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사자를 보내 항복하라는 뜻을 전했다.
물론 협상은 결렬.
백작은 마지막까지 싸우다 쓰러질 생각인지 내가 보낸 사자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돌려보내 줬다.
"죽이지 않은 걸 보면 명예란 걸 알고 있기는 한 모양이지."
삼국지 보면 사자로 간 새끼들 맨날 죽이던데 말이다. 물론 사자를 죽인 뒤에 패배하면 얄짤없다. 항복이고 나발이고 죄다 도살당할 뿐이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자를 살려준 걸 보면, 아마 중간에 재협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당연히 뭐 공성전이 지루해지고, 늘어지고, 길어진다면 협상에 응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
"성을 포위하라!!!"
우리들의 공성 능력은 그야말로 초월적인 수준이었으니까.
"와아아아아아!"
"오오오오오!"
베라의 병사들이 진격하고, 마찬가지로 엘프군단이 진격한다.
백작의 수도성인 사이딘 캐슬의 성벽은 높고 넓었다. 잘 발전된 도시 하나가 통째로 성벽에 둘러싸여 있는 형태다. 그 성안에, 각지에서 후퇴한 백작의 병력이 모조리 모여있는 상태다.
탈영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다지만 성벽 위로 보이는 병사들의 수는 상당히 많다. 아마 성을 사수한다고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다 징병한 모양이지.
"항복하는 자들은 살려줘라!"
도시의 인구를 지워버릴 필요는 없다. 그들은 앞으로 살아서 노동력이 되어줘야 한다.
어차피 저 큰 도시 안에는 방금전까지만 해도 민간인이었던 사람들이 널려 있을 것이다. 투지를 잃은 그들을 포로로 삼는 건 일도 아니다.
아무튼.
ㅡ우르르.
우리 연합군이 백작의 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종족의 군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ㅡ쐐애액!
물론 성안에서 화살이 날아오기도 했지만, 크게 신경쓸 바는 아니었다. 다들 주의하고 있는 상태니까.
"리리엘. 궁수들에게 매운맛 좀 보여주고 와라."
"알겠다!"
"세리뉴. 버프 좀 걸어주고."
"응!"
ㅡ펄럭!
버프를 받아 타천사들이 날아올랐고, 성벽 위에 폭격을 가하면서 궁수들을 치워버렸다.
ㅡ콰앙!
천사들을 상대하던 엘리트 병사들은 거진 다 사라진 지 오래다. 천사가 폭격만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겠지.
그렇게 시간이 지나니 성이 포위되었고.
"샤란아. 루미카. 가자. 레이카랑 바네사도 따라오시죠."
"샤아!"
"응."
나는 원년 멤버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향했다.
"레이카님은 보호막 잘 챙겨주시고. 바네사님은 잘 지켜주세요."
"나한테 맡겨."
"힘을 시험해보고 싶군."
군대를 가로지르고.
백작성의 성벽 쪽으로 접근한다.
그리고.
"샤란아! 시작해! 성벽을 오를 커다란 계단을 만들어라!"
"샤아!"
ㅡ화아아아악!
샤란이가 기합성을 내지름과 동시에 주변에서 돌풍이 몰아쳤다. 몰아친 돌풍은 곧 초록빛의 오라로 변했고, 오라가 퍼져나감에 따라.
ㅡ사르륵.
성벽 앞에 있는 식물들이 꿈틀대며 급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오오!"
"케랴아아악!"
그 광경을 본 병사들이 환호한다. 하지만 성벽 위에 있는 녀석들은 절망할 따름이지.
ㅡ뿌득!
ㅡ뿌드드득!
ㅡ콰카카카카캉!
샤란이가 힘을 발함에 따라 급속도로 자라난 식물이 굵어지고, 단단해진다. 그렇게 피어오르고 더 피어오른 식물과 덩굴들이 뭉치고 뭉쳐 계단의 형상을 이루었다.
"더, 더! 샤란아! 더욱더 크게!"
"샤아아! 샤란이에게 맡겨주세여!"
마침내.
ㅡ고오오.
커다란 식물의 덩어리가 계단 비슷한 형상으로 완성되었다. 바닥에서부터 성벽 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 천국의 계단.
"마, 막아라!"
"막아!"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
위쪽의 병사들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이건 사다리 따위가 아니다. 공성탑. 그것보다 더욱 좋은 것이지.
ㅡ화르륵!
불화살이 쏘아졌지만.
"루미카."
"맡겨만 줘."
