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황녀와의 이야기
한편 합숙을 나온 수습들은 말 그대로 지옥을 경험하고 있었다.
새벽에 난데없이 강제 이동된 것은 물론이요, 그 장소가 매우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크아아아아!!!
거칠게 포효하며 사방에서 맹수들이 달려들고, 그곳에서 무기를 휘두르며 수습들은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현재 그들이 있는 장소는 대도시 근처의 거대한 숲. 맹수가 득실거리기로 유명한 맹수의 숲이다.
그들이 이곳에 던져진 명분은 실전경험을 쌓고, 몬스터와의 싸움에 대한 대비, 그리고 생존하는 법을 터득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유진과 루진 둘이 함께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걸 보고 이상한 소문을 낼 수 있어 사전에 막아놓은 거다. 그리고 굳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루진의 신분 탓이다.
루진은 황녀다. 그런데 유진과 루진이 이제 막 만난 상태에서 혹여 그렇고 그런 소문이라도 났다가 유진 쪽이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다고 여긴 거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서 아리스와 유벨도 열심히 구르고 있었다. 지금 이 상태에서 버티는 것도 전부 간부가 사망자가 없게 제때 조력한 덕분.
그나마 강한 아리스는 자신의 동생인 유벨을 강한 향기 때문에 맹수들이 다가갈 수 없는 향나무 위에 올려놓고 홀로 맞서고 있었다.
크아아아!
콰악!
재규어 한 마리가 달려와 아리스의 팔을 물었다. 하지만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짐승의 이빨로는 몬스터의 질긴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뚫지 못했다.
아리스는 롱소드를 잡던 손 중 한쪽 손을 놓고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으읏!"
푸욱! 푸욱!
피가 튀며 재규어가 떨어진다. 아리스가 자신의 팔을 문 재규어의 목에 미리 지급받은 단검을 쑤셔 박아 죽인 것이다.
"후우."
가죽 갑옷은 약간 찢기긴 했지만 그렇게 위험한 상태는 아니다. 아리스는 단검을 다시 허리춤 포켓에 넣고 롱소드를 집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임시로 급조한 훈련이긴 하나 훈련으로서의 성과를 내기위해 필요한 도구는 전부 가져와 보급해 놨기에 아리스도 단검과 포션을 받을 수 있었다.
단검은 지금처럼 맹수가 달라붙었을 때 쓰고, 포션은 위급상황 때 조금씩 아껴 썼다. 그야말로 극한의 상황 속에서 아리스은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불길해, 뭔가 불길해!"
아리스는 유진의 동행자다. 그 덕분일까,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
크아아아아아아!!!
"우왓! 언니, 더 몰려온다!"
정직 너무 바빠서 느긋하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더욱더 몰려오는 맹수의 무리. 아리스는 롱소드를 움켜쥐고 맹수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곧 맹수들이 사방에서 달려든다. 유벨은 나무 위에서 미친듯이 공격 마법을 난사했다.
후우웅-!
초급 공격 마법인 마력 미사일이 하늘을 누비며 땅에 떨어진다. 평범한 맹수들은 이것만으로 죽어버렸다.
하지만 몇몇 강하고 노련한 맹수들은 제대로된 타켓팅없이 마구잡이로 발사할 뿐인 마력탄을 손쉽게 피하고 나무를 향해 달렸다.
아리스는 그런 맹수들의 모가지를 땄다. 한번, 두번...반복할수록 움직임은 단순해지고 행동은 빠르게. 그녀는 나름 맹수의 목을 따는 법을 체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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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게나! 기다리고 있었다네!"
마법사가 두 팔 벌려 환영한다는 듯이 말한다. 그보다 저 양반이 왜 여기에 있지?
마법사는 마법사가 될 수습들을 가르치는 양반이다. 합숙을 떠났다면 따라가야 했을 것이다.
"일단 앉도록 하게나. 이제부터 자네들이 해야 할걸 설명해줄 테니."
마법사가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말에 루진은 근처 바닥에 앉았다. 나도 그녀를 따라 옆에 나란히 앉았다.
마법사가 루진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기쁘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예전의 일을 꺼냈다.
"유진군. 저번에 한 얘기 기억나나? 자네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에 따로 해야 할게 있다고 한 거."
"아, 그거라면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훈련 면제에 공방을 받는 대신 무언가를 하기로 했었다. 그때는 뭔지 모르고 일단 수용했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당시에는 별생각 없었는데 지금 보니 마법사가 무슨 목적인지 알 것 같았다. 실제로도 마법사는 내 예상을 맞는다는 걸 자신의 입으로 말해줬다.
"자네는 앞으로 루진 양과 한 팀으로 수습 졸업시험을 볼걸세."
"졸업…. 시험이요?"
졸업 시험이라니, 처음 듣는 얘기라 혼란스럽다. 하지만 루진은 졸업시험에 관해서 알고 있는지 나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졸업시험은 우리 황금 길드의 전통 중 하나다. 수습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모험자가 되기에 앞서 길드에서 엄선한 의뢰 3개를 해결하는 거지. 의뢰 정도는 알고 있겠지."
"의뢰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의뢰란 모험자에게 정당한 보수와 함께 일을 맡기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몬스터가 던전에만 존재하지만, 세상 곳곳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몬스터가 없기 때문일까. 강한 힘을 지녔으며 호시탐탐 사람들을 노리는 맹수들과 상인들을 노리는 산적이 득실거린다.
물론 이를 막기 위해 각 국가마다 군대와 기사단을 보유하고 있아나 제국은 넓고 마을은 너무나도 많아 전부 지키기 어렵다.
