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화 〉 영지전 # 1
* * *
남작, 헬슨은 시종의 보고를 들으면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흐음."
옆 영지 권력 구도에 변화가 생겼다. 피켈 남작은 완전히 은거했고, 그 자리에 웬 여신교의 성녀가 똬리를 틀었다.
"이상한 일이로군."
헬슨 남작은 피켈 남작과 사이가 좋지 않다. 아니. 좋지 않은 것을 넘어서 서로 앙숙이라고 할 수 있다. 영지가 맞닿아 있는 만큼 각종 이권 문제가 얽힐 일이 많았기에 여태까지 크고 작은 영지전을 몇 번이나 벌여왔을 정도니까.
따라서 둘 다 서로에 대한 생각은 동일하다.
언제가 찍어 누르고 모든 것을 빼앗아야 할 존재. 둘의 관계는 예전부터 그러했다. 말 그대로 국경을 맞댄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한 일이야."
그렇기에 헬슨 남작은 피켈 남작의 실패가 기꺼웠다... 분명 저번에 몬스터 토벌을 하러 갔다가 군대를 크게 잃었다고 했지.
그런 것이 반복된바, 피켈 남작은 군대를 거의 다 잃고 말았다. 부대가 전멸을 당한 것이다.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조만간 영지전을 걸고 피켈 남작을 무릎 꿇리려고 했는데, 갑자기 천사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들려와서 잠시 보류를 했을 뿐이다.
"성녀라."
그런데 갑자기 성녀가 나타나다니?
남작의 신변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이번 일을 알아보라고 지시한 것이다.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피켈 남작령에 들어왔던 천사들이 내분을 일으켰다는 것과, 그로 인해 피켈 남작의 군대가 전멸했다는 것.
그런 상황에서 귀환한 천사들은 성녀를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하며, 반천사 연합군을 만들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복잡하군."
헬슨은 계산을 시작했다.
아직 그는 천사 쪽에 붙을지, 아니면 반천사파쪽에 붙을지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변방에 있는 만큼 선택을 유보해도 큰 피해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피켈 남작은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고, 그 성을 성녀가 차지했다. 그곳에 똬리를 튼 채 연설 등을 하면서 영지민들의 마음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성녀는 지금 자신의 세력을 불릴 생각인 것이다.
헬슨은 판단했다.
지금 여기서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면, 성장한 성녀 세력에게 밀릴 가능성이 크다고. 성녀라는 이름에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천사를 타도하겠는 가치를 내세웠으니, 자연스럽게 세력이 모일 수밖에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결코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뭐가 됐든 이웃 영지의 영주가 강해지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므로.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인 법이다.
"지금이라면."
현재 성녀는 세력을 키우고 있는 상황이다. 달리 말해 아직은 약하다고 할 수 있다. 피켈 남작의 군대 수백 명이 전멸한 상황이니 복구하는 것은 몹시 어렵겠지.
아무리 성녀라고 해도 없는 군대를 갑자기 만들어낼 수는 없다.
당연히 이런 성녀와 동맹을 맺을 수도 있지만, 그건 하책이다. 이제 막 성장을 하려는 지금이라면 동맹을 할 것도 없이 아예 그쪽을 먹어 치울 수도 있을 테니까. 약한 상태의 적에게 내밀 손은 오직 무기가 들려있는 손뿐인 것이다.
그렇게 성녀를 손에 넣는다면... 천사파든 반천사파든 이쪽을 탐낼 것이 분명하다. 그런 상황에서 생겨날 각종 이권들을 상상하니 절로 장밋빛 미래가 그려진다.
"영지전을 준비해야겠군."
"하오나 남작님. 그쪽에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닌 천사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천사들이 몇 명 있다고 했던가?
딱히 걱정할 수준은 아니다. 애초에 천사 몇 명으로 전쟁을 할 수 있었다면 이 세상은 진작에 천사들의 손에 떨어졌을 테니까.
지금 중앙 쪽에서는 천사 세력과 반천사 세력이 박 터지게 싸우는 중이다. 그 사실이 천사들 개개인의 전투력을 증명한다.
천사들 개개인에겐 전황을 바꿀 능력이 없다.
"천사들이 강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소수라면 전황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개개인 아무리 강해봤자 전쟁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기사와 마법사들을 보라. 그들은 강력하지만, 혼자서 군대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사들 역시 마찬가지일 터다.
물론 헬슨도 피켈 남작의 군대가 천사들과의 격전에서 전멸했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미개척 지대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일이다.
애초에 천사들이 더 많다고도 했고.
정글 지대에서 날 수 있는 존재와 싸운다면 당연히 어렵겠지. 그 정도 생각은 할 수 있다. 거기에 지상에는 몬스터들도 있지 않은가. 그런 요소들이 섞인 결과 전멸을 한 것이다. 딱히 천사들이 혼자서 전설적인 마법을 부려 군대를 처치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전쟁 준비를 시작하라. 나의 투구를 꺼내야겠구나."
헬슨에겐 자랑스러운 기병대와 엄정한 군기를 지닌 보병대가 있다. 군대를 잃은 피켈 남작이 실각하고 웬 성녀가 그쪽 땅을 차지한 지금이 기회다.
그곳을 집어삼키고 성녀를 수중에 넣는다면, 앞으로 더욱 크게 확대될 천사와 반천사파 사이의 대립에서 아주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대귀족이 되는 것도 꿈은 아니지."
예로부터 유능한 귀족들은 이러한 위기를 적극 활용해 큰 세력을 일구었다. 지금 왕국에 있는 백작이니 뭐니 하는 녀석들도 다 이런 시련을 겪고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제 그것이 자신의 차례라는 것이 기꺼울 뿐이다.
