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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마왕 생존기-20화 (20/544)

〈 20화 〉 마왕 큘스, 강림하다! # 5

* * *

대충 명령 수행 실험은 다 끝났다.

이 정도면 데리고 다니면서 본격적인 일과를 시작해도 될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참 간지럽다. 혼자가 아니라는 게 이렇게나 기분 좋을 줄이야.

톰 행크스가 무인도에서 윌슨을 만났을 때 이런 기분이었겠지. 부릴이는 나의 윌슨이었다.

"가자, 부릴아."

"케륵?"

"열매 찾으러 가자고. 열매. 야 임마. 척하면 딱 눈치를 까야지. 이게 빠져가지고."

ㅡ터억.

그리 말하면서 머리에 손을 얹어주니.

"케륵케륵."

그런대로 좋아하는 것 같다.

아무튼 출발이다.

"고고!"

"케륵!"

나는 손도끼를 잡아든 채 부릴이와 함께 숲길을 걸었다. 보폭은 부릴이한테 맞췄다. 다리 길이 차이 때문에 금방 처질 것 같았으니까.

"후우."

혼자였을 때에 비해서 마음의 부담이 덜하다. 그땐 완전히 겁을 먹어가지고 사방을 다 경계했다. 심신 부담이 크다. 근데 지금은 부릴이가 있다.

부릴이는 이 동네의 토착 생명체.

그것도 코가 큰 코쟁이.

내 추정 상 녀석은 후각이 좋을 것이다. 당연히 그만큼 경계가 더 쉽겠지. 물론 완전히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지인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날 안심하게 한다.

"부릴아. 열매. 열매 찾자."

"캐륵?"

"그거. 입에 넣어서 먹은 거. 그거 찾자고."

부릴이와 눈을 맞춘 채 바디랭귀지까지 동원하며 명령을 내린다. 멍한 얼굴로 날 바라보던 부릴이가.

"케륵!"

돌연 크게 대답하더니 점프했다.

ㅡ처억!

그리고는 저쪽으로 고개를 돌려 턱짓인지 뭔지 불분명한 제스처를 취했다.

"케륵케륵! 케륵!"

"뭐? 저기로 가자고? 설마!"

열매가 있는 곳?!

"가자!"

"케륵!"

바로 부릴이와 함께 그쪽으로 뛰어가니, 과연!

"오오!"

초록빛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나무가 서 있었다!

"부릴이 이 새끼! 너 쓸모 있어! 어? 아주 쓸모 있다고! 존나 이쁘다!"

"케륵!"

신이 난 부릴이가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다. 저 새끼 나무도 오를 수 있었나? 하긴 뭐 원숭이들도 나무 타는데 부릴이도 탈 수 있겠지.

"케륵케륵!"

가지 위로 올라간 부릴이가 열매를 따기 시작했다.

"어! 여기로 던져! 여기로!"

바로 그 아래에 위치를 잡았고 자루를 펼쳤다. 부릴이는 이런 일을 한두번 해본 것이 아니라는양, 능숙하게 열매를 따서 내게 던졌다.

이 새끼 아마도 평소에 이렇게 살았을 것 같다.

뭐 열매 따고 뭐하면서 그렇게 살았겠지. 그러다가 뭐 싸움을 잘못해서 다치게 됐는데, 딱 그 와중에 나한테 잡힌 것 같았다. 그리고 지배를 당한 거겠고.

진짜 현지인 존나 쓸모 있다.

"근데 이건 무슨 맛이냐?"

ㅡ와삭.

열매를 베어 무니.

"아오, 이건 좀 쓰네."

살짝 쓰다.

혀가 민감해진 상태인지 아주 잘 느껴진다. 식감과 느낌은 푸석푸석한 사과 같구먼.

ㅡ와삭와삭.

나는 열매를 먹으면서 열매를 받아냈다. 그렇게 중간쯤 찼을 때.

"부릴아! 그만하고 내려오자!"

"케륵!"

부릴이를 다시 내려오게 했다.

"이야. 이거 니가 다 딴 거다. 이거면 배부르겠어. 진짜 잘했다."

"케르르릉."

다시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크게 좋아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고블린 역시 춤을 추는 모양이었다. 약간 개 비슷한가? 쓰다듬 받는 거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럼 자주 해줘야지.

"좋다! 이제 다른 열매 찾으러 가자!"

