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봐라, 인어. 이걸 부숴버리겠다."
ㅡ흔들흔들.
마도서와 우상을 잡고 흔들면서 놀리듯 말했다. 일단은 대충 교섭하는 척하면서 말을 붙여야겠지.
그러면서 틈을 노릴 거다.
"그것을 부순다면... 너희는 죽을 것이다."
거유인어가 눈을 부릅뜨면서 낮게 말했다. 동시에 그녀의 주변에서 무형의 기운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팔락이고, 커다란 젖가슴이 살살 들어 올려진다.
"흐흐흐, 강하게 나오시는군. 이게 그만큼 귀한 물건인가 보지?"
"..."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닫아버리는 거유인어. 하지만 물건에 손댈 경우 언제든지 언제든지 죽여버리겠다는 듯, 투지를 내뿜고 있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으면서 말이다.
물론.
당연히 이길 자신은 있다. 어인들이 더 와도 내가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죄다 쓸어버리고 애들 회복시키면서 싸우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큰 존재로 성장한 나. 그리고 날 보조하는 간부들. 그리고 내 손에 들린 강력한 뷰벌린드. 그런 게 있는 난 지지 않아.
근데 사실 뷰벌린드가 아니었다면 이런 전투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게 있으니 해적 토벌하러 소수만 끌고 온 거지, 아니었으면 오지도 않았을 테지만. 아무튼. 마검 뷰벌린드가 있는 이상 내가 질 일은 없다.
거유인어가 무슨 술수를 쓰든 파훼하고 제압할 자신이 있단 말이다. 하지만 나는 좋게 끝내는 것을 선호한다. 여기서 서로 목숨 걸고 싸워봤자 내 군대가 피해를 입을 뿐이다.
속이고.
꼬드겨서 저 거유인어를 무방비하게 만든 뒤에 범해야 한다.
"약속하겠다... 책과 조각상을 넘겨라. 그리하면 너희들을 안전하게 돌려보내겠다."
"나도 약속하지. 이 자리에서 네 군대를 물려라. 지금은 협박당하는 모양새라서 마음에 들지 않아."
"불가하다... 너희를 믿을 수 없다."
당연히 그러시겠지.
"공격할 생각은 없어. 나는 너와 단둘이 협상하고 싶을 뿐이니까."
"협상?"
협상이란 말에 거유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좋은 게 손에 들어왔는데 활용을 해야지. 협상할 기회다. 어쩌면 우리는 상호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우리가 거래할 수 있는지 이야기를 해보자는 거지."
"거래라..."
거래라는 말에 혹한 건지, 거유인어가 뭔가를 생각하려는 듯 눈알을 굴렸다. 결국 바다의 종족이다. 육지의 종족과 거래를 한다면 얻을 수 있는 게 많을 거라고 생각을 할 거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지만, 지금 내 목적은 저 예쁜 인어를 속이고 범하는 것이다. 거래야 대등한 상대와 하는 거고. 지금 나는 인어를 사로잡기만 하면 내 노예로 만들 수 있다.
그건 충분히 가능해.
싸워서 이길 자신도 있으니까.
"마족... 너는 이쪽의 주술사를 죽였다."
"너와 상관 있는 일인가?"
떠보듯이 말했다.
분명 그 좆밥 상급 주술사 새끼는 자기가 서열 1위라고 했다. 근데 아무리 봐도 저 인어가 더 강해 보인단 말이지.
물론 지휘관과 돌격대장의 무력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긴 하다.
"...아니."
"그렇다면 충분히 거래할 수 있을 거라고 보는데. 뭐, 이걸 손에 넣은 이상. 우리의 편의를 많이 봐줘야 하겠지만 말이다."
"지금 당장... 어인들을 진격시켜서 널 죽이고 빼앗을 수도 있다."
"그럼 이것들은 죽기 전에 파괴하도록 하지."
"..."
거유인어가 입을 닫았고, 나는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크게 고민하는 얼굴이다. 나는 여자에 정통한 인큐버스이기 때문에 대략적인 느낌이랑 분위기를 보고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읽어낼 수 있다.
ㅡ스윽.
곧, 거유인어가 고개를 들고는 말했다.
