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왕가슴 픽시들 # 2
* * *
픽시들의 생김새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멀리서 봤지만 인상은 확실하게 남아 있다. 키가 작지만 찌찌는 큰 여성들. 등 뒤에는 날개가 달려 있고, 나방 같은 화려한 더듬이가 무슨 머리띠처럼 달려 있었다.
그리고 실크로 된 옷을 입고 있었지.
얘들에겐 무슨 기술이 있을까? 뭐가 됐든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있는 녀석들이다. 이런 녀석들과는 대화를 나눠볼 필요가 있다.
"..."
근데 무슨 변태도 아니고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든다고 생각을 해버렸네. 이거 아무래도 마왕으로 지내다 보니까 사고방식이 좀 변한 것 같았다.
"마앙님?"
"어. 샤란아. 일단 한번 만나보자. 대화를 신청했다는 건 상대방이 나름 스윗하다는 증거니까. 얘기해서 나쁠 건 없어."
전령을 보냈다는 것부터가 문명적이다.
다짜고짜 싸우느니 말로 협상하는 게 낫지.
"샤아. 알았다에여. 그럼 바로 가여?"
"잠깐 준비 좀 하고 간다고 전해줄래?"
"네 마앙님."
바로 샤란이가 페어리랑 이야기를 하러 갔다. 페어리의 답변은 뭐 준비하고 와도 상관없다는 모양이었고.
그렇게 던전으로 돌아와서 장비템을 전부 둘렀다.
대화를 하러 가는 거긴 하지만 준비는 철저히 해야 한다. 함정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마앙님, 그거 다 입어여?"
"어. 그래도 무슨 일 있을지는 모르니까. 장비는 다 챙겨 입어야지."
저번에 인간 전사가 떨군 템들을 전부 착용한다. 거기에 검까지 다 챙겼다. 완벽해.
"부릴아. 너거들도 전부 창 챙겨라."
"케륵!"
"샤란이는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네 마앙님! 샤란이 마앙님 지킬게여!"
샤란이가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흐흐흐, 그래. 샤란이만 믿을게."
"샤아샤아."
그 마음이 너무 기특해 머리를 만져주니 엄청 좋아한다.
"그럼 출발하자."
던전에 남은 부하들에겐 대기 명령을 내리도록 했다. 그리고 바로 페어리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ㅡ뽈뽈뽈.
우리를 본 페어리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안내를 시작했다. 이건 경계심이 없는 건가? 아니면 그만큼 자신감이 있는다는 뜻? 내 장비랑 부하들을 보고 전혀 쫀 것 같지가 않다.
이건 가서 보면 알겠지.
아무튼 우리는 녀석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근데 샤란아. 원래 페어리랑도 대화가 돼?"
"그건 아니에여. 원래 페어리랑 대화 안된다에여. 그런데 저 페어리는 가능해여. 신기한 일이에여."
"쟤가 특이한 건가?"
픽시들이 부리는 페어리라 말을 할 수 있는 것?
"참 신기하단 말이지."
샤란이는 루미카랑도 능숙하게 대화를 했다. 둘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 이건 일종의 마법적인 작용일지도 모른다.
* * *
그렇게 한참 동안 걸어가고 있으니.
ㅡ사락.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오."
정글 속에 있는 작은 풀밭이었다. 주변엔 나무들이 울타리처럼 둘러져 있는 공간. 누구랑 마음 터 놓고 이야기하기 좋은 공간이다.
그리고.
"..."
"..."
"..."
그 중앙에는 세 마리의 픽시들이 서 있었다. 셋 다 무장을 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냥 팔짱을 낀 채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이쪽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앙님. 쟤들이에여. 찌찌 큰 암컷들. 픽시?"
"어. 그런 것 같네."
진짜 찌찌가 크긴 하군.
픽시의 수는 총 셋이었다. 중앙에 선 한 명은 금빛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고, 다른 둘에 비해서 프릴이 더 들어간 핑크색 실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정황상 저 녀석이 대장인 것 같은데... 픽시들 키는 전부 140cm 전후인 것 같았다.
뭐냐?
가슴에 비해 키 너무 작은 거 아니냐?
귀엽긴 한데 언밸런스하다.
"흠."
아무튼 무장을 하지는 않은 상태다. 대화를 하러 온 느낌을 풀풀 풍기고 있다. 보니까 주변에도 위험 요소는 없었고.
그럼 나도 맞춰 줘야지.
"부릴아. 잠깐 여기서 대기. 형이 부르면 뛰어와."
"케륵?"
"괜찮으니까."
"케륵."
