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참."
한숨 자고 일어나니, 그새 한번 깼던 것인지 두 여자가 나를 끌어안은 채로 자고 있었다.
여기까지 기어 와서 다시 잘 정도라면 이미 정신은 차렸다고 보면 되겠지. 보자, 몇 시간을 잤지? 6시간? 그 정도 만에 정신을 차리다니 역시 강한 여자들이다.
"호오."
거하게 자고 일어나서 그런가.
몸에서 힘이 넘치고 있었다. 제대로 휴식을 취한 덕에 이번에 성장해서 얻게 된 힘이 육체에 잘 스며든 느낌이다.
"이거 어서 카르티한테 보여줘야겠는걸."
이만큼 성장했다면 슬슬 고위 마족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모르긴 몰라도 내가 전투기술만 연마한다면 어디 가서 꿇릴 일은 없을 것이 분명하다.
슬슬 깨워보자.
"릴리안느님."
"으응..."
흔들어 깨우자 이 여자가 애교를 부리고 있다.
조금 만져주다가 귀를 살살 당겨주니.
"아...!"
"일어났습니까?"
"네, 네... 죄, 죄송합니다. 여기서 자는 게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완전히 복종 모드가 되었다.
"흐흐흐, 그럴만하지요."
현재 릴리안느는 다시 엘프의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아까 서큐버스로 각성했지만, 지금은 그 각성한 모습이 해제된 것 같다. 다음에 또 힘을 주입해주면 그렇게 될 것 같지 싶은데.
"아무튼. 릴리안느님? 제가 방금 굉장히 수상한 걸 봤는데 말이죠."
"수상한 거요?"
"예."
바로 세계수로 추정되는 존재에 대한 것을 설명했다.
"헉...!"
그러자 크게 놀란 릴리안느가 입을 가렸다.
"맞아, 맞을 거예요! 세계수님이 분명해요!"
"역시."
확실하구만.
"그럼 세계수에 대해서 설명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바로 릴리안느가 세계수에 대한 것을 설명해줬다.
처음에는 다 아는 내용이다. 엘프들은 세계수를 숭배한다는 말. 세계수는 엘프들의 어머니이며, 지켜주고 수호해주는 존재하는 것.
"하지만 사실 세계수님은 엘프들의 절대적인 숭배를 받을 만큼 초월적이고 강한 존재가 아니지요. 게다가 엘프들의 창조주라니. 거짓말이에요."
"그렇습니까?"
엘프들은 다 세계수가 창조주라고 믿지만 엘프의 여제는 그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계층별로 아는 정보가 다르다는 거군.
"네. 인간이든 엘프든. 그 정확한 기원에 대한 것은 불명이지만,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갑자기 창조된 것은 아니니까요. 아, 이건 비밀 서고에 관련 자료가 있으니 관심 있으시다면..."
"다음에요."
이세계 인류의 기원이라니.
지구인 출신으로서 흥미롭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는 세계수에 대한 걸 더 설명해달라고 말했다.
"세계수님은... 이 거대한 나무의 정령이라고 해야 할까요. 숲을 풍요롭게 하고, 사악한 힘으로부터 엘프들을 보호해주고 있는 수호신이지요."
수호신.
"여제에게 계속 전승되는 추측에 의하면, 과거 인간들처럼 유랑하던 엘프들이 세계수를 발견하고, 그곳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면서 수호신으로 섬기던 게 세계수 신앙의 기원이라고 해요. 이후로는 통치에 써먹기 위해 살을 덧붙인 거죠."
"그렇습니까? 흥미롭군요. 근데 릴리안느님은 세계수와 소통이라던가,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그 말에 여제가 애매하게 고개를 저었다.
"소통은... 해 본 적은 몇 번 있지만. 꿈속에서 흐릿하게 목소리를 듣는 것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마왕님께서는 직접 만나시기까지 하다니... 정말, 너무 놀라워서... 이것도 무슨 운명일까요?"
"으음?"
아무래도 내가 세계수를 만났다는 말에 크게 감복한 것 같은데, 방금 나는 세계수를 희롱하려고 했었다.
"뭐, 그렇겠지요. 아무튼 여제님. 이제 여제님은 제 권속입니다. 알고 있습니까?"
"네. 충성을 바칠게요."
"그렇다고 하니 말씀드리죠. 제 목표는 다름이 아니라 이 세상을 정복하는 겁니다."
"네, 네? 세계정복...?"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간다.
"앞으로 엘프들은 그 작업을 도와야 하죠. 물론, 그에 따른 보상이 있을 겁니다. 숲 바깥으로 영지를 확장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아아!"
말을 마치자 릴리안느가 크게 감탄했다.
"그렇군요!"
ㅡ처억.
기도하듯 양손을 모으는 릴리안느. 근데 눈이 아주 그냥 광신도의 그것처럼 변했는데?
"이 세계를 정복하실 생각이시군요! 그 과정에서 엘프들에게도 숲 바깥의 세상을 줄 생각이시고요!"
"그렇죠. 어떻습니까?"
"물론, 물론이에요! 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하겠어요!"
좋군.
"정말 대단해요...! 사실 저도 엘프의 여제로서, 엘프들의 영역을 숲 바깥으로 확장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답니다."
알고 있다.
"이번 전쟁도 그 일환이었는데, 마왕님께서 그보다 큰 목표를 그리고 있으셨을 줄은...! 세상에! 이건 운명이에요!"
