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화 〉 영지전 # 3
* * *
그날 이후로 우리는 계속해서 침투 예상 경로를 돌며 함정을 만들었다.
"이야. 역시 보급 걱정 안 하니까 편하긴 하네."
그러는 와중에도 성녀님께서는 명령받은 대로 내게 계속 보급을 보내줬다.
이거 보급을 저쪽에서만 신경 쓰고 우린 그냥 받아서 써먹기만 하니 존나 편하기 그지없다.
거점에서 보급이 제대로 나온다는 게 이렇게 편할 줄은. 다른 거 생각할 필요 없이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건 정말로 멋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 이게 바로 영주지. 그동안은 내가 모든 것을 다 총괄했다. 하지만 영지가 있는 이상 그럴 필요는 없다.
앞으로는 철저한 분업을 통해서 우리들의 전투수행 능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기만 하면 된다.
"흐흐흐, 얘들아! 잠깐 휴식!"
"케륵! 휴식 시간이다!"
"케루루룽!"
"저거! 챙겨온 간식들 먹어라!"
내 명령에 따라 일을 하던 부하들이 즉시 삽을 내려놓고 경계조를 편성한다. 휴식하면서 수분이랑 열량 보충 좀 한 다음에 힘내서 다시 시작하자.
"정말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있군. 보면 볼수록 놀랍단 말이지."
"아니. 그럼 전쟁하는데 당연히 철저하게 준비하지요. 준비 안 하면 지는 겁니다."
"그래도 다른 영주에 비하면 더 많이 준비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비단 전쟁뿐만이 아니라."
바네사가 기분 좋다는 듯이 그리 말했다. 뭐 중세식 주먹구구 일 처리보다는 내가 직접 뭘 하는 게 더 낫긴 할 테니까.
"이게 바로 승리의 비결이라는 겁니다. 아무튼 바네사님. 여기만 다 하면 예상 침투 경로는 다 차단한 거 아닙니까?"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헬슨 남작이 우리처럼 공군을 운용한다거나, 아니면 아예 산을 깎아 새로운 길을 만든다거나. 보급 마차 없이 보병만으로 산악행군을 해 침투할 생각이 아니라면 준비는 끝났겠지."
말도 안 되는 예시뿐이로군.
그걸 생각할 가치는 없다.
"부릴아. 여기만 다 하면 전쟁까지 대기다. 기다기만 하면 돼."
"케륵, 그렇슴까? 이거 피가 끓어 오름다! 케룩케룩!"
전쟁이라는 말에 부릴이가 눈을 빛내면서 케룩거렸다. 베테랑 군인이 되었기에 전쟁을 즐기게 된 것이지.
"어서 끝내고 성으로 돌아가서 튀김 먹고 싶슴다! 케륵!"
"부릴아... 이 전쟁 이기면 좋은 일이 뭔 줄 아냐?"
"케륵? 뭠까?"
"바로 돈을 뜯어낼 수 있다는 거다."
헬슨 남작에게서 배상금과 자원을 뜯어낼 것이다. 철이며 옷감이며. 무기에 갑옷. 가죽. 상상만 해도 흥분된다.
"돈... 케륵. 뫙님. 계속 궁금했던 건데."
"뭐가."
"그 돈이란 게 이해가 안감다."
"돈이?"
"그 째간한 금속 쪼가리에 뭔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슴다. 그냥 먹는 거나 무기가 더 낫지 않슴까? 그게 아니라면 철덩이 같은 게 더 나을 것 같슴다."
이 녀석 물물교환의 신봉자가 되었군.
"그게 좀 복잡해."
부릴이는 아직 화폐라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근데 내가 여기서 전문적인 경제 강의를 해주기에는 지식이 좀 모자라고. 지금 딱히 쓸 일도 없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리 생각하든 말든. 인류 전체가 돈에 목을 맨다는 거다. 배상금을 뜯어낸다면 그 돈으로 기름이랑 고기를 더 많이 살 수 있어. 그 말은 뭐다?"
"튀김 파티임다! 케루루룽!"
"그래! 돈이 곧 튀김 파티인 거다!"