부릴이는 두고 가도록 하자.
"샤란아. 같이 가자."
"네 마앙님."
바로 샤란이와 손을 잡고 픽시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래도 일단 허리에 찬 칼은 챙겼다. 놈들 마법 쓰는 것 같았으니까.
"..."
셋 중 중앙에 있는 금발의 픽시. 조금 건방져 보이는 눈매에 하늘색 눈동자를 지닌 녀석이다. 놈은 날 응시했지만, 뒤에 있는 갈색 머리의 픽시들은 마치 신기하다는 것처럼 샤란이를 바라보았다.
ㅡ처억.
그렇게 픽시들의 앞에 섰다.
키 차이가 제법 나서 내려다볼 수밖에 없구만... 아니 근데. 가슴 너무 큰 거 아니냐? 깊은 가슴골이 너무 대놓고 보인다.
"샤란아. 일단 인사 좀 하자. 내 이름은 큘스라고 전해줘. 대화의 장에 초대해줘서 고맙다는 말도 전해주고."
일단은 부드럽게 가보자.
초대를 해줬으면 응당 감사를 표해야 한다.
"샤아. 샤아샤아. 샤아아. 큐르스. 샤아. 샤아아."
바로 샤란이가 열심히 통역을 해 설명했다. 픽시들은 잠깐 놀란 듯이 반응했지만, 이내 샤란이의 말을 경청하는 듯했고, 그렇게 계속 이야기를 듣자.
"..."
눈을 살짝 크게 뜨면서 날 보았다... 흠. 적의 같은 건 없어 보이는 시선인데.
그러고 있으니.
픽시들이 샤란이에게 뭐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다. 곧 샤란이가 통역을 해줬다.
"마앙님. 금발 암컷이 자긴 세리뉴래여. 초대받아줘서 고맙대여."
"오. 그래? 역시 진심과 진심은 통한다니까."
씨익 웃으면서 세리뉴를 보았다.
"..."
세리뉴는 무표정인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좋다. 일단 언어 안 통하는 건 알겠다. 하지만 통역은 가능하다. 느낌이 좋군. 이대로면 평화적으로 대화할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ㅡ촤륵.
돌연 세리뉴가 밑에 있던 상자를 열고 그 안에서 무슨 두루마리를 꺼냈다.
ㅡ촤륵.
그러더니 두루마리를 펼쳐 내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뭐여?"
이 새끼 지금 뭘?
그 순간.
ㅡ화아악!
두루마리에 쓰여 있는 문자에서 녹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런 씹!"
설마 함정인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런 판단이 든 나는 즉시 비명을 터트리며 우측으로 몸을 던졌다! 갑자기 공격을 하다니! 싸워야 하나? 아니면 도망쳐야 하나? 칼을 뽑으려 하면서 샤란이의 상태를 확인했는데.
"마, 마앙님. 공격하는 거 아니래여."
샤란이가 당황한 얼굴로 날 보면서 그런 말을 했다.
"뭐라고? 공격이 아니야?"
"네 마앙님. 뭐 한다? 샤아샤아 한다고 잠깐만 가만히 있어 달래여. 일어나세여."
뭐야.
공격이 아니었어?
"아 시발."
그럼 괜히 몸 던진 건가?
머쓱해져서 뒷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니.
"후, 후후훗...!"
"푸훗!"
갈색머리 픽시들 두 명이 웃고 있었고.
"풉."
세리뉴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이런."
아 시발 이건 좀 쪽팔린데. 냉정하게 따져보자면 나보다 키가 훨씬 작은 여자애들 앞에서 몸개그를 날린 꼴이었다.
아니, 그보다. 이 새끼들 뭘 웃고 있는 거냐.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이 픽시들이 배려 없이 행동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아, 아무튼! 샤란아. 뭐 하겠대? 다시 물어봐 줘."
"네 마앙님."
바로 샤란이가 통역을 실시했다.
"샤야... 마앙님? 말 통한다? 말 통한다 한대여."
"말이 통해?"
그게 뭔 소리야.
설마?
ㅡ화아악!
순간 두루마리에서 다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뿜어져 나온 빛이 내 눈에 새겨지는 듯했다. 뭐지? 내 주변은 이미 빛에 휩싸인 상태였다. 보니까 무슨 그림인지 문자 같은 것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ㅡ파앗.
문자를 향해 손을 뻗으려던 순간, 그 모든 것들이 착각이었다는 듯이 사라졌다.
"어."
마치 현실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
"아, 아. 이제 들려?"
"뭐? 아닛?!"
이게 뭐야 씨발!
