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딘 백작은 제안을 받았다.
이 상황을 타파하고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 이교도들과 손을 잡자는 제안이다.
당연히 사이딘 백작은 바보가 아니다. 이들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며, 무슨 계약을 맺든 자신의 쓸모가 다하면 버려질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자면 자신에게 쓸모가 있는 한 그들에게서 빨아먹을 것이 있을 것이다.
최대한 이득을 챙기고 몸을 빼든 멀리 도망쳐서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든 하면 될 터.
'그런데 정작 저들의 목적을 모르니...'
물론 이교도들이 자신에게 정확히 무엇을 바라는지도 잘 모르는 상태다.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 봤지만, 지금의 자신은 패배한 몰락귀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교도들은 이런 자신에게 어떤 쓸모를 찾았길래 동맹 제안을 한 것일까? 이것을 얼마나 밝혀내는지. 그 여부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라고 백작은 확신했다.
"그래서. 네년은 내게 무엇을 해줄 수 있지? 내 영혼을 대가로 악마의 군세라도 내려줄 생각인가?"
"설마요. 그런 전설 같은 이야기를 하시다니. 동화책을 좋아하셨나 봐요?"
"기어오르지 마라. 천한 것."
ㅡ콰앙.
스스럼없이 농담을 하는 이교도 여사제의 기강을 잡기 위해 발을 굴러 힘을 보였다.
얕보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은 백작이라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일을 해온 기사다. 상황이 이렇게 됐지만 이교도년 따위에게 얕보일 수는 없다.
"...죄송합니다. 언동에 주의하지요."
"당연히 그래야지."
이교도 여사제 베스티나.
검은 로브로 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로브의 재질이 상당히 고급스러운 탓에 아주 부드럽게 몸에 달라붙어 라인을 전부 드러내고 있는 상태다.
음탕하기 짝이 없는 이교도년이다.
백작은 생리적인 혐오감을 느꼈다. 자신이 이딴 여자의 말을 듣고 있다는 사실이 치욕스럽게 느껴진다.
"백작님에게 바라는 것은, 지극히 사소한 것일 뿐입니다. 남은 병사들을 최대한 규합해서 천사들에게 저항을 해줬으면 해요."
"흐음."
네년이 이교도라서, 척 봐도 신성해 보이는 천사들을 무찌르고 싶은 거냐고 묻지는 않았다.
"저 가증스러운 천사들을 무찌르는 것이 바로 저희들의 목적이랍니다."
"그렇다면 다른 존재들은?"
"성녀군과 여군주군. 그리고 엘프군을 말하는 건가요?"
베스티나 역시 상황은 알고 있다.
"참고로, 성녀군이 마족들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 알고 있나요?"
"뭣...! 너희 같은 놈들이 또 있다는 건가?"
"아뇨. 달라요. 그들은 별개의 마족이거든요. 지금 이 땅을 두고 수많은 존재들이 경쟁하고 있죠. 그들 증 일부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
충격을 받은 백작의 몸이 휘청였다. 천사와 마족. 두 종족이 이 세상을 침략하고 있다고? 그들을 당해내는 건 몹시 힘들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최대한 이득을 취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베스티나가 백작에게 속삭였다.
"일단은 천사들을 막아주세요. 최대한 오래. 그리고... 그동안 제 사소한 부탁들을 들어주시면 돼요. 일은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도와줄 테니 맡겨주시고요."
ㅡ끼익.
반쯤 무너진 여신교의 성당 건물로 들어가자.
"..."
"..."
"..."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자들이 백작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전부 이교도들인가. 이 세상 이교도들이 다 모인 모양이로군."
"전부 백작님을 도와줄 존재들이죠. 그럼, 저기 바리올이라는 분과 이야기해주시길."
ㅡ끼익.
성당의 문이 닫혔고, 베스티나는 바깥으로 나왔다.
이교도.
그들은 과거 마족을 숭배하던 하수인들의 후예이다. 물론 마족이라는 것도 수백 년 전 이야기일 뿐이고, 그동안 명맥을 이었다고는 해도 기괴한 흑마법을 수련하는 데 노력을 쏟거나 범죄 단체로서의 성격이 강했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단자들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베스티나는 계시를 받았다.
