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황녀와의 이야기
모두가 잠든 저녁 시간. 황금 길드가 시끄러워졌다. 그 이유는 간부들과 함께 원정을 나간 루진 플라비스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올라오기까지 며칠은 걸려야 하지만 루진 플라비스는 까마귀 몬스터로 위장한 유진을 매우 위험하다고 여겨 텔레포트로 순식간에 귀환했다.
지금은 모험자 연합과 던전 관리부에서 필요한 수순을 맞히고 길드로 돌아오는 중.
이에 늦은 저녁이지만 리린 플라비스를 비롯한 간부진들이 전부 모였다. 곧, 정문이 열리며 루진 플라비스와 그 뒤에 간부 3명이 들어왔다.
"루진아-!!!"
리린 플라비스는 위풍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오는 자신의 조카에게 달려들었다. 황족으로서의 기품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행위에 루진 플라비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공주(公主)님. 부디 체통을 지켜주시죠."
"에잉~ 우리 루진이는 너무 고지식해서 탈이라니까. 오랜만에 만났는데 가족으로서 반가워할 수도 있는 거지."
리린은 가족으로서의 정을 언급하며 루진을 껴안으려 했지만 루진은 극구 거절했다.
"지금 다른 간부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짓은 나중에 해주시죠. 그때는 가족으러서 받아들이겠습니다."
"히잉, 나만 보면 안아주세요~ 하고 달려들던 게 어제 같은데…. 벌써 다 자랐구나."
훌쩍, 훌쩍. 리린은 두 눈을 비비며 자신이 슬프다는 것을 언급했다. 정작 루진은 그런 리린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공주님, 그보다 예언의 영웅을 찾았다는 게 사실인가요."
"응!?"
리린은 루진이 유진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자 기겁했다. 리린은 이미 여친이 있는 성욕 넘치는 남자한테 순수하디 순수한 조카를 넘겨줄수 없었다.
"루진아~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지금은 쉬면서 컨디션을 다시 잡아야지~"
"괜찮습니다. 그리고 달라붙지 마세요. 그렇게 달라붙고 싶다면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됩니다."
"....선넘네?"
리린 플라비스, 그녀는 일에만 매진하여 아직까지 결혼은 커녕 연애도 못해본 숫처녀다.
방실방실 웃던 리린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리고 몸에서 스멀스멀 마력이 피어오른다.
이에 뒤에 있던 간부들 중 마법사 간부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앞으로 나와 리린을 막았다.
"진정하시죠 단장님. 그리고 루진님, 예언 속 영웅으로 추정되는 자를 찾긴 했습니다…. 만, 저희와 황제 폐하께서는 그 소년이 영웅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진의 실력과 기술은 나이대에 걸맞지 않은걸 넘어 어지간해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루진이야 황족으로서 좋은 스승과 온갖 영약들을 복용할 수 있어서 가능했지만, 유진은 시골 출신이라 그런 게 불가능하다.
그야말로 순수한 재능의 화신, 앞으로의 장래성만큼은 루진 이상이라고 간부들은 여기고 있었고, 이런 유진에 대한 정보는 황실에까지 올라가 이미 황제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에 가장 놀란 반응을 보여준건 루진이었다.
"벨패공. 그게 정말인가!"
그녀의 두 눈이 기대로 반짝반짝 빛났다. 그리고 폭풍과도 같이 질문을 퍼부었다.
"그자는 얼마나 강하지! 앞으로의 장래성은! 그리고 어떤 무기를 사용하나!"
"허허허, 진정하십시오. 그래도, 어디보자…. 최소로 잡아도 루진님과 동등한 수준으로 보입니다. 비록 신체 능력은 루진님과 비교하면 밀리나 전투 테크닉과 힘의 활용은 유진 쪽이 월등합니다."
"유진…. 그 소년의 이름이 유진인가..."
유진, 유진. 루진은 그 이름을 되뇌며 웃었다. 그 반응에 다른 간부들은 청춘이라 여기며 훈훈하게 웃었다.
유진에게 아리스라는 여자친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걸 신경 쓰는 간부는 한 명도 없었다. 그 소년은 장차 영웅이 될 터다. 영웅에게 첩이 있는 건 당연한 일.
루진 플라비스라는 황족을 아내로 두고 첩을 가지는 건 황가의 격에 걸맞지 않지만 그렇다고 재능있는 소꿉친구를 매정하게 버릴 만큼 황가는 냉정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아리스라는 인재를 완전히 묶고 황가에 새로운 피를 수혈한다는 사심도 들어가 있다. 재능있는 피를 환영하는건 황가의 오랜 전통이기에.