픽시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잠깐! 대화가 된다고?!"
"방금 언어의 축복을 걸었으니까."
"언어의 축복?!"
"숲의 마법인데, 역시 모르나 보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렇게 신기한 일이 있을 수가 있다니!"
이건 몹시 놀라웠다! 인간으로 따지면 한국인이 갑자기 러시아어를 깨우친 격이 아닌가! 역시! 방금 그건 통역 마법인지 뭔지 그 비슷한 것이었군!
신기하긴 했다! 샤란이가 루미카나 페어리랑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일종의 마법적인 언어로 대화를 하고 있는 거라고 추측했는데, 아무래도 그 추측이 맞았던 모양이다!
"별로 신기한 일은 아닌데?"
놀라워하고 있으니 세리뉴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그리 말했다. 약간 찬물 끼얹는 듯한 태도다.
"그래서 너."
"뭐?"
"먼저 물어볼 게 있는데, 너 누구야? 어디에서 왔어?"
어디에서 왔냐니.
"넌 인간이랑 닮은 점이 있지만 인간이 아니야."
"그건 너희도 마찬가지 아닌가? 너희도 인간 닮았잖아."
"인간이 우리 숲의 종족을 닮은 거지."
숲의 종족?
"아무튼 너는 처음 보는 종족이야. 너 어디에서 왔어? 앞으로도 이 숲에서 살아가려면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걸."
이건 협박인가.
생기건 귀여운데 영 싸가지가 없는 태도다.
근데.
ㅡ출렁.
막 팔짱을 꼈다 말았다 하고 있으니... 그 커다란 젖가슴이 막 출렁인다. 브라를 안 차고 그 위에 옷을 입은 상태라서 그런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본인은 신경을 안 쓰는 모양이다.
"이거 협박하는 거냐?"
"협박? 무슨 소리야? 물어보는 말에 대답해."
"나는 저기 다른 동네에서 왔다. 내 입장에선 너희도 처음 보는 종족인데."
"다른 동네라면 어디?"
이 새끼 집요하구만.
ㅡ처억.
나는 적당히 아무 곳이나 방향을 가리켰다. 날 처음 본다는데 마족이니 뭐니 하는 건 당장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적당히만 대답하자.
"...!"
근데.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을 본 세리뉴가 눈을 크게 떴다.
왜.
뭐.
"역시. 그런 거야?"
"뭘?"
"저쪽에서 왔다니... 우리 생각이 맞았네."
"무슨 생각?"
그리 물으니.
ㅡ처억.
녀석이 내게 삿대질을 하며 단정하듯 말했다.
"너. 그 불길한 빛의 기둥과 관련이 있는 녀석이지?"
"불길한 빛의 기둥?"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샤란이랑 루미카랑 안방에서 놀고 있을 때 무슨 유성이 떨어지는 것마냥 세상이 한번 확 밝아졌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가서 보니까... 저 멀리에서 무슨 빛줄기랑 빛기둥이랑. 그런 게 나타났었지.
"지금 그것 때문에 숲이 혼란스러워. 다들 불길한 징조라며 불안해하고, 서로 의심해서 싸우고 있어."
"아니 잠깐만."
"알고 있는 게 있다면 말해줘."
나 관련 없는데.
"나 그거랑 관련 없는데. 나도 그게 뭔지 몰라."
"...말하기 싫은 거야? 좋아. 다 말하긴 싫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
"큘스라고 했지? 난 세리뉴야. 보아하니 이 지역에 이사를 온 것 같은데, 쓸데없이 서로 싸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아니라니까 그러네.
"우리 구역만 안 건드리면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쓸데없이 우리 구역을 건든다면... 좋은 꼴 못 볼걸?"
공격적인 태도로 경고하는 세리뉴.
뭐 됐다.
태도야 어찌 됐건 날 불러낸 이유는 불가침 조약을 맺기 위함이었군.
"그러니까 서로 간섭하지 말자는 거지?"
"그거야. 우리는 다른 종족과는 달리 말이 통해. 그럼 말로 해결해야지. 싸울 필요 없어."
"뭐, 좋다. 쓸데없이 싸울 필요는 없으니까. 동의해."
"잘 생각했어."
ㅡ끄덕끄덕.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세리뉴.
"우리도 너희 구역을 건드리지 않을게."
"그거 고맙구만."
"그런데 드라이어드는 어떻게 길들인 거야?"
길들인다라?
불가침 조약이 성공적으로 성사되었기 때문일까? 세리뉴가 갑자기 거리감을 좁혀오면서 그런 질문을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