성벽 아래에 있는 해자는 루미카의 자원이나 다름없었다.
ㅡ촤하아아악!
해자의 물이 용오름마냥 솟구쳐 오른다. 그 물이 식물의 계단을 덮쳤고, 불과 기름을 씻어냈다. 그것도 모자라.
"하아아압!"
촉수의 형상으로 모인 물기둥이 성벽을 덮쳤다.
"흐하하하하! 마치 크라켄과도 같도다!"
"괜찮지? 마왕 네 촉수를 보고 만들어낸 기술이야."
"정말 엄청나다! 루미카!"
ㅡ콰앙!
ㅡ쿠웅!
물기둥이 성벽을 강타하자 위에 있던 수비군들이 떨어진다.
이제 오르면 된다.
"샤란아. 저 옆에 엘프 있는 곳에도 하나 만들어주고. 부릴아! 고블린 선봉대랑 함께 와라!"
"케랴아아악!"
소란스러운 전장에서도 내 명령을 제대로 들은 부릴이가 바로 선봉대원을 이끌고 오기 시작했다.
말고도.
"네크리!"
"네에에엣!"
성벽 공략조가 재빠르게 모여든다.
이미 오크로밖에 안 보이는 근육질 고블린 군단에 다크엘프 특전사들. 거기에 그들을 보조할 임프들까지.
"진격하라!"
"케랴아아아악!"
"하아아압!"
바로.
검과 방패를 든 고블린 선봉대가 계단을 오르고, 창을 든 다크엘프들이 뒤를 따른다.
그 속도는 말 그대로 단거리 육상선수와도 같았음에.
ㅡ콰앙!
ㅡ쿠우웅!
"흐아아아악!"
"아아아악!"
우리가 성벽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던 병사들이 부딪혀 날아갔다. 이미 저 고블린들은 마력까지 다루는 존재로 화한 상태다. 일반 병사는 절대로 막지 못한다.
"그럼 우리도 가볼까."
"조심해라."
"뭐, 우리가 지킬 테니 안심해라."
명색이 지휘관이지만, 원래 중세영주들은 전쟁을 구경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가장 앞에서 싸우는 존재이기도 하지.
"가자!"
그렇게 나는 루미카와 레이카. 그리고 바네사를 끌고 계단을 올랐다. 샤란이는 엘프들 쪽에 계단을 하나 더 만들어주고 날 따라올 거다.
"케랴아아아악!"
"케륵! 케륵! 죽여라!"
"못 넘어오게 해! 모조리 죽여!"
성벽 위는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올라간 고블린과 다크엘프들이 방진을 이룬 채 밀려드는 인간 병사들을 일방적으로 밀어내면서 도륙하고 있었다.
"흐아아악!"
"아아악!"
찔리고 썰려나간 병사들이 성벽 아래로 떨어진다. 힘 싸움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음이라.
나는 성벽 위에서 백작의 수도를 바라봤다.
"멋진 도시야."
중간계에 온 뒤로 봤던 도시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멋진 도시였다. 수없이 많은 건물들은 거의 흰색에 파란 지붕을 하고 있었는데, 아주 깔끔하고 예뻐 보인다.
게다가 몇몇 화려하고 특별한 건물이나 높게 솟은 시계탑 같은 문화적인 건축물과 광장까지도 눈에 들어온다.
백작 녀석 이런 멋진 도시를 지배하고 있었다니.
앞으로 이 도시는 내 것이다.
아무튼.
"도망쳐어엇!"
"후퇴해!"
"항복! 항보오오옥!"
병사들은 성벽에 몰려 있는 상태지만, 이미 후퇴를 마음먹었는지 내려가는 놈들도 많다.
도시 안에서 수비할 생각인가.
부질없는 것을.
그때.
ㅡ파앙!
ㅡ쿠웅!
폭음이 들린다.
"이야. 레이카님 대단합니다."
마법과 각종 투사 병기가 날아왔지만, 레이카의 보호막이 전부 막아낸 참이다.
"방심하지 마, 이 새끼야. 지금 성벽 위인 거 몰라?"
"압니다. 근데 이렇게 직접 전장 앞에 서니까 옛날 생각이 나서요... 그럼 저도 나서겠습니다! 부릴아! 너희들 뒤에 이 형이 있다!"
"케랴아아악! 뫙님이 바로 뒤에 있으시다!!!"
"케르으으윽!"
인간병사들을 썰던 고블린들이 함성을 내질렀고, 나는 바로 그쪽에!
"텐타클 스트라이크!"