"역시 돈은 좋은 거였슴다, 케룩!"
부릴이가 풀짝 뛰더니 그대로 빽덤블링을 실시하면서 크게 소리쳤다.
"애들아! 뫙님께서 승리 후의 튀김 파티를 약속하셨다! 케르으윽!"
"케랴아아악!"
"규사아아아아앗!"
사기는 그야말로 폭발적.
"끄르륵! 모왕님! 사냥 해왔씀다!"
"아! 그럼 고기 좀 먹고 시작하자!"
작업은 즐겁게.
그러나 준비는 착실히.
* * *
준비를 마친 헬슨 남작이 출병을 명령했다.
"출병하라."
"예! 남작님!"
휘하의 기사가 크게 대답했고, 옆에 있던 시종이 나팔을 불었다. 동시에 고참병들이 소리쳤으며, 선두에 선 기수들이 깃발을 들어 올렸다.
ㅡ다그닥!
전투마에 탑승한 헬슨남작이 병사들을 가로질러 선두로 향한다. 기사들이 그의 양옆으로 따라붙었고.
"진군하라!"
남작이 소리침과 동시에 행진이 시작되었다.
ㅡ척척척.
ㅡ척척척.
ㅡ척척척.
병사들의 복식은 각양각색이었다. 통일성은 없지만 투구나 모자에 두른 띠로 피아식별은 확실했다.
"드디어 피켈 남작령을 먹어 치우겠군."
헬슨은 고양감을 느끼고 있었다. 천사들에게 고마움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덕분에 오랜 숙적이었던 피켈 남작을 무릎 꿇리고, 그곳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남작님. 주의하십시오. 천사들은 강한 마법사라고 들었습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강한 마법사들이라고 해서 혼자서 전황을 바꿀 수는 없지. 그게 가능하다면 이미 천사들이 왕국을 지배했을 거다."
헬슨은 그리 말하면서 자신의 안목이 굉장히 탁월하다고 생각을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강력하다고 알려진 천사들이 있다. 그런데 아직도 인간들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중이다.
바꿔말해 진짜로 강하다면 이미 천사가 승리했을 것이 분명.
거기에 준비도 제대로 해놨다. 궁수들과 석궁수들을 소집했으며, 마법사들 역시 고용했다. 천사라고 해서 무적이 아니다. 천사들도 마법이나 석궁. 활에 당해 떨어진다고 들었다.
하물며 열 명도 안 되는 천사다.
대세엔 영향이 없다.
"진군 속도를 높여라. 피켈 남작령은 비어있다. 단숨에 몰아쳐서 성을 점령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가야 한다. 병사들이 없다고는 하지만, 이쪽의 공격을 알아채고 징집령을 내린다면 귀찮아질 테니까.
기습의 이점을 최대한 잘 살려야 한다.
* * *
"마왕아! 나왔어!"
정찰을 나갔던 픽시가 돌아와서 날 불렀다.
"어! 픽시야! 어때!"
"아직 뭐가 보이진 않아!"
"그래? 잘했다. 이제 들어가서 쉬어."
ㅡ슥슥.
픽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에 휴식 명령을 내렸다. 이 산맥의 너머로 픽시 정찰병들을 보내둔 상태다. 일정 시간마다 날아오라고 명령을 해뒀기 때문에, 헬슨 남작이 나타난다면 곧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놈들의 군대가 아무리 빨라봤자 픽시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을 테니까.
어차피 뭐 픽시들은 대군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다. 그러니 지금은 정찰병으로 운용해야겠지.
뭐 그렇게 대기를 빨고 있으니.
ㅡ부웅!
다시 픽시가 날아왔다.
이번에 온 것은 아예 다른 방향으로 보내뒀던 픽시일 것이다. 그럼 어디. 보고를 들어볼까?
"마왕마왕마왕아아앗!"
"어! 픽시야!"
"군대가 오고 있어!"
뭣!
아 씨. 이거 이쪽이 아니라 다른 길을 사용할 생각인가 보다. 뭐 이것도 다 예상한 일이다. 이런 사태에 대응하려고 픽시 정찰분대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보낸 거였으니까.