"크흠! 유진의 이야기는 그만하자. 일단 들어가서 피로부터 풀자꾸나."
리린은 던전에서 고생했을 루진을 걱정하며 말했다. 이에 루진은 까마귀 몬스터가 생각나 얼굴을 굳혔다.
"공주님, 중요하게 보고할 게 있습니다…. 라시스공, 벨파스공, 아슈스공."
루진의 말에 뒤에 있던 3명의 간부가 앞으로 나왔다. 진지한 기색에 리린도 느긋하던 기색을 지웠다.
"무슨 일이지."
리린의 말에 그들은 지하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갑작스러운 습격과 습격을 막은 후 올라와 보니 보인 시체.
이에 급하게 귀환했다고 말하니 리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인간형 상급 몬스터인가. 거기에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단검 같은 무기를 다룰 정도로 꽤 높은 지능을 지녔다라..."
몬스터가 모두 빡 대가리 인 건 아니다. 대부분이 지능이 없는 개체지만 소수로 지능이 어느 정도 있는 몬스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인간형 호문클루스와 골렘이 그랬고, 무형의 도플갱어가 그렇다. 하지만 까마귀 형태의 몬스터는 리린으로서도 처음 듣는 몬스터였다.
"내가 여길 다스린 지 10년…. 새로운 신종이라 이거지, 우선 몬스터의 특징을 정리해서 보고하도록. 그리고 내일 조사를 나갈 인원을 선별해둬."
"그리하면 꽤나 많은 수가 빠져야 합니다. 사실상 원정과 다를 바가 없어요."
간부 한 명이 불가를 호소했으나 리린은 오히려 그 간부를 다그쳤다.
"우리가 누군지 잊었나. 우리는 황제 폐하의 명으로 이 던전의 관리를 명받았다! 그런데 이 사태를 방관하자는 건가! 황제 폐하의 이름을 더럽힐 셈인가! 당장 준비를 시작하도록!"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간부들이 고개를 숙였다. 사실 리린의 판단을 옳다. 갑자기 나타난 신종 몬스터가 어떤 특징을 가졌고, 정확한 숫자가 몇인지도 모르는데 그냥 방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닥치고 원정을 간다는게 결코 옳은 판단은 아니나 황금 길드는 갑자기 원정을 갈 준비가 갖춰져 있다.
이외의, 모험자 연합의 허가같은 준비에는 차질이 생길 수 있으나 황금 길드는 그 이름값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증표다.
하지만 갑자기 대량의 인원이 빠져나가게 생기자 수습의 훈련을 맞고 있는 3명의 간부 중 한 명인 벨패가 앞으로 나섰다.
"이거 곤란하군요. 이렇게 인원이 대거 빠지면 훈련에 차질이…. 아! 그 방법이 있군요!"
벨패는 이미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때마침 루진도 돌아왔으니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며 벨패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건 수습들의 지옥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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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일찍 눈이 떠졌다. 일어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인벤토리에서 마석을 꺼내 먹는 것. 몸 구석구석 마석의 힘이 퍼지는 감각은 언제나 짜릿하다.
"모닝 마석은 끝났고."
옆을 보았다. 아리스는 먼저 나갔는지 침대에는 나 혼자밖에 누워있지 않았다.
"어디보자…. 시간이."
바깥을 보니 벌써 해가 떠 있다. 시계를 보니 아침 식사 시간이 간당간당한 상태다.
이에 나는 기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아리스한테 잔뜩 빨리긴 했지만 이렇게 오래 잘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보다 아리스가 왜 날 안 깨웠지!"
아리스라면 분명 나를 깨울 텐데. 왜 그냥 간 건지 모르겠다.
이건 나중에 물어봐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후다닥 욕실로 들어가 씻었다.
대충 목욕하고선 나와보니 시간은 아침 식사 시간인 6시를 지났다. 나는 2층 창문을 뛰어넘어 식당으로 달렸다.
"어제 실컷 해댄 탓에 배고픈데 굶을 수는 없지!"
식당이 보인다. 벌컥 문을 열고 식당에 들어섰다. 그리고 오늘 밥을 기대하며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내 기대대로 식당 안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니, 단 한 명의 사람만이 의자에 고고하게 앉아 있었다.
"...음?"
뭐지? 왜 아무도 없지? 잘못 왔나 싶었지만, 음식은 제대로 있다. 그렇다면 잘못 온 게 아니라는 건데…. 나는 의문을 느끼며 혼자 식사를 하고있는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익숙한 사람, 무려 던전에서 나와 싸웠던 사람이다.
'얘가 왜 여기서 나와...?'