"무엇을 원하지?"
좋아.
내 제안을 합리적이라고 여긴 것 같다. 차라리 거래를 하는 형식으로 이 사태를 해결하고 싶은 거겠지.
"글쎄. 그것을 이야기하려면 네 군대를 물려야겠는데."
"군대를 물리면... 네가 습격하겠지... 나는 바보가 아니다. 그리 할 바엔 차라리 상실을 상정하고 싸울 수도 있지."
강하게 나오는군.
군대를 물리면 어차피 당할 테니, 물건을 잃어버린 셈 치고 싸울 수도 있단 말이다.
"그런가. 그렇다면 둘 다 군대를 물리는 것 정도라면 수용할 수 있겠나?"
"둘 다...?"
"네가 군대를 물리면 나도 군대를 물리겠다. 그리고 둘이서 협상을 진행하도록 하지."
"으음..."
그 말에 거유인어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 그 전에 이름부터 묻지. 네 이름은?"
"넬리아."
"난 큘스다."
"..."
고개를 끄덕인 넬리아가 다시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일대일인 상황이라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네 무기... 그것을 두고 간다면 수용하겠다."
"이거 말인가?"
옆에 띄워둔 뷰벌린드. 이게 신경 쓰이나? 하긴. 강력한 힘을 지닌 무기니까. 경계할만하지.
여기선 잠깐 튕겨볼까.
"내 무기라. 피차 서로를 믿지 못하는데 무기가 없어서야 안 되겠지. 그건 거부한다."
"그렇다면 거래는 없다."
"이게 파괴되길 원하는가?"
"..."
"알겠다. 넬리아. 타협점을 찾지. 내가 무기를 내려놓는다면, 너 역시 무기를 내려놔야 한다."
넬리아의 무장을 살폈다.
푸른색 금속 서클릿과, 화려한 완갑. 그리고 젖꼭지에 부착된 불가사리. 거기에 손에 든 진주. 딱 그것뿐이다. 느껴보니 저 진주가 넬리아의 무기인 듯하다.
"그 진주가 무기인가 보군. 그것을 내려놓는다면 나 역시 내 검을 내려놓고 협상에 응하지."
"진주를."
고민하는 넬리아.
아예 여기서 흑마법으로 기습을 가해볼까? 내가 기습하고 렉사벨라가 돌격한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걱정인 건 우리 공격력이 너무 강하다는 것.
실수하면 인어는 죽을 것이고, 나는 인어를 손에 넣을 기회와 나아가 바다를 지배할 기회마저 잃게 된다.
나로선 기습보단 이야기장으로 끌어들여서 겁탈하는 게 더 끌린다. 하지만... 질질 끌 수는 없지. 여기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야기를 더 하는 척 하면서 기습할 거다.
치명상을 입어도 내 마력으로 어떻게든 살려보면 되겠지.
"그렇게 하지... 서로 무장을 해제한 뒤에... 군대를 물리고... 약속 지점에서 만나서 이야기하겠다."
"좋아. 장소는?"
"마법으로... 안내하지. 지금 당장 시작하겠다."
일단 장소는 자기가 정하겠다는 건가.
"당장 움직여라..."
"줴에엑!"
즉시 어인부대가 후퇴하기 시작했다. 넬리아 역시 그 움직임에 맞춰 후퇴한다.
"괜찮으니까 너희도 후퇴해. 여기선 내가 승부를 보마."
"케륵. 그냥 전쟁해도 괜찮슴다."
"바다 왔는데 다쳐서 갈 수는 없지."
"샤아. 마앙님. 괜찮아여?"
"물론이지. 내가 지는 거 봤어? 여왕님. 애들 잘 지켜주십시오."
"응. 걱정되네."
"괜찮으니까. 세리뉴. 정찰해서 적당한 지점으로 이동시켜줘."
"알겠어. 그건 내게 맡겨."
ㅡ저벅저벅.
그렇게 내 부하들이 진형 이동을 실시했다. 물론 애들에게 내 무장을 맡긴 상태. 지금 나는 갑옷만 입고 있었다. 가진 건 협상용 우상과 마도서 뿐.
"좋아."
ㅡ펄럭.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날아올라 섬을 확인했다.
