실히. 그게 가능하다면 그건 마왕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지원도 없이 유의미한 기반을 만들 수 있는 존재라면 뭐가 됐든 마왕이 맞다.

"기반이라... 그건 어떻게?"

"그거는 능력으로 어떻게든 해야 해. 음, 그래도 중간계에는 몬스터들이 있잖아? 강림제에 선택될 정도의 마족이라면 중간계에 있는 몬스터들을 지배하고 사역할 수 있을 테니까. 그쪽을 사용해보는 것도 좋겠네. 아니면 언데드..."

"뭐, 뭐?!"

"응?"

"몬스터를 지배한다고?!"

괴물들을 지배해?!

"아. 큘스오빠는 그것도 모르는 거구나. 하긴,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으니까. 지금도 엄청 약하고. 노예 수준이야. 모르는 게 당연해. 노예들은 전투지식이 없어."

아니 무섭게 왜 그런 말을 해!

"우리 혈족이고, 강림제에 선택될 정도로 출신이 괜찮다면... 당연히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 물론 중간계에서 몬스터 몇 마리를 사역한다고 해서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카르티! 알려줘! 어떻게 해야 몬스터를 지배할 수 있는겨?"

이건 아주 중요한 지식일 것이다!

중간계는 적대적인 종족으로 가득한 땅! 마계로부터의 보급도 뭣도 바랄 수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몬스터들을 지배할 수 있다면 작지만 세력을 구축할 수 있을 터! 거기부터 시작하면 된다!

"음... 당연한 말이지만 마족으로서 그런 능력을 발휘하려면 마력이 있어야 하는데."

"카르티! 난 마력이 거의 없어!"

"그러면 곤란해."

"제발! 뭐 없을까?! 아! 맞다! 그래! 마력 늘리는 법 좀 알려줘!"

내가 빌자 카르티가 한숨을 쉬었다!

마력!

마력이 중요하다!

"정말 큰일이야... 지금부터 시작해서 될 리가 없는데."

"제발! 뭐라도 좋아! 카르티! 이 오빠의 부탁이다! 마력 늘리는 법 좀 알려주세요!"

"물론 카르티는 똑똑하니까 다 알려줘!"

너무 똑똑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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