"어디 쪽이야!"
"저쪽! 아! 나는 3분대야!"
3분대 쪽 방향이면 서쪽으로 가야 한다.
집결지는 C 지점.
"그래, 픽시야. 아주 훌륭하다. 잘 보고 했어. 바로 이동하자. 미리 자리를 잡고 기다려야 하니까."
"응!"
"얘들아! 이쪽이 아니란다! 여기서 더 서쪽에 있는 곳으로 가야 해!"
"케랴아악! 다들 빨리 짐 싼다! 실시!"
"케륵! 실시!"
ㅡ후다닥!
내 명령에 병사들이 아주 빠르게 행동을 실시했다. 여태까지 내게 몇 번이고 훈련을 받은 정예병들인 만큼, 진지를 버리고 행군 준비를 하는 것이 몹시 빨랐다.
ㅡ척척척!
그렇게 잽싸게 준비를 마쳤다.
빨리 가서 자리를 잡도록 하자.
"픽시야. 애들한테 돌아가서 C 지점으로 오라고 전해줘."
"응!"
"응!"
픽시들은 날 수 있으니 알아서 집결시키도록 하고. 우리는 행군을 실시했다.
"이제 진짜 전쟁인가."
"네. 리리엘님. 이번에도 활약 기대 하겠습니다."
"후후후, 우리 타락천사들만 믿어라. 적 보병대를 아주 완벽하게 분쇄해 보일 테니!"
"크으, 리리엘님 요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습니다?"
"이제서야 쓸모를 찾았으니까!"
비행 곡사포면 자신감 가질 만하지.
아무튼 뭐 그렇게 C 지점으로 행군을 실시했고, 도착하자마자 전투 투입을 시켰다. 모든 것은 작전대로 하면 된다. 여기서 적들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다들. 진지 안에 숨어서 교대로 쉬도록 해라. 전투가 발생했을 때 최대한 잘 싸울 수 있도록 쉬어야 한다. 알겠나?"
"케륵! 알씀다!"
코볼트들이 만들어둔 진지는 정말 완벽했다. 깊게 잘 파놔서 위장을 조금만 해도 있는지 없는지 모를 상태가 된다.
"그럼 샤란아. 부탁할게. 이 주변을 울창하게 만들어줘."
"샤아! 알겠다에여! 루미카!"
"응. 알았어."
샤란이와 루미카가 힘을 합치면 엄청난 시너지가 난다. 식물이 잘 자라려면 물이 필요하니까.
ㅡ뿌득.
ㅡ뿌드드득!
바로 샤란이가 주변을 울창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샤아...!"
그리하여 이 공간이 우리들에게 참 익숙한 정글처럼 변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래봤자 일부 지역만 변한 것이지만, 이런 느낌의 식물 지대를 적당히 퍼트려 두기만 해도 우리들의 위장 효과가 극적으로 강화된다.
"흐흐흐, 빨리 와라. 헬슨 남작."
고블린 보병대도. 임프 척탄병단도. 거기에 다크엘프 특전사들과 라미아 정글 기병대도 전부 대기 중이다. 거기에 픽시들은 물론이고 타락천사들도 있지.
"후후후, 정말 기대되네요. 마왕님."
"본때를 보여줍시다, 쥬리아님. 아, 그건 그렇고. 갑옷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현재 라미아들은 검게 칠한 판금 흉갑을 착용한 상태였다. 이게 진짜 잘 어울린단 말이지. 이번 전투는 위험한 만큼 제대로 방어구를 챙겨 입어야 한다.
"그리고 이 아랫배 쪽에 사슬 치마도 두르고 있구요. 인간들 기술력이 정말 대단하긴 한 것 같아요. 이런 장비를 뚫을 수는 없겠죠."
"바로 그겁니다."
아무튼.
이번엔 라미아들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일단 픽시들을 이용해서 적들의 진형을 읽을 생각이다. 그리고 적들의 마차와 기병들이 포진해 있는 곳에 라미아들을 투입시켜서 혼란을 조장할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