"다 갔군."
어인들의 기척이 없다.
쭉 빠진 것이리라.
그리고.
ㅡ화아악!
저 앞에서 어두운 녹색 빛무리가 신호탄처럼 쏘아져 올라왔다. 저쪽에서 만나자는 거겠지. 주변에 어인은 없다. 나는 주저 없이 협상 장소로 향했다.
* * *
"어."
가다 보니 신비한 풍경을 마주하게 됐다. 이곳은 섬 안쪽이다. 근데 지대가 낮은지, 저 경사진 아래쪽에 바닷물이 흐르고 있었다.
섬의 1층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딛고 있던 육지는 2층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곳은 잔잔한 해변 같은 곳이다. 주저 없이 내려가니 넬리아가 물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해변에 가깝지만, 물속에 몸을 담궈 놓은 상태. 인어니까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대비를 한 거겠지. 그리고 어쩌면 저 바다 속에 어인들을 잠복시켜 놨을지도 모른다.
뭐, 이 정도면 괜찮겠지.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이상한 곳이군."
"협상을 하기 위한... 자리다."
"소라게는?"
"두고 왔다."
약속을 잘 지키는군.
"꺼내라... 마도서와 우상을."
"그러지."
ㅡ터억.
바닥에 문어 우상과 책을 내려놨다.
"..."
안 그런 척하지만, 넬리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해변 쪽을 향해 조금 다가왔다. 이게 어지간히도 소중한 모양이다.
아, 근데 진짜 저 커다란 유방.
저거 젖꼭지에 불가사리를 어떻게 붙인 거지? 당장 떼어내서 그 비밀을 밝히고 싶다. 아예 불가사리를 유륜에 문질러대고 싶은 마음도 든다.
"이제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해라... 조율할 테니."
"내가 원하는 건 별로 없어."
"무엇이지?"
"바로 너다."
급발진.
"응...?"
넬리아가 멈칫한 사이.
"다크 블래스트!"
손을 뻗어 흑염의 산탄을 빠르게 흩뿌렸다!
"네놈! 속였구나!"
ㅡ촤학!
빠르게 반응한 넬리아가 물의 방어막을 전개해 다크 블래스트를 막아냈으나, 사실 내 술수는 그것이 아니었다. 넬리아야 바다로 튀면 그만이다.
그러니.
ㅡ촤하아아악!
물밑에 만들어뒀던 내 촉수들로 움직임을 봉쇄해야겠지.
"아닛!"
해벽 밑바닥에서 튀어나온 나의 촉수 수십여 개가 넬리아에게 감겨들면서 그 몸을 붙잡는다. 전투 경험으로 따지면 나도 베테랑이다. 그리 촉수들이 넬리아를 휘감은 즉시.
"크아아아아압!"
몸에 흑염을 두르면서 땅을 박차 돌진했다.
넬리아라면 내 촉수쯤 금방 끊어낼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내 몸으로 붙잡아야 한다.
ㅡ콰앙!
"끄윽...!"
예상대로, 넬리아는 내 촉수를 풀어내려고 힘을 쓴 그 순간에 나랑 충돌했다.
ㅡ첨벙!
나는 넬리아를 강하게 끌어안은 채로 발을 움직여 육지로 끌어냈다.
"놔라!"
ㅡ팔딱팔딱!
아름다운 거유인어가 하반신을 팔딱대면서 저항했으나 이미 여긴 육지다. 문답무용. 지상으로 끌고 가면서, 나는 그녀의 아랫배에 내 손바닥을 얹었다.
"마력주입."
그리고 마력을 쭈욱 주입했다.
제압하기 위해 좀 대량으로.
"응옷...♥"
그러자 넬리아의 몸이 굳어졌고, 나는 그대로 넬리아를 적당한 곳까지 쭉쭉 끌고 가서.
"텐타클 룸."
ㅡ화아악!
바로 주변에 촉수로 벽을 세워 임시 숙소를 만들었다.
"내, 내게 무슨 짓을...!"
분노한 넬리아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힌다.
"넬리아. 넌 나한테 납치된 거야."
"큿...!"
적에게 납치된 여자가 당할 짓은 하나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