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화 〉 내정 # 4
* * *
"잘했습니다, 네크리! 아주 잘했어요!"
"하, 하하하... 네. 감사해요."
"피리 아주 잘 불더군요! 구라를 그렇게 잘 치다니!"
"그냥 배운 대로 한 것뿐인데요, 뭘."
네크리가 쑥스럽다는 듯이 뒤통수를 긁적이면서 웃었다.
역시 다크엘프들 지도자 짬밥이 어디 안 가지. 네크리는 실로 훌륭하게 피리 묘기를 선보여주면서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흐흐흐, 다들 아주 좋아했습니다."
사실 피리 따위는 그냥 구라에 불과했다. 네크리는 내가 알려준 대로 적당히 불었을 뿐이고, 몬스터들은 훈련받은 대로 움직였을 뿐이니까.
근데 인간들의 눈에는 그것이 묘기처럼 보였나 보다.
피리로 몬스터를 조종하는 신비한 다크엘프들의 묘기. 피리에 홀린 몬스터들이 절도있게 움직이는 장면은 내가 인간이었어도 신기해했을 것이다.
뭐 이걸로 대충 몬스터에 대한 의혹은 풀었다. 신비한 공연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지. 이제 다크엘프들이 몬스터를 끌고 다녀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정도 절제는 필요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자연스러움'을 쌓아가는 것이다.
"그럼 내일 당장 행진을 하는 건가요?"
"네. 내일도 뭐. 그 옷 입고 피리 불면서 움직이면 됩니다. 어차피 행군에는 도가 튼 애들이니 알아서 잘할테고요."
"그건 그렇네요. 단체로 행진이라니. 기대돼요."
"행군하면서 주변 좀 잘 둘러보십시오. 그런 식으로 도시에 녹아들어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겁니다."
"후후후, 알겠어요."
즐거워 보이는 게 눈에 보인다. 다크엘프들도 더 큰 세상으로 나와서 즐거워하는 중이었다.
그럼 뭐 내일 행진할 준비 좀 시켜볼까.
바로 부릴이를 찾아 고블린 생활관으로 향했다.
"야! 부릴아!"
"뫙님?! 케루룽!"
자리에 누워서 바게트빵을 뜯어 먹으며 배를 긁적이던 부릴이가 날 보고 튀어 올랐다. 옆에 있던 다른 고블린들도 오목판을 옆으로 치우고 일어섰다.
"야. 하던 거 마저 해. 부릴이만 일로 오고."
"네! 뫙님!"
"흐흐흐, 부릴아. 애들 연기 잘하던데? 인간들이 아주 그냥 다 속아 넘어갔다."
"케륵케륵. 당연한 일임다. 저희 고블린들에겐 몹시 쉬운 임무였슴다!"
아주 당당하게 소리치는 부릴이.
"케륵! 그렇습니다!"
다른 고블린들 역시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뫙님. 뭔가 신기함다. 인간들이 우리를 보면서 그렇게 함성을 내지르다니. 케륵. 별것도 아닌 놈들이 그런다고 생각하니까 좀 오묘함다."
"흐흐흐, 그러냐?"
인간들의 호의적인 시선을 보고 뭔가가 좀 느껴졌을까?
"아무튼 부릴아. 내일 바로 행진할 건데. 잘 할 수 있지?"
"케륵! 그냥 도시 행군하면서 구경하면 되는 거 아님까? 잘할 수 있슴다! 그리고 기대됨다! 인간 녀석들 도시 많이 궁금했는데, 이제 대놓고 볼 수 있는 거 아님까!"
"그래. 그러려고 하는 행진이다. 쭉 돌면서 주변 좀 잘 둘러봐라. 인간들의 도시가 어떤 건지 잘 봐야지."
"케루룽!"
아주 그냥 신이 났다.
"근데 이 새끼들 오목 왤케 좋아해."
"뫙님. 이거 개재밌슴다. 케륵."
"부릴님만 맨날 이기니까 재밌는 겁니다! 케륵!"
"맞습니다! 우리 지능 좀 딸려서 못 이깁니다! 케륵!"
부릴이의 말에 고블린들이 아우성을 친다. 아무래도 지능이 제일 높다 보니까 다른 애들을 바르는 모양.