"앞으로 잘해봅시다. 현재 다크엘프는 물론이고 여군주. 그리고 성녀까지 제 권속이 된 상태지요. 이대로 백작을 치워버리고."
"천사들을 칠 생각이시죠!"
"네. 그리고 천사들 역시 제 이 물건으로."
나는 내 자지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모조리 지배할 겁니다."
"듣기로는 천사들은 전부 암컷이라고 했죠. 마왕님의 그 물건이라면 그녀들 역시 부하로 삼을 수 있을 것이 분명해요...! 그렇다면! 천사들마저 우리의 편이 된다면!"
"세상을 정복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죠. 저 서쪽에 있는 인간 왕국들이나 드워프 왕국. 그런 곳까지 다 무너뜨릴 생각입니다."
그 말을 하자 릴리안느는 거의 졸도를 하려고 했다.
"당연히 엘프의 땅은 더욱 커질 겁니다."
"아아!"
그러니 앞으로는 내게 큰 도움을 줘야 한다.
아주 강한 엘프의 군대는 물론이고, 그 특수한 전투 정령들을 소환하는 방법까지.
내가 전투 정령마저 부린다면 그야말로 마왕군 그 자체다.
"마왕님."
ㅡ처억.
릴리안느가 자리에 섰다. 새하얀 나신. 알몸으로 선 그녀가 아주 진지한 태도로 내게 말했다.
"예."
"충성의 증표... 그것을 준비할 테니 받아주세요."
"증표라고요?"
"네. 마왕님께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드리고 싶어요. 부디 받아주시길."
"뭡니까?"
"잠깐 기다려주세요. 신역에 있는 보물창고에 갔다 올 테니."
"알겠습니다."
그리 말한 릴리안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충성의 증표라니? 아니, 그보다 신역에 있는 보물창고?
"이거 달콤한 냄새가 나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여왕님?"
"흐응, 과연 뭘까? 기대되는걸?"
어느샌가 잠에서 깬 여왕님이 옆으로 누운 채 볼을 괸 상태로 날 보고 있었다.
"그것보다 세계정복이라니. 들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려. 이 여왕님의 발로 직접 걸으면서 그 일에 동참할 수 있다니. 감동이야."
"앞으로는 더 바빠질 겁니다. 근데 여왕님. 더 강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소리일까?"
"여제의 말로는 엘프 근위대장이 여왕님보다 쎄다던데요."
"헛소리야. 붙어보지도 않았잖니? 붙으면 이 여왕님이 이겨."
그럼 기회가 된다면 한번 싸움 붙여 봐야지. 여제가 내 것이 된 이상 근위대장을 요리하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엘프 사회를 전부 침식시킬 것이다.
"일대일로 질 일은 없으니까."
"흐흐흐, 그러고 보니 비겁한 방법으로 잡혔지요."
"전투에 비겁함 따윈 없단다. 그때는 이 여왕님이 모자랐던 거야. 그걸 깨닫게 해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렇습니까."
그리 기다리고 있으니.
"마왕님."
여제가 돌아왔다.
"오셨습니까?"
"네. 일단 가장 귀중한 것들을 가져왔어요."
고급스러운 함을 들고 있는 상태인데, 저 안에 보물이 들어있는 걸까?
"흐흐흐, 기대가 되는군요. 뭡니까?"
"엘프의 비보."
"예?"
비보?
"그중에서도 가장 귀한 것들이지요. 꺼내드릴게요."
ㅡ스윽.
야제가 함을 열자 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에 적응하면서 안에 있는 걸 구경했다.
"오오?"
보니까 무슨 구체들이다. 환하게 빛나는 마법적인 구체들. 물체인가? 아니면 에너지가 특정한 모양으로 응집된 것인가? 구분하기 힘들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숲의 힘이 응축된 오브. 물의 힘이 응축된 오브. 그리고 바람의 힘이 응축된 오브에요."
"오브!"
이게 오브구나!
"엘프들의 삼대 오브랍니다. 엘븐 포레스트가 위기에 처했을 때, 최상위 정령들을 불러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죠. 말고도 큰 힘이 응축되어 있으니,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에요. 부디 받아주시길. 엘프의 여제인 제가 새로운 지배자님께 바치는 공물입니다."
"감사합니다, 릴리안느님! 아주 이쁘군요!"
"후, 후후후... 기쁜 칭찬이에요."
바로 상자를 받아들고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세상에! 자연의 힘이 응축된 오브라니!"
최상위 정령을 불러내는 힘?
이건 아주 좋은 전략병기, 아니 잠깐.
"숲과 물과 바람?"
이거... 떠오르는 애들이 있는데?
"네? 뭔가 문제가 있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릴리안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건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후후후, 도움이 되었다니 기뻐요."
세상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다시금 발기가 되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이건 정령을 불러내는 데만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흐음... 그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마법이든 정령술이든. 잘 아는 존재라면 잘 쓸 수 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죠."
"이를테면 숲의 요정 같은 존재들은요?"
"요정?"
나는 간단하게 내가 아는 요정들에 대한 것을 설명해줬다. 숲에 사는 드라이어드. 물에 사는 루살카. 마을을 이룬 채 살아가는 픽시.
"아아, 알고 있어요."
역시 엘프들도 알고 있다.
당연히 부르는 명칭은 나와 다르지만, 특징을 설명하다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런 존재들과도 힘을 합치고 있었군요? 아마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