촉수들을 대량으로 소환했다!
ㅡ쑤우우욱!
ㅡ쑤욱!
인간병사들의 발밑에서 순식간에 솟아오른 마력의 촉수들이.
"아아아악!"
"이, 이게 뭐야아악!"
"살려줘어어어!"
마구 날뛰면서 병사들을 성벽 아래로 치워버리고, 넘어뜨린다. 그런 상황인 만큼 고블린들이 더욱 활기차게 날뛰었다.
ㅡ촤학!
ㅡ퍼억!
촉수에 당해 넘어진 자들을 찔러 죽이고, 휘청거리는 놈을 방패로 쳐 성벽 아래로 치워버린다.
그러면서도.
"감히 내 부하들을 공격하느냐!"
나는 저쪽.
감시탑 위에서 화살을 날리는 궁수들에게 암흑의 마법을 쏘아냈다.
ㅡ화르륵!
ㅡ퍼엉!
손끝에서 뿜어져 나간 흑마법의 불길이 감시탑을 덮쳤다. 커다란 폭발이 일어남과 동시에 감시탑이 불타올랐고, 안쪽의 궁수는 타죽었다.
"와아아아아아!"
"오오오오!"
곧, 샤란이가 임무를 완수했는지 저쪽에서 엘프들이 올라와 날뛰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우리도 올라왔고 엘프도 올라왔다. 그럼 끝이다.
성벽은 점령될 거고 우리는 수도 내부로 진입하게 된다.
"성벽 위에 있는 놈들은 모조리 쓸어버려라!"
항복은 내려가서 받으면 된다.
* * *
성벽은 완전히 제압됐고, 수도성의 모든 성문이 열렸다. 각지에서 우리의 군대가 들어와 점령을 시작한다.
ㅡ화르륵!
몇몇 건물들이 불타오른다.
"살려줘! 살려주세요!"
"으아아아악!"
"제발 이 아이만은...!"
도시 안에 있던 민간인들이 잡혀 나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다. 당연히 죽일 생각은 없다. 내 병사들은 사람을 잡아 온 뒤에 광장에 엎드리게 해놓고 으름장을 놓았다.
"움직이지 마라! 그럼 살려주겠다! 케륵!"
좋아.
고블린들이 아주 일을 잘해.
"당장 건물 안에서 나와라! 얌전히 나오면 살려주겠다! 불을 지르기 전에 나와라, 인간! 우리는 오직 항복한 자들만을 살려줄 것이다!"
"저기 나왔다! 체포해서 광장으로 보내!"
"여기! 중사님! 인간들이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태워버려!"
다크엘프들 역시 내 명령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 건물 안에 숨어든 사람을 꺼내고, 끝까지 저항하면 건물에 불을 지른다.
항복하는 자들만 살려줄 것이다.
몬스터 군단에 끝까지 저항할 정도로 심지가 굳은 존재들은 결코 살려둘 수가 없으니까. 그들은 명예롭게 보내줘야 한다. 반란의 싹은 전쟁하면서 제거해야지.
"루미카. 거기 안 옮겨붙게 불 좀 꺼줘."
"응."
"샤아. 마앙님. 샤란이는 머할까여?"
"흐흐흐, 지금은 내 옆에 딱 붙어있어."
현재 백작군은 전부 중심부 쪽으로 후퇴한 상태다. 도시 외곽에 남아 있는 것은 민간인뿐. 민간인들만 체포하면서 쭉쭉 들어가면 된다.
"그나저나. 사제들은 어딨지?"
백작군을 도왔던 사제라는 놈들이 보이지 않는다. 있는 것이라곤 백작군 병사들의 시체들 뿐이다.
"캬하아아악! 아, 마왕님. 이 부근엔 사냥감이 없는 것 같아요."
"아. 쥬리아님 오셨습니까. 기다리세요. 저 중심부에서 최후 항전을 할 모양이니."
"네!"
이쪽만 정리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쓸어버릴 거다.
그리 생각한 순간이었다.
ㅡ콰앙!
돌연.
커다란 폭음이 들려오더니.
ㅡ화르르르륵!
새파랬던 하늘이 어두워졌다.
"어?"
무슨 암막을 친 것처럼.
"케륵...?"
"거기 안에 있는 인간들 모조- 어?"
"으음?"
당황한 병사들이 주변을 둘러본다. 본능적인 위기감. 나 역시 감각을 최대한으로 퍼트려 주변을 살폈다.
"아닛...!"
순간.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바로.
"마족...?"
마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