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길드에서의 이야기
강력한 힘에 튕겨 나간 나는 던전의 벽에 부딪히기 전에 몸을 돌려 착지했다. 그리고 손을 보니 검은 무사했지만,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강력한 힘. 보법 사용 중이라 마력을 쓰지 못했다지만 내 스피드는 무시무시하다. 근데 그걸 인식하고 막다니. 16층에 있는 모험자라 그런가?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네놈, 뭐 하는 놈이냐. 암살자인가? 아니면 살인마인가? 그도 아니면 새로운 몬스터인가?"
나를 튕겨낸 장본인이 앞으로 나왔다. 나는 그제야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어깨까지 오는 금발에 완벽이라 불러도 할 말이 없는 완벽한 이목구비. 아리스, 유벨과 동급. 아니, 둘이 외모를 꾸며야만 동등해지질 수준의 미다.
다만 아쉬운 부분은 판금 갑옷을 입은 탓에 몸매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한가지 단언할 수 있는 건 그녀의 하체는 분명 훌륭할 거란 것이다.
"다시 한번 묻지. 뭐 하는 놈이냐. 말하지 않는다면 암살자로 간주 즉결처형하겠다."
그도 그럴 것이 저렇게나 거대한 대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데 하체가 단련되지 않았을 리 없잖아. 자고로 무술 하면 하체지.
"마지막까지 답이 없는가. 그렇다면 즉결처형하겠다."
그녀의 외모에 너무 정신이 팔렸다. 눈을 들어보니 그녀의 강직함이 보이는 눈동자가 나를 직시한다. 그리고 거대한 대검이 횡으로 휘둘러지며 나를 노렸다.
느린 감이 있지만, 군더더기 없는 신속한 움직임. 나는 감탄하면서도 단검으로 대검을 막아냈다.
카가강!
잠깐의 충돌. 내 몸에 강력한 충격이 느껴지며 뒤로 밀려났다. 강하다. 지금은 보법을 쓰지 않아 나도 마력을 쓰고 있는데 그녀에게 밀리고 있다.
분명 마력의 컨트롤은 이쪽이 앞서고 있지만, 전체적인 신체 능력과 마력량은 그녀 쪽이 압도적인 우위다. 특히 그녀가 쓰는 마력 운용은 마치 패왕을 연상시킬 듯 사납고 강하다.
'하지만 감당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군."
창이 있었다면 나름 선전하다 이길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단검 두 자루뿐. 힘으로는 안돼다. 그러니 몸을 이용한 기술로 충당한다.
나는 힘 싸움 도중 제자리에서 하체만 높게 뛰어올랐다. 그리고 묘기를 부리는 광대처럼 허리를 꺾어 그녀의 목을 잡았다.
그 상태로 단검을 세워 스케이트의 날이 얼음을 누비듯 대검 위를 스쳐 지나가 흘려보냈다.
갑작스럽게 목을 검거당한 상황. 나는 그녀의 동료를 의식하여 빠르게 끝내려고 했다. 외모와 행동으로 봤을 때 중요 인물 같아 죽이지는 않을 거다.
대신 목을 졸라 쓰러트린다. 두 다리에 힘을 줘 목을 조르려는 순간, 그녀가 목을 크게 흔들었다.
"떨어져라!"
콰아앙-!
내 몸이 흔들리며 등에서 엄청난 격통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다리의 힘이 풀려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녀를 바라보니 그 바닥에 엎드린 상태에서 다리가 풀리자 일어나고 있었다.
'이거 빡세겠네.'
목이 잡히자마자 몸을 아래로 내리쳐 다리를 풀어냈다. 그야말로 완벽한 대응력에 고귀해 보이는 신분과 달리 정석에 얽매이지 않는 전투법이다.
나는 힘들겠다 느끼며 몸을 돌려 재빠르게 일어났다. 그녀는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그리고 나를 보며 마치 면접관이 평가하는 것처럼 나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움직임이 훌륭하군. 불필요한 부분이 조금도 없어. 하지만 그와 별개로 몸이 기술을 따라오지 못하다니 매우 특이해."
방금의 속도는 하이 엘프의 기술이라 현재 재현 한 것도 아슬아슬한 수준. 그 상태를 유지라며 전투? 어림도 없지.
"그리고 방금과 같은 빠른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걸 봐서는 그때의 스피드를 내려면 조건이 필요한가. 아니면 그 정도의 스피드를 낼 때는 무언가 제약이 걸리게 되거나."
"........"