* * *
"뻔해. 어차피 군대도 전멸했겠다. 이번 기회에 먹어 치울 생각이겠지. 그렇지 않습니까? 성녀님?"
"아아, 물론이니라. 오히려 공격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상태지 않느냐."
내 말에 성녀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남작령을 치고 이 성녀를 사로잡는다면, 헬슨 남작은 아주 큰 이득을 얻게 될 것이니라."
그렇다.
"지금 내겐 그만한 가치가 있느니라. 천사파와 반천사파 양쪽 다 탐내는 존재이니 떨어질 콩고물이 많지."
지금 성녀는 꿀단지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주인이 없는 것 같은 연약한 꿀단지.
이권에 있는 곳에 전쟁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조건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탐스러운 것이 저기에 있고 빼앗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어떤 군주가 무시를 하겠는가.
이걸 무시할 수 있다면 애초부터 군주가 될 수 없는 놈이다.
"말 그대로 꿀단지라고 할 수 있겠군요. 성녀님."
"후후후, 발정 난 사내들에게 노려지는 성녀라니. 음란한 상상이 끊이지 않느니라!"
"씁."
"물론 이 성녀를 취할 수 있는 것은 그대뿐이니라. 어디. 이 어미를 지켜주지 않겠느냐? 다른 사내들에게 납치를 당해 좋을 대로 굴려질 생각을 하니 구역질이 날 지경이니라."
"흐흐흐, 당연히 지켜드려야지요."
성녀를 지켜야 한다.
그녀는 내게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존재니까.
"후후후, 고맙구나. 그대에겐 이 성녀를 지킬 능력이 있느니라. 아아, 이 어미는 어디까지나 그대만의 성노예지 결코 다른"
"조용. 조용히 좀 하시죠. 성녀님. 회의 중에 추파 던지지 맙시다."
"아아, 레이카."
레이카가 폭주하려는 성녀를 제지했다. 나이스.
"야. 그래서 이길 수는 있겠냐? 이거 좀 심각한 일인데."
레이카가 날 보면서 말한다.
"너한테 장군 같은 재능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여긴 정글이 아니야. 그리고 인간 병사들 역시 거의 없는 상태고. 하지만 헬슨이 작정하고 쳐들어온다면."
레이카의 말을.
"수백의 병사가 밀려들어 오겠지."
바네사가 받는다.
"그것도 기병을 포함한 군대다. 그 공세를 막을 수 있겠나? 객관적으로 봤을 때 우리 군사의 수는 많지 않아. 수성에 집중한다고 해도 버겁겠지."
아주 합당한 말이다.
"예. 다 알고 있습니다."
다 알고 있는 상황이다. 나는 내 식구들을 이끄는 마왕이다. 당연히 여기에 오면서 그런 상상은 다 해놨다.
"위엄하겠지요. 안 위험한 전쟁은 없습니다. 하지만 헬슨 남작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아직 우리의 전투력이 어떤지 전혀 모릅니다."
"맞는 말이다."
"그러니 그걸 적극 활용해야지요."
사실 최근에 알게 된 아주 유용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어쩌면 이번 전쟁에서 그걸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무조건 쳐들어온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이건 저였어도 쳐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자, 여기. 지도를 보시면 알겠지만. 바네사님? 여기. 이 산맥이 영지를 양분중이지 않습니까?"
"그렇다. 이 작은 산맥이 국경 역할을 하지."
바로 군사 회의를 실시했다.
놈들의 침투 경로를 읽고, 영지를 둘러싼 산맥이라는 지형을 이용한다.
* * *
회의를 마친 뒤.
나는 저번에 알게 된 유용한 사실을 점검하기 위해 쥬리아를 찾아왔다.
"쥬리아님. 기쁜 소식입니다."
"네엣?!"
"슬슬 전쟁을 할 때가 됐습니다."
"아아...! 전쟁! 더 많은 전쟁! 이번에 저희가 나설 무대는 어디죠!"
"당연히 인간 세상입니다!"
그 말에 쥬리아가 크게 기뻐했다.
라미아들은 전쟁을 원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타고난 전사들이고 사냥꾼들이다. 피를 보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는 종족이지.
"그 전에 적 기병대를 상대할 수 있을지 없을지 다시 시험을 해 볼 생각인데."
"아아, 말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로군요."
"네."
"문제없습니다. 이미 다 확인했으니까요. 가서 한번 보시죠. 마왕님."
"흐흐흐, 알겠습니다."
나는 바로 쥬리아와 다른 라미아 몇 명을 이끌고 마굿간으로 향했다. 그렇게 마구간에 도착하 순간.
"히, 히히히힣!"
"히히히힣!"
"히이이이이잉!"
묶인 말들이 발작을 일으킨다.
"덩치만 큰 겁쟁이 동물들. 캬르륵."
"캬학. 사냥감이다."
라미아를 봤기 때문이었다.
"캬하아아아아아악!"
"히히히힣!"
흥분한 말들조차도 라미아들의 저 뱀 같은 함성소리를 들으면 겁에 질린 채 발작을 일으키면서 도망치려고 한다.
라미아들은 숲의 맹수다.
동물들은 라미아들의 울음소리를 극도로 두려워한다.
"기병은 상대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라미아는 정글에서 아주 유용한 기병이다. 하지만 결코 개활지에서 힘을 쓸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병들에게 약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산맥을 잘만 이용한다면.
적의 기병대를 분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갑을 입었다고 해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