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던전의 주인이 되다! # 4
* * *
그 목소리는 솔직히 말해서 아름다웠다. 더 가까운 곳에서 듣고 싶을 정도로 감미로운 목소리.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저 목소리조차도 그녀의 사냥 도구라는 것을.
홀려서 가까이 가면 살해당하고 말 것이다...!
"크윽!"
바로 도망을 치려고 했지만, 저번과 비슷하게 몸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땅에서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마법인지 요술인지 하는 걸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샤아, 샤아샤아."
드라이어드는 양팔을 뒤로 뺀 채, 상체를 살짝 숙여 자신의 젖가슴골을 내보이면서 내게 천천히 걸어왔다.
ㅡ출렁.
그러면서 상체에 바운스를 줘, 그 젖가슴을 일부러 흔들어댔다. 대체... 저런 동작은 어디서 배운 것이냐? 아무리 봐도 몬스터인데 저런 음란한 동작은 대체 어디서 배워온 것이지?
무슨 방울뱀이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본능적인 것일까?
본능적으로 저런 야한 몸짓을 터득하는 거냐?
ㅡ출렁.
ㅡ출렁.
최면을 걸듯 좌우로 흔들리는 젖가슴.
저 품에 안기고 싶다!
그런 생각이 뇌수를 휘감는다!
하지만 그래선 안 돼...!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부릴...!"
다행이다.
내 부하들이랑 같이 온 것이 아니라서. 이런 상황에서 다섯 마리를 전부 다 챙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혼자라서 더 편하다.
그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샤아아..."
노래를 부르듯, 말을 걸며 다가오는 그녀.
그 미소와 가슴골에 빨려 들어갈 것 같지만!
당장이라도 땅에 머리를 박는 타조마냥 저 가슴골 속에 머리를 쏙 넣고 싶었지만!
저번에 놈과 조우한 뒤에 대처법을 몇 개 생각해놓은 상태였다.
ㅡ콰직!
나는 즉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끅...!"
내 날카로운 송곳니가 입술에 박혀 들어가자, 돌아버릴 듯한 고통과 함께 비릿한 철분 맛이 느껴졌다...! 아프다! 자기 입술을 깨물어서 피를 내다니! 엄살이 아니라 존나 아파! 옛날에 나루토 따라 하겠답시고 손가락 물어뜯은 거랑 비슷한 수준의 고통이 느껴진다!
그러나 아픈 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ㅡ스윽.
발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샤, 샤아? 샤야샤아."
바로 그때, 드라이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더니 곧 걱정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좀 더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저 눈. 저 표정. 누가 보면 진짜로 걱정하는 줄 알겠구나, 이 예쁜 괴물!
"바, 발아...! 이 씨 발아! 조금만 더 움직여! 힘을 내라! 나의 발아!"
발이 무거워...!
조금만 더 움직이면 될 것 같은데, 드라이어드가 너무 가깝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마족브레스!!"
ㅡ화아아아아악!
정면에 불을 뿜었다!
"샤, 샤아아아?!"
그러자 드라이어드가 풀쩍 뛰어 백스텝을 시전했다, 좋다! 이제 좀 발이 수월하게 움직인다! 더 생각할 것도 없지! 즉시 도주다!
ㅡ파앗!
나는 바로 몸을 돌려 땅을 박차고 질주했다!
"우오오오!"
우선은 도망을 쳐야 해!
도망을 치면서 뒤를 돌아보니.
ㅡ스르륵.
드라이어드가 날 쫓아오고 있었다!
"저, 저리 가! 저리 가세요, 누나!"
야한 여자가 헐벗은 채로 날 쫓아온다는 사실은 몹시도 매력적인 것이었지만, 동시에 비현실적이기도 했다. 현실에 사는 사람은 결코 비현실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 그것도 이런 오지의 한복판에서라면!
ㅡ스르륵.
그녀는 여전히도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미행!"