"아아...!"
그것은 마계에서 내려온 목소리였다.
망국의 왕녀인 베스티나는 그 목소리에 매료되었으며, 곧 그 목소리를 섬기게 되었다.
몰락한 후.
세상을 떠돌면서 그녀는 이교와 흑마법을 접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재능을 깨우친 뒤, 계속해서 사악한 술법을 연구해왔던 그녀다.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없앤 마족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목소리에 완전히 취해버렸고, 그녀는 마족 '크루아'의 명령을 따르게 되었다.
'인간은 너무 나약하고 열등한 종족이야.'
이번 일을 성사시키고 크루아의 마족들을 강림시킨다면 그 은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는... 너무 위험해. 고작 인간의 육신으로는 다가올 파멸을 피할 수 없겠지. 고위 종족으로 승천하지 않는 자에게 미래는 없어.'
가슴에 손을 모은 베스티나가 고개를 숙였다.
'나의 나라가 멸망했듯, 너희들도 멸망하리라.'
여성으로서의 매력은 자신 있다.
'어서 만나고 싶어요.'
어서 그 강대한 마족에게 자신의 몸을 바치고 싶을 뿐이다.
* * *
엘프 지휘관들이랑 만나 보았다.
외부에서 활동하는 자들답게 전부 남자라서 재미는 없었지만, 그래도 군인들인 만큼 이야기하는 맛이 있기는 했다.
우리들은 백작을 분쇄하고 천사들을 치겠다는 내용의 회의를 하면서 의견을 나눴다.
"잠깐이라고는 하지만 동료. 그들을 숨통을 끊는 것은 내키지 않으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손으로 직접 편하게 해주고 싶다."
"예?"
"우리 엘프들에게 선봉을 맡겨주길 바란다. 그들을 안식으로 이끌어주지. 옛 동료인 만큼, 자비롭게 끝내주고 싶다."
이 새끼도 정상은 아니군.
잠깐이라고는 하지만 백작군이 옛 동료인 만큼, 자기들이 최대한 빨리 죽여주겠다는 말을 너무 태연하게 하고 있다.
이 엘프 지휘관의 이름은 나글라이라고 한다.
보아하니 군사적인 야망이 제법 큰 인물이었고, 여제의 눈에 들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안타깝게도 엘프여제는 내 여자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ㅡ촤락.
지도에 말을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정면.
선봉을 엘프들에게 맡기고 우리들은 우회해서 옆과 뒤를 치면 된다.
원래 이런 자리에서는 최대한 공을 세울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고성이 오가는 법이지만, 어차피 엘프여제가 내 여자인데 입 아프게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그냥 하고 싶은 놈한테 맡기면 되지.
엘프들이 먼저 나서서 싸워준다면 우리야 고마운 일이다. 물론 여제가 내 것이 아니었다면, 이런 선공 자리를 넘겨주는 순간 주도권을 빼앗겨 향후 계획에 차질이 생겼을 것이다.
"만족스럽군! 그럼 바로 준비하겠다!"
당당하게 외친 나글라이가 부관들을 끌고 천막 바깥으로 나갔다.
"건방지네. 엘프여제가 우리 꼬마의 성노예라는 것도 모르고 저러는 꼴이라니. 우스워."
렉사벨라가 의자에 앉아 있는 내 뒤로 와서 날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실로 그렇습니다, 여왕님. 아무튼... 어머니? 이제 군사작전을 실행하겠습니다. 백작을 밀러 갈 테니 준비해주십시오."
"알겠다."
이제 시작해볼까.
"큘스야. 좋은 소식이 들어왔느니라."
"오오, 성녀님. 무엇입니까?"
"여신교의 수녀들을 다수 확보했느니라. 그동안은 백작군에 잡혀서 의료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구나."
"잘됐군요!"
여신교의 수녀들은 전부 힐러들이며, 여신의 신성력을 받아들인 탓에 머리칼이 금색으로 화하고 여성호르몬이 풍부하게 분비된 탓에 몸매도 좋고 아름답다. 거기에 선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니 타락시키는 맛도 있다.
