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비비앙이 회담의 시작을 알리자 각지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일단 시작 분위기는 좋은 것 같다.
곧 잘 차려입은 귀족들이 자기들 여왕에게 인사하기 위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여왕님."
"네. 무척이나 평안했습니다. 멜크경."
귀족들의 비비앙의 손등에 키스하면서 계속해서 인사를 한다. 나는 여왕의 호위병으로서 그 모습을 뒤에서 전부 지켜봤다. 이 남자들 지금 어마어마한 간접키스를 행하고 있다.
난 좀 많이 신경 쓰여서 누가 입 맞춘 곳에 입 맞추는 일 따윈 못한다.
뭐 아무튼 그런 상투적인 인사가 끝난 뒤에, 귀족들이 본색을 드러내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선왕께서 타계하신 후 홀로 그 업무를 온전히 수행하고 계시다니. 정말이지 존경스럽습니다, 여왕님."
"어서 여왕님의 부담을 덜어줄 반려가 나타나야 할 텐데요."
"좋은 자리가 있길 진심으로 기원하겠습니다. 하하하."
웃는 얼굴로 안부를 전하고 있지만 그 말에 가시가 돋혀 있다는 것쯤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
이미 귀족들은 비비앙에게 압력을 넣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를 조성한 상태였고, 여왕을 상대로 한 기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다수의 귀족들이 와서 끊임없이 돌려까기를 실시한다.
"후후후, 함께 해왔던 일이라 그렇게 어렵진 않더군요. 그 마음. 제가 아니라 왕국을 위해 사용해주시길."
물론 비비앙은 능숙하게 그 말을 받아넘기면서 적당히 웃어 보였다. 이쪽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는 저 뒤에서 기회를 보고 있는 자얀트 후작에게 집중했다.
"..."
아직 멀어서 기운을 잘 느낄 수가 없다.
오면 확실해질 텐데.
그리 생각하는 와중, 마침내 자얀트 후작이 비비앙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간 강녕하셨나이까. 여왕폐하시여."
과장된 인사로 양팔을 펼치는 자얀트.
"네. 자얀트 후작도 잘 지냈는지요."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왕국의 미래를 걱정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노골적인 돌려까기.
자얀트 후작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본뜻은 여왕인 네가 좆같아서 잠도 못 자고 있다는 뜻이다.
"하루하루 왕국을 걱정할 따름입니다. 어서 이 혼란한 상황을 종식시키고 싶군요. 여왕폐하. 후작가와 왕실의 힘이 합쳐진다면 그 누구도 샤르오드 왕국을 넘볼 수 없게 될 텐데... 정말이지. 쯧쯧쯧."
이젠 아주 노골적으로 자기랑 결혼하자고 티를 내고 있다.
이 얼마나 혼란한가.
"왕좌가 비어 있어서야 언제까지고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여왕폐하. 부디 현명한 판결을 내려주시길."
왕좌가 비어있다는 말 역시 여왕을 인정하기 않겠단 소리. 비비앙은 그 말을 들으면서 겉으로는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분노하는 것이 내게 느껴졌다.
"물론 그럴 겁니다. 자얀트 후작."
"오오! 그렇다는 건!"
나는 그 대화를 들으면서 자얀트 후작의 마력을 살폈다.
ㅡ파앗.
"..."
느껴진다.
확실히 느껴진다. 녀석은 지금 마력을 품고 있는 상태였다. 그 계통은... 건강과 힘. 대충 육체적인 건가? 확실히 나이에 비해 정정해 보이긴 한다.
역시 녀석은 마족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마족에게서 마력도 나눠 받고 있는 상태지.
그나저나 인간 남성이 마력을 지니고 있다니. 이런 건 또 처음이다. 물론 마력이라고는 해도 나랑은 계통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비슷한 건 없다.
내 마력은 인큐버스적인 색채가 아주 강하다. 자얀트 후작이 품은 건 그것과는 다르다.