그 생각이 나의 두뇌를 관통했다. 지금. 날 따라오고 있다. 그리고 드라이어드를 처음 본 곳은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이었다.
설마 거기서 날 보고.
먹이로 마킹하고.
날 찾아다녔던 걸까?
"미친 스토커!"
그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에서 짜 맞춰진다. 드라이어드가 날 쫓아오려고 한다면... 집 쪽으로 도망쳐선 안 돼. 부릴이와 내 부하들이 위험해진다. 적당히 교란을 해야만 해. 일단은 계곡까지만 튀자. 계곡만 있으면 집 위치를 파악할 수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달렸고.
다시 뒤를 확인했다.
ㅡ출렁출렁.
"아니!"
진짜 저 가슴!
드라이어드가 낭낭하게 뛰어오고 있었는데, 가슴이 워낙 커다래서 위아래로 마구잡이로 출렁이고 있었다! 진짜 저기로 뛰어들고 싶네!
이거 뭐 무슨 심해에서 살아가는 아귀냐?
심해의 작은 물고기들은 아귀의 초롱 빛에 홀려서 다가가고, 곧 잡아먹히게 된다. 지금 그 물고기들의 충동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아귀의 초롱불이 거유미녀로 보이면 시발 나 같아도 따라간다.
하지만 여기는 그 심해의 어두운 공간이 아니다. 어둠만 있는 곳이라면 기꺼이 가서 죽겠지만, 내겐 빛이 있어. 부릴이가 있단 말이다! 그리고 시발 카르티한테 돌아가겠다고 했잖아!
그러니 난 튀었고.
"허억... 허억!"
결국 계곡 쪽에 닿았다. 좋다. 계곡을 찾았으면 이제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 드라이어드를 교란해서 도망치며 우회하도록 하자.
"샤아, 샤아...? 샤아."
계속해서 날 따라오는 섹시한 드라이어드. 다행히도 달리기 속도는 나처럼 빠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
잠깐.
속도가 느리다고?
느리다면... 그렇게 강하지는 않은 건가? 아니. 아니다. 적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지구력이 단순 강함의 척도는 아니니까.
드라이어드는 사람을 유혹해서 가까이 오게 한 다음 끝장내는 몬스터가 분명하다. 빠르게 달릴 수 있었으면 유혹이란 수단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겠지. 아마 근접전에 강한 여자인 것 같은데, 아무튼. 바로 방향을 틀어 다시 움직였다.
ㅡ척척척.
이쯤 되니 페이스 조절이 가능해졌다. 터무니없이 야한 드라이어드는 여전히도 음란하게 젖가슴을 흔들어대면서 날 쫓아왔지만, 날 따라잡지는 못했다.
그때였다.
ㅡ스윽.
"케륵?"
순간 부릴이를 발견한 줄 알았다. 근데 아니었다. 다른 고블린 한 마리가 도도새의 내장을 뜯어먹고 있었다.
"어?"
"케, 케륵!"
내 덩치 때문일까. 경악을 한 고블린이 내장을 집어 던지고 존나게 뛰기 시작했다. 저 새끼. 어디로 튀는 거지? 자기 친구들 있는 곳을 튀는 걸까?
ㅡ스윽.
뒤를 보았다.
여전히도 날 따라오는 드라이어드.
"좋아!"
고블린 무리가 있다면 그걸 이용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다! 놈이 언제까지 날 따라올지 모르니까!
떼어내야 한다!
고블린들을 이용해서!
"우워어어어어어!"
"케룩!"
바로 함성을 내지르면서 고블린을 쫓아갔다. 고블린은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서 존나게 뛰어댔고, 그렇게!
"굴이다!"
고블린들의 굴로 추정되는 어떤 구덩이를 찾을 수 있었다!
"케륵! 케룩케룩!"
녀석이 다급하게 소리치면서 토굴 쪽으로 달려가자.
"케륵?"
"쿠르륵?"
"케릉?"
토굴 안쪽에서 고블린 무리들이 이게 대체 뭔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하나둘씩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온 녀석들이 나를 본 순간.