열매 좀 다양하게 채집하고. 그리고 다시 물가로 가서 수통도 좀 채우고 하면 될 것이다.

* * *

"푸후!"

처음으로 씻었다. 옷 다 벗고 계곡에 들어가서 살을 문지른다. 긴 귀도 빡빡 닦고, 이마 위쪽에 달린 두 개의 뿔 역시 뽀득뽀득 닦아준다.

진짜 시원하기 짝이 없었다.

또 상쾌했고.

다 부릴이가 있어서 할 수 있었던 일이다.

부릴이는 지금 바로 저 앞에 서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경계병 없이 씻을 수는 없는 법이다.

ㅡ촤학.

적당히 씻은 뒤에 나와서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이 작은 수건 역시 코트 속에 넣어뒀던 물건이었다. 챙겨오길 잘했다니까.

ㅡ스윽스윽.

머리는 적당히 털고 나서 팬티를 입었... 아니지. 팬티는 지금 빨아버릴까? 오늘만 노팬티로 지내면 내일은 깨끗한 팬티를 입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팬티를 빨았다. 그리고 노팬티로 바지를 입었다.

"자! 부릴이도 들어가서 씻어라!"

"케륵!"

바로 부릴이가 계곡 안으로 몸을 날렸다. 새끼. 좀 활동적이다. 마음에 든다. 수컷이라서 그런지 에너지가 넘치는군.

ㅡ촤학! 촤학!

고블린에게도 씻는다는 개념이 있기는 한 건지 놈도 자기 몸을 제법 잘 씻었다. 그렇게 다 씻고 나온 부릴이가 물에 빠진 개새끼마냥 몸을 털었다.

ㅡ촤르르륵!

사방으로 흩날리는 물.

"케륵케륵."

그리고 바로 내 옆으로 따라붙는다. 역시 야생이라 그런가? 수건으로 몸을 닦는다는 개념이 없군.

"그럼 돌아가자."

"케르륵."

자루를 챙기고 다시 걸었다.

이제 돌아가서 비트 구덩이를 좀 더 증축하다가 자면 되겠지. 먹을 게 풍부하니 마음 역시 풍요로워진다. 마력도 잘 회복될 것 같고, 이거 기반을 조금만 더 잡으면 아예 흑마법서 펼쳐두고 공부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흑마법 공부는 중요하다. 아직 배우지 못한 흑마법들이 굉장히 많았다. 당장 몬스터 지배술 하나만으로도 이렇게나 편리한데, 다른 거 다 배우면 엄청 편해지지 싶다.

물론 그래봐야 지금 책에 적힌 것은 전부 기초 수준이고 기초 수준을 벗어나면 어떻게 수련을 해야 할 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 사실이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 근력운동도 해야 되는데."

확실히.

마족으로서 무능한 탓에 마계에서 계속 운동만 했는데, 지금은 그게 상당히 쓸모가 있었다. 오히려 잘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육체 능력으로 오늘까지 잘 해왔으니까.

근데 여기 온 뒤로는 근력운동을 하질 못했다. 뭐 먹은 게 있어야 하든 말든 하지. 이거 단백질을 구할 수 있게 되면 다시 할 텐데...

ㅡ사락.

그 순간.

"케륵...!"

돌연 부릴이가 안절부절을 못하면서 정면을 응시했다. 몸이 떨리고 있었고, 다리는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자세를 잡고 있다.

뭐냐?

가 아니라!

"...!"

뭔가가... 있다!

있는 거다!

부릴이가 그걸 알아챈 거다!

적인가?!

도망칠 수 없다면 싸워야 한다. 그런 생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바로 손도끼를 겨누고, 언제든지 대처할 수 있도록 사방을 경계한다.

"음?"

ㅡ부르르...!

그런데 부릴이의 반응이 좀 묘했다. 이건 적을 보고 도망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마치 당장이라고 달려 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케르륵, 켁, 케르륵...!"

부릴이는 정면을 응시한 채 몸을 떨고 있는 중이다. 이거 적이 아닌 건가? 그렇다면?

ㅡ사냥감!

그래!

"사냥감...!"

이건 사냥감을 찾은 포식자의 행동이었다! 거기까지 판단한 나는 즉시 부릴이의 얼굴을 보면서 명령했다!

"가라! 부릴아! 가서 죽여!"

"케륵!!!"

ㅡ파앗!