그런 수녀들은 많을수록 좋지.
이거 뭐 이제 여신교 자체를 거의 다 내가 먹어버린 느낌이다. 성녀부터 시작해서 전쟁동안 받아들인 수녀들까지. 전부 내 차지가 되었다. 날 숭배하는 수녀들과 몸을 섞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다.
"안 좋은 일을 당한 적은요?"
"말을 나누고는 있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더구나."
하긴. 양심이 있으면 자기들 치료해주는 여자는 안 건드리겠지.
자, 그럼 한잠 때려볼까.
엘프여제랑 이야기할 시간이다.
* * *
분명하게 느껴진다.
나는 수면과 동시에 일종의 특수한 차원으로 나의 의식을 날려 보냈다. 그 차원에서 물리적인 거리는 딱히 의미가 없다. 나는 그 거리를 확 좁히면서, 이 차원 어딘가에 있을 '서큐버스'를 찾았다.
어렵지 않았다.
그녀의 기운이 너무 강렬하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다시금 정신을 각성시키니, 나는 화려한 방 안에 있었다.
"아앙♥ 마왕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맞은편에 엘프여제 릴리안느가 앉아 있다. 음란한 옷을 두르고 있는 그녀는 오늘도 아름다웠다.
"반갑습니다.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군요."
"후후후, 동감이에요."
여제가 기쁘다는 듯 웃는다.
"그나저나. 이런 게 정말로 가능하군요? 소녀(小女), 아주 감복했답니다."
"예?"
소녀라고?
소녀라고 하기엔 엘프여제의 키는 180cm가 넘었고, 긴 기럭지와 탄탄한 허벅지. 그리고 커다란 엉덩이와 순산형의 골반. 심지어 압도적으로 커다란 젖가슴까지 지닌 그녀다.
무엇하나 소녀스러운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소녀라고 칭하는 걸 보니 심히 당황스럽다. 이런 여자가 소녀면 이 세상에 성인 여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결정적으로 엘프 여제의 나이는 300살이 넘는다.
근데 10배 정도는 어린 내게 아양을 떨면서 소녀라고 하는 모습을 보니 좀 귀엽긴 해.
"하아, 마왕님. 마왕을 기다리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저희, 만난 김에 데이트나 좀 할까요?"
ㅡ스윽.
내 옆으로 온 여제가 날 끌어안으면서 내 귀를 핥아주기 시작했다.
"흐흐흐, 좋습니다. 이렇게 꿈속에서 섹스하는 것도 재밌으니까요. 근데 그 전에 이야기부터 합시다. 이번에 나글라이라는 지휘관이랑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그런가요?"
바로 공격계획에 대한 것을 설명했다.
"네. 문제없어요. 이미 보급 관련 문제도 다 해결한 상태고. 전면전이 시작되면 엘프 구성원 모두가 천사들을 섬멸하기 위해 노력하겠죠. 마왕님은 그저 모든 것을 취하기만 하면 된답니다♥"
"좋군요. 아주 잘하셨습니다."
"아아...! 이 칭찬을 위해 열심히 했어요♥"
너무 충직하군.
이제 엘프들과 싸우기만 하면 된다. 내가 알기로 딱히 변수는 없다. 개털이 된 백작이 뭘 하겠는가?
물론 천사들도 비장의 수단을 숨기고는 있겠지만, 이쪽에는 또 나라는 히든카드가 있다.
마족의 힘으로 천사들을 다 쓰러뜨려 애널노예로 만들어줘야지.
그 신성총독이라는 대천사년도 내 것이다. 성검 뷰벌린드 앞에서 보지를 벌린 채 울부짖게 해주마.
"아, 근데 여제님. 근위대장은?"
"그 이후로 한번 만나보긴 했지만, 문제는 없었네요. 수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요. 게다가 근위대를 돌리는 것도 몇 년 후의 일이니, 지금은 신경 쓸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쪽은 맡기지요. 그럼 전면전을 하기 전에... 여제님과 좀 놀아봐야겠군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