"케룩케륵. 오목 더 많이 해라. 너희들은 두뇌 발달이 필요하다."
"케륵!"
보드게임 참 좋아한다니까.
"야. 너희들 체스도 해볼래?"
"체스말임까?"
체스 비슷한 것은 있지만 지구식 체스랑 동일한 게임은 없었다. 마침 뭐 여건도 되겠다, 한번 체스를 만들어서 보급해보도록 하자.
* * *
다음날.
우리들은 행진을 실시했다.
물론 전원이 다 한 것은 아니었다. 하반신이 뱀이라서 좀 충격적으로 느껴지는 라미아들은 성내 대기고. 한 번에 너무 많은 수를 보여주면 안 되기 때문에 각 몬스터 병력의 5할 정도 역시 성내 대기다.
하지만 천사들과 픽시들은 전원 참여했지.
ㅡ삐리리릴.
아무튼 네크리가 피리를 불었고.
ㅡ척척척.
ㅡ척척척.
ㅡ척척척.
내 병사들은 발을 맞춰서 네크리를 따랐다. 그런 몬스터 병사들의 뒤로 다크엘프들과 천사들이 뒤따른다.
ㅡ부우웅!
하늘에서는 픽시들이 날고 있었고.
"케륵케륵."
"케루룽."
다들 신기하다는 듯이 도시를 둘러보는 중이다. 내 양옆에 있는 샤란이와 루미카도 후드를 눌러쓴 채 고개를 돌렸고.
"샤아. 마앙님. 인간들 많다에여."
"그러게... 역시. 창밖으로 보던 것과는 달라. 이런 돌로 둘러싸인 도시라니. 너무 신기해."
"샤아."
"어때? 정글이랑 비교하면?"
"나쁘지 않다에여."
"응. 나도 괜찮아. 이런 곳도 나쁘지 않네."
대체적으로 호평이다.
오길 잘했다니까.
뭐 그렇게 행진을 하고 있으니.
"오오...!"
"세상에!"
"마치 동화 같아!"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다들 좀 떨어진 곳에 서서 이 몬스터 병사들의 행군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뭐 당연히 내 병사들은 비무장 상태였다. 그냥 티셔츠랑 반바지만을 입었을 뿐이지. 그 모습이 퍽이나 귀엽게 보였는지, 도처에 있는 애들도 좋아하고 있었다.
ㅡ부웅!
"꺄하하하핫!"
"야호!"
그런 와중에 하늘에서 픽시들이 신나게 웃어재끼고 있는데 당연히 텐션은 업.
바로 그때.
"와! 저 누나들 찌찌 짱커!"
"그러게!"
"왕쭈쭈야!"
어떤 소년들이 픽시들을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흐흐흐, 저놈들 저거."
저거 크게 될 녀석들이로군.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후... 꼬맹이가 참."
뒤에서 따라오던 레이카 역시 웃었다.
"흠."
근데 이게 바로 영주의 마음인가? 사실 영지를 홀라당 빼앗은 것에 불과했지만, 저기서 웃는 사람들이 다 내 영지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좋아하고 아끼게 된다.
그래. 저렇게 잘 따라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세계 정복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힘차게 가라!"
"케륵!"
내 외침에 네크리가 조금 더 강하게 피리를 불었다.
오늘의 행진은 대성공이었다.
* * *
예로부터 군주들은 시민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병사들을 즐겁게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로마의 황제들이 그러했지.
물론 사회가 발전하면서 병사들을 즐겁게 해주는 지도자들은 사라졌지만, 요는 그거다.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 마음을 얻기 위해선 즐겁게 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오늘! 다들 나갔다 오느라 수고 많았다! 그리고 다들 나가서 노는데 집에서 대기만 하던 녀석들도 고생 많았고!"
ㅡ처억!
술잔을 치켜들면서 소리친다.
"대기한 녀석들은 다음에 나가게 해줄 테니 그날만 기다려라! 마찬가지로 라미아들도 조금만 더 참자! 알겠지!"
"케륵!"
"알겠습니다...! 캬학!"
"끄르륵! 즐거웟따!"
축사는 이 정도면 됐고.
"그럼 먹어라!"