나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내 생각보다 뛰어나다. 이거 잘못하면 내 정체를 들킬 수도 있겠어. 막말로 그녀의 힘이라면 내 옷을 찢어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자들.
"또 신나셨군. 저거 말리지 않아도 되는 건가?"
"놔두게나. 저것도 하나의 재미지. 봐봐 즐거워하고 계시잖아."
태평하게 말하고 있지만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몸을 긴장시켜뒀다. 조금이라도 그녀가 위험해지면 움직일 거고 실력 또한 그녀보다 훨씬 강하다.
그녀까지는 무리하면 제압할 수 있지만, 저들이 나서면 나는 몇 분 버티는 게 최선이리라. 그렇기에 슬슬 눈치를 보며 다음 수를 생각해봤다.
역시 도망치는 게...
"도망칠 생각이라면 포기해라. 처음의 속도를 낸다고 하더라도 마력을 다루지 못한다면 제압할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다. 당장에 내 뒤에 있는 자들도 낭비가 심하긴 하지만 순간적이라면 그 정도 속도는 낼 수 있지."
".............."
"침묵하는가. 역시 그때의 속도를 낼 땐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가 보지."
...도망은 무리인가.
내가 계속 침묵하자 그녀는 내 말을 긍정으로 알아들었는지 훗, 하고 웃는다. 눈썰미가 아주 좋구나! 설마 내 보법을 한 번 보고 거기까지 간파할 줄이야.
나는 긴장했다. 여기에서 잡히거나 정체를 들킬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수는 최대 두 개 다.
뒤에 있는 놈들이 반응하기 전에 그녀를 제압하거나.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어서 도망치는 것.
"말했을 터다. 도망칠 수 없다고. 한번 날 노린 이상 절대로 놔주지 않는다."
내가 도망칠 생각을 하는 것을 또 간파했는지 그녀가 그리 말하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거대한 대검을 휘둘렀다.
느리지만 신속하다. 상반되지만 그녀의 검을 실제로 그랬다. 강력한 힘과 마력에 다른 검보다 느렸지만, 효율적인 움직임에 그 무엇보다 신속했다.
덕분에 조금 느리다는 문제점은 의미가 없어졌고, 나는 재빠른 움직임으로 옆으로 굴러 대검을 피했다.
콰앙!
던전의 바닥이 깊게 파였다. 철저하게 나를 죽이기 위한 검과 마력의 운용은 그야말로 위협적이다. 나는 그녀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막고자 가지고 있는 단검 전부 꺼내 투척했다.
"투척 무기? 역시 사람인가."
그녀는 묵직한 대검으로 단검을 손쉽게 막아냈다. 그동안 나는 그녀에게서 좀 더 거리를 벌렸다.
아직 부족하다. 이 정도 거리는 금방 따라잡힐 터. 역시 싸워야 하나. 나는 단검을 역수로 쥐고 그녀를 보았다. 아무래도 그녀와 싸우면서 시간을 끌어야 할 것 같다.
"이제야 싸울 마음이 생겼나."
내가 단검을 들자 그녀가 웃으며 달려들었다. 나는 싸울 거다. 하지만 정정당당하게 싸우지는 않을 거다.
키이잉!
그녀의 검에 실린 힘은 엄청나서 지금의 나로는 막을 엄두조차 내기 힘들어 단검을 비스듬히 비틀어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자세를 잡아 대검을 휘두르기 전에 가방에서 마석을 꺼내 투척했다.
우우웅!
붉게 빛나는 마석. 그녀가 놀라며 대검으로 얼굴을 비롯한 중요 부분을 가리는 사이 마석이 폭발했다.
콰과광!!!
성대한 폭발과 함께 주변으로 마력 폭풍이 터져나갔다. 마석 그 자체에 폭발의 성질을 부과했기에 폭탄이 아닌 평범한 마석들과도 연달아 터져 그 효과가 더욱 컸다.
하지만 이 정도로 그녀가 다칠 리 없다. 아는 이 틈에 능력을 발동했다.
'육체 강화 최대치로, 초재생 최대치로'
나는 두 개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발동했다. 최대치는 원래 잠깐만 쓰던 거지만 그녀와 단검 두 자루로 동등하게 싸우려면 어쩔 수 없다.
우둑! 우두둑!
뼈가 다시 맞춰지는 소리와 함께 전신에 격통이 느껴졌다. 저번에는 몸을 붕괴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썼다면 지금은 내구도에 몰빵한다. 덕분에 몸의 덩치도 부풀어 올라 대략 190cm 정도의 덩치가 되었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힘에 비례하여 엄청난 고통이 느껴져 죽을 것 같지만 초재생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니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음? 사람이 아니라 신종 몬스터인가. 그것도 새로운 인간형!"