"케, 케륵!"
"케르르르르륵!"
"케릉!!!"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면서 사납게 소리쳤다, 그래!
바로 이거다!
자신들의 굴! 자신들의 집! 다른 곳이라면 도망쳤겠지만, 이곳은 놈들의 나와바리다! 결코 물러설 수가 없다! 물러설 수 없다면 싸우는 것이 바로 야생의 본능!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들의 나와바리에서 도망칠 수는 없어! 이건 단순히 생존의 문제다! 나와바리를 잃으면 죽는 것을 알기에 필사적으로 싸우려 한다!
고블린들의 그 본능을 이용한다!
"케르르륵!"
"케륵!"
곧 굴 안에서 고블린들이 우루루 나오면서 나를 향해 돌진을 해오기 시작했다!
"케륵!!"
투지에 찬 외침!
그리고 뿜어져 나오는 전투의 기세!
"크아아아아아아아아!"
나 역시 그에 화답하며 놈들을 향해 달려갔고. 녀석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진 타이밍에, 점프를 하는 척을 하면서.
ㅡ파앗!
몸을 옆으로 던졌다!
ㅡ부웅!
길게 느껴지는 부유감.
고블린들은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여전히도 직선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동시에 뒤를 보았다. 드라이어드는 여전히도 날 쫓아오고 있었고.
"샤아?!"
그것으로.
"케르르르륵!"
고블린들과 격돌하게 되었다.
ㅡ쿠웅!
고블린의 몸통 박치기가 작렬함과 동시에 드라이어드와 고블린이 뒤엉킨다. "케륵! 케륵!" 사나운 외침과, 터져 나오는 폭력성.
"요시!"
일이 아주 잘 풀렸다!
이것이 바로 이이제이!
오랑캐를 써서 오랑캐를 친다!
멍청한 고블린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드라이어드와 대적하게 되었고, 날 따라오던 드라이어드는 아예 곤경을... 어어?!
순간.
ㅡ촤학!
"케륵!"
드라이어드에게 몸통 박치기를 갈겼던 고블린이 날아갔다.
"어."
그 고블린의 몸통에는. 아주 선명한 손톱자국 네 개가 새겨져 있었다. 살과 근육을 찢어발기는 손톱에 긁혀서, 피를 터트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드라이어드는?
"...샤아."
아주 멋지게.
허공을 할퀴고 있는 그런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다. 얼굴에 음영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초록빛 안광만큼은 선명하다.
"케르으으으윽!"
"케룩!"
"쿠르륵!"
고블린들은 완전히 광란상태에 빠져서 드라이어드에게 돌진했고, 그렇게 몇 마리가 더 근접한 순간.
ㅡ촤학!
ㅡ촤학!
마치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드라이어드가 고블린들을 크게 할퀴었다.
ㅡ푸샥!
터져 나오는 피.
"케룩..."
날아가는 고블린들.
살인적인 손톱.
ㅡ처억!
드라이어드가 날아가던 고블린의 발목을 붙잡았고, 그대로 고블린을 강하게 당기더니.
녀석의 모가지를 물어뜯었다.
ㅡ푸후우욱!
"케르으으으으으으윽!!!"
비통한 절규.
ㅡ쿠당탕!
피맛을 본 드라이어드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고블린을 던져버렸다.
"케륵...!"
"케룩!"
"케르르릉!"
그제서야 겁에 질린 고블린들이 굴속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ㅡ뿌드득!
"케륵?!"
바닥에서 솟아난 덩굴들이 고블린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이미 나는 바닥을 기어서 도망치고 있었다. 도저히. 도저히 하반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일어설 수가 없다!
ㅡ촤하아악!
"케르으으으윽!"
"케륵!!"
살이 찢어지는 잔인한 소리와.
고블린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뒤쪽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후우, 후우! 후우!"
나는 훈련소 때 배웠던 포복을 그대로 실시하면서 땅을 기어 미친 듯이 도망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