아무튼 그렇게 녀석을 살피고 있었지만, 격이 다르기 때문에 놈은 내 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냥 비비앙에게 결혼하자며 끈질기게 요구할 뿐이다. 좀 추하긴 하지만 권력과 힘이라는 것이 그런 거다. 추할 때 추해져야지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있을 테니.
만일 내가 아니었다면, 아마 비비앙은 결국 자얀트 후작과 재혼을 하게 됐겠지. 물론 내가 있는 이상 그런 일은 없다.
"자얀트 후작은 이미 부인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 건 문제 없습니다. 왕국이 위기인 상황인데, 부인의 유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설령 후처라고 한들, 아무도 얕잡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무례하군요, 자얀트 후작."
"그저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앞섰을 뿐입니다. 흠흠. 무례하게 들렸다면 사죄하겠습니다. 여왕폐하."
여왕에게 후처로 들어오란 말을 당당히 하고도 자연스럽게 굴고 있다. 이쯤에서 여왕을 지지하는 귀족들이 한소리 할만 하지만, 이미 회담장의 분위기를 자얀트 쪽이 먹어 치운 상태인지 조용하다.
"아직 재혼이 이르다고 생각하시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왕국의 미래를 생각하십시오. 여왕폐하. 당장 저만 해도 최근 성국 쪽의 움직임을 읽고 그에 대비를 하는 중입니다. 군비를 증가시키고 있습니다만... 어이쿠, 용병들 몸값이 뛰어올라서 큰일입니다."
당신을 칠 군대를 모으고 있다고 대놓고 협박을 하는 자얀트.
그쯤 되니 비비앙이 입술 안쪽을 살살 깨물면서 내게 눈치를 보냈다. 더 이상의 무례를 받아넘기기 힘들다는 듯, 안타까운 눈초리.
그럼 뭐 이쯤에서 시작해도 되겠지.
"..."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동시에 비비앙의 얼굴이 환해졌다.
"미안하지만."
"으음?"
"이미 재혼 상대는 정해졌습니다. 자얀트 후작."
그 말이 나온 즉시.
"뭐, 뭐랏?!"
"어어!"
"그 무슨...!"
"대체 누가!"
자얀트와 그의 친구들에 무슨 폭탄이 떨어진 것마냥 크게 놀라 소리치며 눈을 부라렸다.
"그, 그게 무슨...!"
"설명하십시오, 여왕님!"
"대체 그 재혼 상대가 누굽니까!"
"어서! 우리에게 알려주십시오!"
"우리에겐 알 권리가 있습니다!"
그전까진 웃는 척 교양 있는 척하며 느긋하게 돌리던 귀족들이 단숨에 정신을 차린 것처럼 아우성을 치며 고함을 터트린다.
"...무례하군요."
시끄럽다고 말하는 여왕에게 막무가내로 다가가는 귀족들.
"그게 대체 누굽니까! 새로 왕이 될 존재가 누구인지, 저희들도 알아야겠습니다! 물론 현명한 답변이 되길 기대하면서!"
자얀트가 소리친 순간.
"바로."
비비앙이 날 가리켰다.
"이분입니다."
이제 나 차례지.
ㅡ절그럭.
전신 철갑을 두른 채 비비앙의 옆으로 가서 섰다.
"이, 이 자는...!"
"다, 단순한 호위가 아닌가!"
"호위 기사를 왕으로 삼겠다는 겁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왕폐하!"
나를 본 귀족들이 막말을 쏟아낸다.
"말조심하십시오. 샤르오드 왕국을 위해, 왕좌를 그에게 넘기기로 이미 결심한 상태입니다. 곧 계승식이 시작될 텐데 너무 경솔하시군요."
"이, 이런 망할...!"
"혼인에 대한 권리는 오직 이 여왕에게만 있습니다. 혹여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 왕국법을 따라주시기를."
"이런 멍청한! 어디서 굴러먹다온지 모를 놈에게 왕국을 넘겨! 미쳤군! 제정신이 아니야!"
격노한 자얀트가 비비앙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래서 난 그의 분노를 더욱 크게 만들어주기 위해 그 손가락을 꽉 잡았다.