부릴이 뛰었고.

나 역시 손도끼를 잡아 쥔 채 놈의 뒤를 따라 질주했다. 사냥감! 그것은 고기를 의미한다! 먹어야 해!

ㅡ파파팟!

"빨라."

부릴이의 속도는 제법 빠른 편이었다. 물론 내가 전력으로 달리면 추월하겠지만, 지금 부릴이는 상당히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는 중이다. 역시 야생의 몬스터. 약해 보이긴 해도 자기가 수행할 수 있는 일에 한해서는 스페셜리스트인 것이다.

사바나에서 매일 수도 없이 뒤져나가는 가젤들조차도 달리기에 있어서는 전문가들이다!

그리고.

"케르으으으으으으윽!"

부릴이가 포효했다.

놈이 포효하며 수풀 쪽을 덮친 순간.

"과아아악!"

기묘한 울음소리와 함께 수풀이 요동친다. 빠르게. 최대한 빠르게 부릴이를 지원해야 한다. 그 생각을 하면서 확인하니.

"과아아악! 과아아아악!"

"케르륵! 케륵케륵!"

부릴이가 웬 개만 한 크기의 도마뱀처럼 생긴 괴물의 등 뒤에 올라타 끌어안은 채 드잡이질을 하고 있었다!

"케륵! 케르르륵!"

사나운 울부짖음!

터져 나오는 공격성!

놈의 등을 끌어안은 부릴이가, 그 모가지를 물어뜯고, 함성을 토해낸다!

"오오!"

이것이 바로 몬스터!

이것이 바로 야생의 공격성...!

"케르르륵!"

"과아아악!"

하지만 적극적인 공격을 하는 게 아니라 제압을 하기 위해 끌어안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은 상태다!

이건 혼자서 사냥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

나랑 같이 사냥을 하려고 놈을 붙잡은 거다! 자기가 붙잡은 틈에 처치하라고, 부릴이는 지금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리자드를 잡았구나!"

"케륵케륵!"

"좋아! 잘 잡고 있어!"

리자드가 몸부림을 쳤지만 몸 구조상 자신의 등 뒤에 달라붙은 놈을 떼어내기란 어려워 보였고, 나는 그 순간을 노렸다.

"과아아아악!"

울부짖는 리자드의 머리통을 겨냥하고!

ㅡ쐐애애애액!

그대로 손도끼를 내리찍는다!

ㅡ콰직!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

뭉툭해진 손도끼의 날이 리자드의 대가리를 강타했다. 비늘이 박살 나면서 피가 튀어나온다. 물론 한 방으로 무력화되는 일 따위는 없다. 피가 끓어오른다. 죽을 때까지 때려야만 한다!

"죽어라! 죽어!"

"케르르륵!"

부릴이가 붙잡았고, 나는 하염없이 손도끼를 내리찍었다.

ㅡ콰직!

ㅡ콰직!

ㅡ콰직!

그러니 순식간이었다.

ㅡ부르르...!

리자드가 부르르 떨더니, 더 이상 발버둥을 치지 않았다. 그쯤 되니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인지 부릴이가 내려왔다.

"...이겼다."

"케륵."

전투에서.

이겼다.

"첫 사냥감을 획득했다...!"

전율.

환희.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긴장. 전투. 승리. 그 모든 극한의 감정들이 한 곳에 뭉쳐 믹스된다. 이겼다. 승리했다. 사냥감을 획득했다!

"고기!"

고기를 먹을 수 있다!

그 사실이 날 전율케 한다...!

"크아아아아아악!"

파티 사냥 굿이다!

"케르으으으윽!"

터져 나온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포효를 하자 부릴이가 신났다는 듯이 방방 뛰면서 추임새를 넣었다. 여전히도 죽어있는 리자드! 고기를 획득했다!

"집으로! 집으로 가져가자!"

"케륵!"

그리고 또한 기쁜 점은 부릴이가 내 명령을 아주 잘 따랐다는 점이었다.

놈은 지금 흥분했지만 절제를 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완전히 흥분해서 싸웠던 녀석이, 전투가 끝난 지금 죽은 사냥감을 바로 뜯어먹으려 하지 않고,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녀석은 완전히 지배된 것이다!

나에게!

"내가 바로 마왕이다! 몬스터를 지배하는 자! 큘스 벨라크루! 아니!"

김큘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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