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부하들과 함께 백작의 내성 안으로 들어갔다. 저항은 없었다. 병사들이 모조리 항복한 상황이니까.
거기에 바깥은 엘프군과 베라군이 지키고 있다. 내 주변에 있는 것은 믿음직한 부하들.
베스티나의 말로는 최상층에 있다고 하는데, 일단 올라가 보도록 하자.
"조심해라. 백작이 뭔가 최후의 발악을 할 수도 있으니까."
"그건 바네사님이 알아서 잘 지켜주십시오."
"뭐, 호위는 내 전문이었지."
그렇게 최상층으로 올라가니.
"으음?"
최상층의 방 안.
저 테라스 쪽에 백작이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거지만 복장이랑 옷에 박힌 문양만 보면 대충 알 수 있지.
"정신이 나갔다더니. 저렇게 된 건가."
백작은 이교도와 협업하여 자색여명 교단을 지원해주는 대신 이 도시를 온존하고 어떻게든 재기하려고 했으나, 베스티나의 목적은 그냥 전투였다.
전투를 행하면 백작군 병사들은 당해내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그렇게 병사들이 시체가 되면 박아넣었던 술식이 발동하고, 백작령 곳곳에 설치한 사악한 마법진과 반응하게 된다.
거기서 베스티나가 힘을 발하면 그 모든 것들이 마물을 소환하게 되고, 또 마물이 죽음으로서 주변에 사악한 마력이 흩뿌려지게 된다. 그 힘을 이용해서 마계와의 게이트를 연다.
베스티나는 강림한 마족들에게 이 성을 바치고 충성을 맹세할 생각이었지. 양머리 전사들이 우릴 다 박살낼 거라고 생각했다.
백작은 속은 것이다.
베스티나는 처음부터 뒤통수를 칠 생각이었다. 뭐, 진실이 있기는 했다. 이 도시에서 교단을 부흥시킬 것이라는 말. 단, 그것은 백작이 해주는 게 아니라 마족들이 해주는 것이다.
"하는 짓 보면 쓰레기긴 한데 쓸만할 것 같단 말이지."
"봐봐. 이교도는 근본적인 사고방식 자체가 틀리다니까. 야. 쓰긴 쓰되 중책으로는 쓰지 말자."
레이카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니가 나름 마족이라도 여자들 따먹는 거 빼면 어진 정치를 할 생각 아니냐? 그럼 근본부터 사악한 이교도를 중책으로 쓰면 안 돼."
"흐흐흐, 레이카님. 조언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습니다."
"니가 안 좋은 길로 빠질까 봐 그래. 귀한 조언이니까 새겨들어."
안 좋은 길이라.
따지고 보면 여기서 내가 제일 두렵고 사악한 존재일 텐데 말이지. 물론 신경 쓰지 않는다. 그딴 걸 신경 썼다간 중간계 지배 따위 하지 못하니까.
왕이란 건 그런 존재다.
"알겠습니다. 사실 사악한 자들을 중책으로 쓰다 보면 민심을 잃게 될 테니까요. 이교도들은 적절히만 이용할 겁니다."
당연히 이상한 놈들인 만큼 적절히 컨트롤하면서 사용해야지.
"그래. 그렇게 해."
그럼 가보자.
"사이딘 백작."
나는 주저앉아서 멍때리고 있는 백작에게 다가갔다.
"..."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이다. 바로 촉수를 만들어내서 백작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ㅡ흔들흔들!
"정신 차리시게. 사이딘 백작."
"으어어...!"
정신이 들었나?
"너, 너는...!"
나를 본 백작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그, 그런가. 네가 성녀측에 붙은 그 마족 장군인가..."
눈치가 빠르구만.
"잘 알고 있군. 사이딘 백작. 너는 우리에게 패배했다. 네 성도 백성도 전부 내 것이 되었단 소리지."
"날 조롱하려고 왔나? 마음대로 하게. 이제 내게 남은 건 없으니까. 여기서 죽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이다.
"마지막에 잘못 선택했어... 눈이 멀어서 이단자들의 제안을 수락했지. 결과, 내 병사들이 괴물로 변했다... 빌어먹을..."
"정확히 따지자면 시체가 되었을 때 발동하는 술식이었다. 살아있을 때는 딱히 영향이 없다는군."
"뭐라?"
"산채로 고통받진 않았다는 뜻이지. 뭐 전쟁 중에 죽은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이것은 위로였다.
백작은 능력이 좋다. 거기에 야망도 크고 권력욕이 강하다. 이런 녀석을 살려둔다면 언젠가 반란을 일으키거나 귀찮은 짓을 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건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문제고.
백작의 백성들과 병사들을 내가 흡수한 이상, 이곳에서 백작에게 심한 짓을 한다면 큰 반발을 사게 될 것이다. 어찌 됐든 자기들 대가리였으니 해를 끼친다면 민심을 잃게 되겠지.
나는 중간계의 지배자로서 민심 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
백작은 적이었지만 악독한 천사들을 상대로 열심히 싸웠다. 그 공을 높이 사서 항복을 받아주고 명예를 지켜주는 게 합리적이겠지.
"백작. 천사들을 상대로 열심히 싸웠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백작이 천사들을 전력으로 막아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네 명예를 인정해 목숨을 거두진 않겠다. 내 자비심을 드높이도록 해라."
"살려... 주겠다는 건가."
"네 백성들을 전부 먹어 치운 마당에 널 죽이면 반발이 생기지 않겠나?"
"마, 마족 주제에 인간의 정치를 할 줄 아는군..."
의외라는 듯이 날 보는 백작.
"바네사. 체포해."
"알겠다."
바로 바네사가 와서 백작의 장비를 해제시키고 체포를 실시했다. 이것으로 사이딘 백작은 탈락.