바로 취식을 명령했다.
ㅡ케랴아아악!
ㅡ규사아악!
ㅡ끄르르륵!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내 부하들이 식판에 놓인 튀김요리며 빵들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계란물과 밀가루를 입힌 고기튀김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었으며, 빵과 치즈는 천상의 진미였다.
"케륵! 너무 맛있슴다!"
"튀김이 최고다! 캬학!"
라미아들 역시 튀김을 먹으면서 즐거워했다. 몸에 에너지가 많은 만큼 기름진 튀김을 좋아하는 것이다.
"큐싸아아아아앗! 너무 마싯슴니다!"
잘 먹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정말 좋다. 인간들의 요리는 내 부하들의 입맛을 완전히 사로잡아버렸다.
근데 이렇게 만찬을 즐기면 돈이 좀 많이 깨지긴 해. 그래도 남작성에는 아직 쌓인 재산이 제법 많이 있었다.
"하지만 필수 지출이지."
내 병사들한테 파티 한번 못 열어줘서야 그걸 군주라고 할 수 있겠나? 이런 즐거운 시간은 정기적으로 가져야 하는 법이었다.
"후후후, 다들 즐거워 보이는구나."
"절로 가슴이 훈훈해지는군. 식구라는 말이 정말 실감되는 중이다."
성녀와 바네사가 그런 말을 했다. 그녀들이 보기에도 퍽 아름다운 광경이었던 모양이다.
뭐 애들이 식사 예절을 배우지 못해서 좀 게걸스럽게 먹고 있긴 한데, 맨날 봐오던 거라 상관은 없고. 훈훈하다는 게 제일 중요하지.
"샤아! 마앙님! 다 같이 먹으니까 너무 즐겁다에여!"
"흐흐흐, 그렇지? 나도 즐겁다. 샤란아."
"샤아샤아!"
즐거운 분위기에 흥분한 샤란이도 튀김을 와구와구 먹으면서 기뻐했다. 이 사랑스러운 여자를 봤나. 진짜 튀김이 만능이라니까. 다 좋아해.
"마왕과 그의 몬스터 군대가 이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이라니. 참 많은 생각이 드네요."
"레아님도 너무 그러지 마시고 가서 좀 드세요."
"여기서 먹을 건데요."
"몬스터들이랑 같이 먹으라고요."
"성녀님 옆에서 먹을 거니 신경 쓰지 마시길."
여전히 까칠하다니까.
아무튼.
이런 회식으로 결속력을 다지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내정은 대충 마무리가 되었다. 성은 완전히 장악했고, 영지 역시 내 손으로 떨어졌다. 몬스터 역시 납득 시켰다. 사람들은 성녀를 칭송하는 중이지.
이제 남은 것은 싸우는 것뿐이다.
앞으로 나는 내 부하들과 함께 '진짜 군대'와 싸워야 할 것이다. 결코 방심하는 일이 없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진짜 군대와 혈전을 벌여야 한다.
우리의 정체를 노출 시킬 일이 없는 정글전과는 다르다. 적들은 대비할 것이고, 우리에 대해서 아는 이상 유효한 작전을 만들어 올 것이다.
그런 놈들과 싸우기 위해선... 결속력이 필요해.
"크으."
그리 생각을 하면서 술을 마셨다. 남작이 모아둔 술이 제법 달다. 이게 진짜 좋다니까.
"후우."
뭐 그리 음주를 좀 즐기다가 바람을 쐴 겸 위층으로 올라와서 창문 앞에 섰다.
ㅡ파닥파닥.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이블아이가 날아들었다.
"큘스오빠!"
"어. 카르티. 오늘은 또 무슨 뉴스를 가져왔어?"
"이젠 완전히 뉴스쟁이 취급이네! 아무튼 큘스오빠! 괜찮은 정보를 물어왔어!"
"오오, 뭔데?"
"옆에 다른 군주의 영지가 있는 건 알고 있지?"
당연히 알고 있다.
그리고 그쪽 영지와 영지전을 하네 마네 할 정도로 사이가 나쁘다는 것 또한 알고 있지.
"어. 아는데 왜."
"놈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이런."
이젠 이웃 영주와 싸울 차례인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