분명 던전에 있었고, 나오는데 일주일은 걸릴 거리다. 그런 곳에서 나와 나를 마주하는 그녀. 나는 당황과 함께 몸이 떨리려는 걸 다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엄청난 미인이다. 태양을 연상시키는 금발에 풍만한 가슴이 옷 위로 올라와 있다. 그 사이즈는 명백히 아리스 이상!
거기에 잘 단련된 몸에는 잔근육이 보였는데 건강 미인처럼 보여 더욱더 매력적이었다.
"과연. 그대가 나와 같은 조가 된 사람인가. 반갑네."
의자에 앉아있던 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품과 우아함이 가득한 몸짓에 무인으로서의 강철같은 강직함이 엿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토파즈 같은 눈동자가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받으면서 태연함을 연기했다. 나는 그녀의 정체도 모르고 만나는 것도 처음이다.
"저도 반갑습니다. 다만 같은 조라니요? 저는 들은 게 없는데…. 그보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어디 있는 아시나요?"
"흠. 듣지 못한 건가. 알려줄 테니 그대도 음식을 챙겨 옆에 앉도록. 같이 활동하려면 배가 든든해야지."
그 말에 접시 하나를 집어 내가 먹을 음식을 담고 그녀 옆에 앉아 고기 하나를 뜯었다. 내가 별 말없이 식사를 시작하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 소개를 하도록 하지. 나는 루진 플라비스 현 황제이신 루이 플라비스 황제 폐하의 장녀이며 현재는 황금 길드의 수습이다."
땡그랑!
그녀의 말에 나는 수저를 놓치고 말았다. 황제의 장녀라니... 상상도 못 한 정체에 어안이 벙벙했다. 나름 고위 신분이라는 건 예상했지만 황족이라니!
그때 던전에서 그녀를 공격한 게 떠올라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야, 그 일을 들킬 일은 없어. 그리 생각하며 태연한 척 수저를 주웠다.
"긴장할 것 없다. 황녀라고 한들 지금은 그대와 같은 팀이며, 지금은 수습에 불과하니."
"아…. 예."
수습인데 왜 던전 최하층에 있었던 거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말을 아끼자.
"크흠, 그러면 왜 다른 사람들이 없는지 아시나요?"
"다른 수습들은 합숙을 나갔다. 그곳에서 간부들에게 훈련받고 돌아올 거다."
"합숙? 저는 들은 게 없습니다만?"
"합숙 훈련은 원래 시작하기 직전에 말하는 게 전통이라고 하더군. 나도 오늘 처음 안 사실이다."
"그러면 왜 저희만..."
"그건 그대가 잘 알 텐데? 우리한테 그런 합숙은 의미가 없다. 신분은 수습일 지언전 실력은 이미 현역 모험자들 중 상위일 테니까."
그녀는 그리 말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내가 지닌 힘의 일부를 꿰뚫어 본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가 한 노력과 재능을 꿰뚫어 보았다. 여자답지 않게 몸 곳곳에 옅은 흉터가 보인다. 그리고 손에는 굳은살의 흔적 보였다.
나처럼 편법은 쓴 게 아닌 오랜 시간을 들여 단련한 흔적이다.
"허허...."
그 흔적들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온다. 머리가 꽃밭이거나 음흉함으로만 가득 차 있는 황녀들과 다른, 노력가에 재능까지 갖췄고, 황족다운 날카로운 안목을 지녔다.
그리고 눈에는 강인함과 함께 지혜가 엿보이는 것 같았다. 이 여자는 장담하건대 지금까지 만나본 황녀 중 최고의 재능을 갖춘 여자다.
"그러면 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지."
그녀는 깨끗하게 식판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그녀를 따라 음식을 먹어 치우고 뒤를 따랐다.
"이제 어디로 가면 되는 거죠?"
"확실히 그대는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군."
"잠깐만요."
나는 그녀를 멈춰 세웠다. 아까부터 그대, 그대, 그대. 너무 거슬린다.
"제 이름은 그대가 아니라 유진입니다. 유진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유진…. 유진이라. 평민 주제에 황족이 나에게 그런 부탁을 하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만…"
그녀의 볼이 조금 붉어진다.
"우리는 지금 동일한 입장이니 수용하마, 유진."
"감사합니다."
신분상 뭐라 들을 걸 각오했는데. 내 말이 먹혔다. 황족에게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요구하는 건 무례한 일이지만 내 말을 받아주었다.
이걸 보아하니 그녀는 딱히 권위적인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나도 친해질 수 있겠지. 나는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우리는 곧 익숙한 운동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저번에도 본 마법사 양반이 서서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