그의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었다.
"아, 그 켈스론 자작은 어떻게 됐지?"
"감옥에 있을 텐데."
"살아있군."
써먹을 구석이 있을까 싶어 감옥에 가둬놨는데, 그것도 옛날이야기다. 근데 백작이 그를 기억하는 걸 보면 확실히 충신이긴 했나 보다.
* * *
"들어라, 사이딘 백작의 백성들이여!"
광장에 사이딘 백작의 백성들을 모아두고.
성 위의 테라스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그는 좋은 지도자였다! 또한 명예롭기도 했지! 사악한 천사들을 상대로 그렇게 싸워왔을 정도니까!"
크게 연설하며 소리쳤다.
"나와의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죽이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러니 살려주도록 하겠다!"
그러면서 옆에 선 백작을 보여주자.
ㅡ오오오오오오오!
ㅡ와아아아아!
ㅡ자비! 자비! 자비!
이젠 내 백성이 된 자들이 환호했다.
자비심은 좋은 덕목이다.
"파괴된 도시를 복구하라! 세율 변경은 없다! 다들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이해관계가 상충함에 따라 전쟁이라는 모습으로 충돌했지만, 우리끼리의 전쟁은 이제 끝났다! 우리 하나 되어 사악한 천사들을 몰아낼 것이니!"
ㅡ와아아아아아아아!
그리 연설을 한 뒤에 성안으로 들어갔다.
"후후후, 역시 자비롭구나. 그대는 어진 지도자가 될 것이니라."
들어가니 성녀님이 내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여자 따먹는 것만 빼면 말이지."
"그걸 왜 빼느냐? 여성들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데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진 일..."
"아오!"
레이카는 언제나 귀엽다.
"아무튼 백성들이 그대의 자비로움을 칭송하고 있느니라. 중간계를 정복하는데 있어서 저러한 민심은 아주 필수불가결일 것이니라."
"맞는 말이다. 어떻게 된 게 인간 군주보다 민심을 더 신경 쓰는군."
베라의 말을 듣고 보니 진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지간한 중세영주보다 마왕인 내가 민심을 더 챙긴단 말이지.
"흐응, 역시 힘만으로 찍어 누르는 건 안 되나 보네. 이것도 공부가 됐어."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민심이 필요한 법이지요."
이제 최전선에서 천사들과 치고 박는 일만 남았다.
근데 일단 성을 점령했으니 복구할 거 복구하면서 휴식 좀 취하고. 그러면서 전략을 수립하면 될 것이다.
"아무튼. 베라님은 천사들 첩보에 신경 써 주시고. 나머지는 이 성 좀 제대로 관리해주십시오. 거의 여기가 천사랑 싸울 최전선이니 잘 관리해야 합니다."
"알겠다."
그럼 엘프들을 만나러 가볼까.
아무튼 우리는 승전한 상황이고, 엘프 군대는 이 안에 들어와서 주둔하고 있는 중이다.
바로 간부들을 끌고 엘프 지휘관을 찾아갔다.
"하하하! 정말 완벽한 승리였다! 도중이 괴물들이 나온 것은 당황스러웠지만! 역시 우리 상대는 아니었지!"
승리가 기껍다는 듯 크게 소리치는 엘프 지휘관.
"1차적인 공동 목적은 달성했다. 우리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여제님께 다시 명령이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겠다. 인간의 성을 우리가 굳이 복구할 필요는 없겠지?"
"사고만 치지 않으면 된다."
"알겠다!"
이거 꿈속에서 여제랑도 한번 만나봐야겠고. 그럼 이제 카르티랑 이야기하러 가볼까.
"카르티!"
"응!"
적당한 곳에 가서 크게 부르자 이블아이가 내려온다.
"승리 축하해! 이걸로 인간 세력을 다 통합했구나!"
"그런 셈이지. 뭐 별거 없었어. 크루아도 그렇고."
"응! 정말 대단해!"
카르티의 순수한 기쁨이 느껴진다.
"그래도 중간계에 그 정도 기술이 남아있을 줄이야. 흑마법을 수련해온 이교도라고 했지? 그들이 잘 보존했나 봐. 이걸 이용한다면, 마계와 더욱 긴밀하게 공조할 수 있을 거야."
원래 마곌에서 중간계로 가는 통로를 여는 것보단 그 반대가 더 편하다. 게다가 최근 천사와 마족들이 단체로 차원벽을 두드리고 있는바, 게이트를 여는 게 좀 더 쉬워졌다고 베스티나가 말했다.
"그럴 줄 알고 이미 잡아 놨다. 카르티."
"역시 잘했어! 아아! 이제 곧 다시 만날 수 있겠네!"
"흐흐흐, 그럴지도."
마계측의 지원을 최고조로 받아보도록 할까. 천사와 싸우기 전에 마계의 아티팩트 같은 것을 받아둔다면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교도들에게서 얻어낸 정보는 바로바로 알려줄게, 카르티."
"그렇게 해줘!"
자, 그럼.
이제 내 일을 할 시간이다.
카르티를 보낸 뒤에 감옥으로 내려갔다. 일단 이교도들은 감옥에서 지내는 것으로 이야기를 했으니까. 이들의 신분을 좀 세탁할 필요가 있다.
"아아! 오셨군요! 큘스님!"
감옥 안에 있던 베스티나가 날 보면서 눈을 빛냈다.
국가라는 것은 수많은 인간을 통합하는데 있어 효과적이지만, 사실 그것보다 좋은 게 있다.
바로 사상과 종교지.
"베스티나. 네 종교에 대해서 말해봐라."
"네!"
지금부터 국교를 한번 만들어보도록 하자.
어차피 성녀님도 있는 마당에 이교도들의 도움을 좀 받는다면 괜찮은 종교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