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흐흐!"
백작군의 보급품을 모조리 몰수해왔다. 그 물자들이 쌓여있는 걸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케륵케륵!"
"후후후!"
모두가 좋아하고 있다. 장비에 무기에 물자까지. 압승만 한다면 전쟁은 돈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빼앗은 장비로 내 부대를 무장시켜왔다.
"야. 웃지 마. 성에 있는 인간 병사들 저거 존나 무서워 하잖아."
"아, 이거는 레이카님이 수녀니까. 어떻게 가서 인간들한테 잘 말 좀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뭐 시발 내가 부른다고 말이나 듣겠냐?"
"일단 명목상 여신교 아닙니까? 이런 상황인 만큼 신에게 안전을 빌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기도회나 미사를 연다고 하면 누구든 오겠지요."
게다가 레이카는 아주 요염한 미녀다. 이런 수녀가 뭘 한다고 하면 가서 이야기라도 듣겠지.
"가서 인간 병사들 좀 안심시켜 주세요."
"뭐, 알았다."
"말 잘 들어서 이쁩니다."
"지랄은."
그렇게 레이카가 기도회를 준비하러 갔다.
"흐음."
역시 몬스터 군단이 문제인가. 인간들은 결국 몬스터를 경계하게 되어있다. 나중에 내가 왕국을 먹어 치우고, 몬스터들이랑 잘 살아가라고 말하고 교육해봐야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두려워하겠지.
그렇게 되면 결국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어렵군."
몬스터와 인간의 융화.
이것은 많이 어려운 문제였다.
내가 중간계 대빵이 된다고 해도 그런 문제가 남는 것이다. 진짜 일의 연속이로군.
아무튼 베라랑 성녀님을 기다리도록 하자. 민심이야 성녀님이 오면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다.
* * *
"후후후, 고생 많았다. 백작군을 피해 없이 전멸시키다니. 역시 군사적 능력이 아주 탁월해."
"칭찬 감사합니다, 어머니."
돌아온 베라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칭찬해줬다. 백작군을 쓸어버린 것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모양이다.
"정말 멋진 전술이더군. 츄렐이... 그 전 라미아 여왕을 병기로 쓸 생각을 하다니. 상상 이상으로 잘 먹혔다. 게다가 라미아 기병대가 신속하게 산악극복 후 돌격이라. 정말. 인간들의 전술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군."
"신규 병종이라고 할 수 있죠. 이제 좀 제대로 느껴지십니까?"
"물론이다."
베라도 군사 지휘관인 만큼 이런 부분에 관심이 많았다. 이 누나에게 현대 지구의 무기체계와 전술 등을 알려주면 놀라 자빠지겠는걸.
"아무튼 이제 백작과 전면전을 치러야 하는군. 군대는 이미 준비되었다. 명령만 내린다면 언제든지 진격할 것이다."
그 말대로 베라는 자신의 군대를 모아왔다. 그 규모가 엄청나다. 그리고 영지에서 나오는 자원들 역시 베라의 보급부대가 끊임없이 운송할 것이다.
지금부터는 그런 혜택을 누리면서 백작을 공격하면 된다.
ㅡ처억.
베라가 지도를 늘어놓았다.
"당장 이 앞에 있는 성부터 공격하면 되겠군. 차례대로 성을 점령하면서 진격하면 될 것이다. 이게 원래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에겐 몬스터 군단이 있지. 산악지대를 극복하고 공중에서 공격한다면 도리가 없을 터다."
"물론입니다."
그렇게 베라와 공격 계획을 짰다.
백작을 잡으려면 점령해야 할 성이 참 많다. 하지만 베라의 군대와 내 부대가 있다면 공성전쯤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속하게 돌파하도록 하죠."
"기대하지. 아들이 지휘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고 싶다."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ㅡ끼익.
성녀님이 들어왔다.
"아, 성녀님!"
"많이 기다렸느니라."
성녀님은 현재 점령 이후 민심을 얻기 위한 궁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유인물도 만들고. 연설도 준비하고 있지.
"어떻게.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어렵지 않을 것이니라. 사실 성이 점령되었는데 일반 백성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이 성녀가 나서서 교육한다면 완벽하진 않지만 안심시키고, 협조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니라."
"흐흐흐, 좋습니다."
베라는 군대를.
성녀님은 민심을.
그리고 옆에 있는 내 여간부들은 현장 전투력을.
이렇게 각각 가진 것이 많이 있으니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승리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 맞다. 어머니. 엘프 쪽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건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서신으로는 불가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지만, 녀석들은 상황에 따라서 입장을 바꿀 것이다. 약점을 보이는 순간 적이 늘어난다고 보면 되겠지."
"흐음... 일단은 백작이 우선인데."
조만간 엘프들도 손을 봐줘야겠구만.
아니. 아예 백작을 치고 천사들과 전선을 만든 뒤에 엘프와 접선해볼까? 엘프의 지도자는 여성. 엘프여제다. 한번 추근대도 괜찮겠지. 애초에 엘프들이 천사와 손을 잡을 일은 없으니 실수해도 큰 문제는 없을 테니까.
"지금은 백작을 치는 것에 집중하면 된다."
"그래야겠지요. 그럼 계획 좀 짜고 진격합시다."
"알겠다."
전술을 점검한다.
* * *
"이런 빌어먹을...!"
사이딘 백작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의 머리는 새하얘져 있었고, 머리카락도 듬성듬성 빠져있다. 얼굴 역시 주름살이 올라온 것이, 그가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전부 드러날 정도였다.
성녀 측을 견제하기 위해 보냈던 군대가 전멸했다. 패배해서 후퇴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전멸해버린 것이다.
"크아아아아아!"