"어어?!"
"무례하다. 자얀트 후작."
"네, 네놈! 이거 놔라! 투구조차 벗지 않은 녀석이...!"
"이걸 벗길 원하나?"
ㅡ스윽.
바로 철투구를 벗어줬고.
"아닛!"
"허억!"
내 얼굴을 본 귀족들이 입을 떡 벌리면서 경악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잘생긴 탓이겠지. 그리고 그건 귀족들에게 여러 가지 인상을 심어줄 것이다.
외로움에 빠진 여왕이 무슨 개날라리 같은 남자를 꿰어와서 살림을 차리겠다고 지랄을 떨고 있다는 인상.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엔 내가 너무 잘생겼다.
"이 무슨 개같은...! 왕좌가 장난인 줄 아시오, 여왕! 이 자는 대체 누구요! 그에 대한 건 살면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소이다! 그런데 감히 왕관을 넘기겠다니...!"
이들이 계급적으로는 왕 밑에 있다곤 하나 봉건제 하에서는 다들 힘 있는 영주일 뿐이다. 왕관이라는 밥그릇이 걸려 있다면 명예나 예의 따윈 언제든지 던져버릴 수 있지.
"헛짓거리는 그만하고 당장 내게 왕관을 넘기시오! 그리하면 적어도...!"
"닥쳐라, 자얀트!!!"
ㅡ콰앙!
강하게 발을 구르면서 크게 소리치자.
"으악!"
그 충격으로 자얀트가 뒤로 넘어졌다.
"왕비에게 무례하다! 자얀트!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느냐!"
"이런 미친 자식이! 어디서 온 놈인진 모르겠지만 허황된 꿈에 빠져서 주제를 모르는구나! 네놈 따위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가 왕이 되는데 있어서 자얀트 네놈의 인정 따윈 필요 없다! 상대를 고르는 건 여왕의 권리니까!"
"어, 어억...!"
적당히 헛소리를 갈겨주니 자얀트가 뒷목을 잡으면서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귀족들은 당장이라도 내게 뛰어들 기세였지만, 내 체급과 기운을 보곤 그냥 으르렁대기만 할 뿐, 덤벼들지는 않았다.
"..."
비비앙은 미소 지은 채 귀족들과 날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지켜주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후, 후회할 거요, 여왕!"
"그건 당신이 하게 될 것 같군요. 자얀트.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를 무시하다니... 하찮습니다."
"애인 따위를 왕으로 만든 당신보다야 낫겠지! 가자! 더 있을 가치가 없다!"
"네, 네!"
"알겠습니다!"
곧 완전히 격노한 귀족들이 회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후후후, 속이 다 시원하네. 고마워."
"오늘은 호위 아닙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응."
나에 대한 충성심이 팍팍 올라가는 걸 보며 주변을 살폈다.
본디 비비앙을 지지하던 자들이나 중립 귀족들 역시 날 미심쩍게 바라보면서 어이없어하는 상태였다. 하긴. 다들 내 정체를 모르니까. 진짜로 애인인 줄 알겠지.
"저들 중 일부가 떠날지도 모르겠어."
"사실 좋은 일입니다... 중립자리에 있는 귀족들도 싹 치워버리면 좋지 않겠습니까?"
귀족이 적어지면 우리가 먹을 파이가 커진다.
그리고 예로부터 중립세력은 못 믿을 놈들이다. 치울 수 있을 때 치워버려야지. 그리고 여왕을 미심쩍어 하다가 우리가 이기는 걸 보고 그제서야 편이랍시고 뒤늦게 뛰어들면 그건 그것대로 좋다. 챙겨줄 게 전혀 없으니까. 아무것도 안 줘도 되는데 구태여 우리 편을 들어준다면 이득이지.
"그럼 곧 전쟁이 일어날 테니, 그거나 준비합시다. 여왕님."
"응. 그래야겠지."
바빠지겠는걸.
* * *
그리고 전쟁이 선포되었다는 소식 들려왔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고 있던 전쟁 준비에 더욱 집중하며 교란 계획을 시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