한편 그녀는 폭발 속에서 태연하게 걸어 나와 나를 보았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내 변화에 놀란 것처럼 보이더니 나를 몬스터로 착각했다. 그래, 더 착각해라. 나는 몬스터다!
"우아아!"
이제 단검은 필요 없다. 나는 단검을 인벤토리에 넣고 마치 몬스터처럼 포효하며 뛰어올랐다. 그리고 양손을 깍지끼고 그녀를 향해 내리쳤다.
콰앙!
그녀는 내 공격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물러났다. 좋은 판단력이다. 내 주먹이 닿은 곳은 폭탄이 터진듯한 굉음과 함께 터졌다.
그리고 던전의 잔해가 탄환처럼 위협적으로 사방으로 튀어 나간다. 육체가 단단해지며 덩달아 근력도 상승해서 일어난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나는 아예 몬스터로 컨셉을 잡기로 하고 예전에 어떤 세계에서 본 몬스터의 행동을 따라 했다.
손으로 몸을 받쳐 일어나고 하체를 앞뒤로 흔들어 반박력을 얻는다. 그대로 땅을 짚고 다시 점프. 양손을 번갈아 가며 내리친다.
콰앙! 콰광! 콰광!
내 주먹질에 땅이 부서지고 갈아엎어진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여유 있는 얼굴로 튀어 오르는 잔해를 피했다.
"강하군. 짐승처럼 움직이는 것 같지만 절도 있어. 하지만 방금의 그 재빠른 움직임은 대부분 사라졌구나. 차라리 방금의 상태로 싸우는 게 나았을 것을."
내 능력을 모르는 주제에 간파했다는 듯이 말하며 대검으로 내 팔을 내리쳤다. 하지만 지금 내 팔은 내구도로 극도로 상승한 상황 그녀의 대검은 방패와 부딪힌 것처럼 떨리며 뒤로 튕겨 나왔다.
"무슨!"
그야말로 갑작스러운 상황에 움직임이 흐트러졌다. 반면에 내 팔의 상처는 생기자마자 재생됐다.
'빈틈 발견!'
그녀의 머리를 거대해진 손으로 잡아 던전 바닥에 틀어박았다. 그리고 검을 휘두를 수 없도록 팔을 밟았다.
"끄으으!"
엄청 아플 텐데 그녀는 입술을 깨물어 고통의 신음을 참아냈다. 그 단단한 멘탈에 감탄하면서도 내 목에 검을 겨누는 자들에게 과시할 용도로 그녀의 머리를 쥔 손에 좀 더 힘을 넣었다.
동시에 내 머리와 목의 코앞까지 온 검들이 멈췄다. 홀리쉣, 진짜 뒤질 뻔했네. 특히 머리 앞에서 멈춘 검은 인지하지도 못했다. 이건 경험이고 나발이고 기본적인 스펙 차이가 너무 났다.
'싸우면 뒤진다.'
나는 이들의 평가를 상향 조정하며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지금 잡힌 여자의 머리통을 수박 부수듯 부숴버리겠다는 것을 어필했다. 덕분에 그들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이거 위험하군. 이 인간형 몬스터 아무래도 지능을 가진 것 같은데?"
"허허, 최초의 지능형 몬스터면서 이 정도의 능력이라…. 여기서 놓치면 모험자 피해가 엄청나겠어."
"그보다는 구출부터 생각해야 하지 않겠나."
"흐음. 글쎄? 이놈이 우리 말을 알아들어서 움직이기 어려운데."
"그건 그렇지."
여유만만하다. 내가 자기들 말을 알아듣는 걸 알고도 저런 대화를 나누다니. 하지만 그들은 여유만만할 자격이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움직여도 내 팔이 잘리는 동시에 목이 허공을 날겠지.
싸늘하다. 그야말로 심장에 비수가 꽂힌 느낌이다. 하지만 걱정 마라. 탈출 준비는 끝났으니.
우우웅-!
내 주위로 휘몰아치는 마력. 내가 괜히 쓸모도 없는 마석폭탄을 던질 게 아니다.
내가 준비한 간이 워프 장치를 내가 위험해서 쓰게 될 줄 몰랐네. 그들은 마력의 준동에 놀라며 급하게 움직이려고 했고. 나는 바닥에 눕힌 여자를 인질 삼아 버텼다.
곧, 워프가 발동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