백작이 야수처럼 포효했다.
ㅡ콰앙!
분에 이기지 못한 그가 주변에 있는 것을 때려 부쉈다.
"빌어먹을! 빌어먹으을!"
기회만 잘 잡는다면 왕국을 먹어 치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백작의 세력은 제일 컸고, 그 강한 천사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정도로 강했다.
그런데 뒤쪽에서 성녀니 여군주니 하는 창녀 같은 년들이 날뛰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천사와 엘프. 그리고 성녀 세력 사이에 낀 채 분쇄될 것이 분명하다.
"백작님! 진정하십시오!"
그때 백작의 부하인 제스트가 들어와 난동을 말렸다.
"제스트...!"
그렇다.
아직 끝난 건 아니다.
"엘프들과의 접촉은 어떻게 됐지?"
"예. 그 소식을 전해드리려고 왔습니다."
제스트의 얼굴은 굳건했다.
"곧 사자가 온답니다. 긍정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군요."
"그래. 그래야겠지. 우리가 죽으면 녀석들이 피해를 감수해야 할 판이니까."
백작은 엘프와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지만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자신이 무너지면, 앞으로 엘프들은 자기들이 직접 피를 흘리면서 적들과 싸워야 할 것이다. 천사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세력의 멸종을 추구하는 잔혹한 괴물들이다. 그따위 놈들과 정면으로 맞붙고 싶은 자는 없다.
그런 상황인 만큼 엘프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물론 이런 식으로 승리해봤자 결국 엘프들에게 휘둘릴 뿐이다. 그러나 당장 파멸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살아만 있다면 언제든지 기회를 노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백작님. 엘프들이 불공정한 조약을 요구할 것이 뻔합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제일 불리한 상황이지. 조약에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어. 제스트. 엘프들의 사자를 맞을 준비를 해라."
"네!"
백작은 엘프와 손을 잡게 될 것이다.
* * *
"...이상입니다, 여제님."
보고를 마친 신하가 여제의 명령을 기다린다.
감히 그 어떤 엘프도 세계수의 대리자인 여제의 존안을 함부로 볼 수 없다.
엎드린 신하는 축복받은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었고, 행여나 기분이 나빠진 여제의 명령에 따라 목이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응. 돌아가세요. 그건 내려놓고."
"알겠습니다."
신하가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바깥으로 나간다. 엘프여제, 릴리안느는 신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문서를 잡아 들었고.
곧 여제의 기분이 좋아졌다.
"후후후."
웃음이 나온다.
"아아, 저런♥"
그리고 비웃음이 흘러나온다.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네요. 이제와서 도움을 요청하다니."
여제의 손에 들린 것은 쉽게 말해서 구원요청서였다. 저기 인간 왕국에 있는 사이딘 백작이라는 녀석이 보낸 구원요청서.
"조금 더 빨리 손을 내밀었으면 좋았을 것을?"
릴리안느는 이 천사사태에 개입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엘프들은 중립이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적성 세력을 키워줄 뿐이다. 적절할 때 적절한 대상에게 힘을 실어줘야 중립도 유지할 수 있고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 구원요청은 조금 늦은 감이 있다.
조금 더 빨리 손을 내밀었다면, 백작은 지금보다 나은 상황이었을 테니까. 어차피 엘프들에게 있어서 사이딘 백작은 필요한 존재다.
ㅡ스륵.
"흐흐흥."
여제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느긋하게 구원요청서를 읽었다. 마법으로 문서를 띄워 올린 채, 욕조에서 다리를 쭉 뻗고 문지르면서 글자를 음미한다.
여제는 숲을 위협하는 인간 세력의 축소를 원한다.
가능하면 전부 분쇄하고 싶을 뿐이다.
천사가 쳐들어온 지금.
인간들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력이 크게 축소될 것이다. 하지만, 그리되면 천사들이 인간 세력을 먹어 치우고 결국엔 숲을 위협할 것이다.
따라서 여제는 인간들이 천사들을 상대할, 일종의 방패막이 되어주길 원했다. 그래야 엘프들의 피해가 없을 테니까.
그러니 여기서 사이딘 백작이 아예 죽어버리는 것은 곤란하다. 당연히 지원을 해줘야 한다.
물론 그리하면 이웃한 인간 여군주인 베라와는 완전히 척을 지게 된다. 현재 베라는 백작을 치고 있는 중이니까... 하지만 베라와는 어차피 싸워야만 한다. 통제할 수도 없고, 너무 강하다. 엘프에게 있어서 위협적이다. 약해진 백작이라면 좋을 대로 휘두를 수 있지만 베라는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백작을 살려두고 베라와 싸우게 해야 하는 것이다.
어찌 됐든 백작은 더 약해질 것이고, 전쟁이 지속되면 베라의 세력 역시 깎여나갈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그녀가 천사들과 싸운다면, 또 세력이 깎여나갈 것이 분명하다.
엘프들은 그 전장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채로 관망하다가.
"한꺼번에 잡아 먹으면 되겠어요♥"
따라서 이건 위업을 달성할 기회다.
자신은 인간과 천사들을 물리치고 엘프들의 세력을 숲 바깥까지 뻗어나가게 할, 그런 최고의 여제가 될 것이다.
"아앙♥"
그 사실이 여제를 흥분하게 했다.
ㅡ촤락.
여제가 일어섰다. 그에 따라 흠뻑 젖은 그녀의 몸매가 드러난다. 이 거대한 욕실을 홀로 독점하고 있었기에, 여제는 자신의 몸매를 전부 드러낸 채 기지개를 켰다.
"이제 움직여야겠네요♥"
엘프의 세력을 숲 바깥으로 확대할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