그렇기에 모험자들 에게 일을 맡기는 의뢰란 게 생겨났다. 보통 초보나 저랭크 모험자는 대부분 의뢰로 먹고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뢰에 관해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쉬워지지. 저희 황금 길드는 그 이름값에 걸맞게 들어오는 의뢰도 전부 어렵네."
"알고 있습니다."
마법사의 말에 루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 근데.
"굳이 3개의 의뢰를 하실 필요가 있으신가요? 그리고 의뢰를 하더라도 혼자서 하실 수도 있으실 텐데 왜 저랑 같이?"
이게 가장 의문이다. 루진은 황녀다. 그리고 실력도 출중하기에 바로 모험자가 되도 문제 없을 텐데, 황녀가 굳이 나랑 시험을 보려는 이유를 모르겠다.
"확실히 루진 양이라면 굳이 시험을 볼 필요가 없지. 하지만..."
"불가하다."
마법사의 말을 루진이 끊었다.
"현 길드의 간부들도, 그리고 아버님이신 황제 폐하의 여동생. 그러니깐 내 이모이신 공주님도 전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서 위에 올라섰다."
이게 당연하다 말하는 그녀의 눈에는 긍지가 가득했다. 나는 그녀의 그 말만으로 이해했다.
"황녀님도 아래에서부터 시작하겠다는 의미군요."
"그렇다. 나는 황가의 일원으로서 정당한 절차를 거칠 것이다."
과연, 이거 앞으로 고생 좀 하겠어. 그녀와 나라면 실력도 좋으니 아마 의뢰도 어려운 걸 주로 주겠지.
"좋은 자세네요."
그래도 일부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밝게 웃었다.
"조, 좋게 봐주니 고맙군!"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 한다. 저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를 좋게 보는것 같았다.
"크흠!"
이때 마법사가 헛기침했다. 그래 그녀가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의뢰에 집중하자.
첫 번째 의뢰는 뭘지 기대하고 있으니 마법사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러면 첫 번째 의뢰를 주도록 하겠네."
마법사가 꺼낸 건 양피지. 그는 나에게 양피지를 넘겼다. 받아보니 양피지에 의뢰에 관한 글이 적혀있었고, 그 내용에서 쓸데없는 부분을 지워버리고 중요 내용만 간략하게 보자면...
"산적 토벌인가..."
"산적 토벌!"
산적 토벌, 시골 도시 근처에 자리 잡은 산적을 치워달라는 의뢰다. 내 말에 루진도 내 곁에 붙어 양피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팔에 닿아 기분 좋다.
"이거라면 간단하겠는데요."
"그렇군! 산적은 황제 폐하의 신민을 괴롭히는 역적들! 전부 죽여야 한다!"
"예? 죽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우두머리는 제압한 다음 병사들에게 넘겨야..."
"말도 안되는 소리! 역적은 전부 죽여야 한다! 그것이 이 나라의 법이다!"
루진은 극단적이었다. 분명 법률상으로 산적 같은 도적은 황제의 명에 따라 역적으로 분류되어 즉결처형 해야 한다는 게 법이다.
하지만 보통 산적은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산적들과 동맹을 맺거나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게 보통이다.
산적 우두머리 정도면 잡아서 얻을 정보가 상당할 텐데 루진은 법에 따라 산적을 전부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 참 고지식하네.'
다른 말로 하자면 융통성이 심각하게 부족하다. 싸울 때는 임기응변이나 대응력이 개쩔었는데 이런 사소한 부분에 문제가 있을 줄이야.
왜 나를 그녀 곁에 붙이려 하는 건지 이제야 알겠다. 앞으로 고생 좀 하겠다고 생각하며 양피지를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산적의 숫자는 대략 500명 정도라 이거지. 나는 꼼꼼하게 정보를 얻어내고 나서 양피지를 접어 품에 넣었다.
"우선 의뢰는 받아두죠. 그래서 언제 출발하면 되나요?"
"내일."
내일이라. 준비 좀 해야 하려나. 고민하고 있는데 루진이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왜 그러시죠, 황녀님?"
"크흠, 아까부터 나를 황녀님이라고 부르던데…. 유진! 나는 유진을 이름으로 부르니 그대도 나를 이름으로 불러주길 바란다. 그대와 나는 앞으로 같은 팀이니!"
그녀가 수줍게 말한다. 부끄러운지 뺨은 붉게 물들었고, 눈동자는 떨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에게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 달라고 말했다. 이는 평민에게 있어 실로 황송한 일이다.
"알겠습니다, 루진님."
"님자도 빼거라. 반말도 해도 좋으니 그냥 루진이라 불러다오."
"...알겠어 루진."
나는 잠깐 고민했지만, 그냥 받아들였다. 그러자 아직도 있던 마법사가 우리를, 정확히는 루진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거슬리는 시선에 루진은 뭐라고 할 생각인지 마법사를 향해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내 손을 잡아끌었다.
"여기서 나가지!"
그녀는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녀에게 이끌려 끌려 나오고 말았다.
"내, 내일까지는 시간이 있다. 그러니 오늘은 나와 함께 도시를 돌아다니지 않겠나. 나는 에 도시에서 오래 살아 유진에게 안내해줄 수 있다!"
그녀는 딱딱해진 표정으로 어색하게 말했다. 본인 딴에는 친근하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잘되지 않는 것 같다.
"아, 그, 같이…. 가겠나?"
귀엽다. 존나 귀엽다. 뭐랄까…. 방금 전까지는 위엄 넘치는 기사 같은 기운을 느꼈다면 지금은 풋풋한 소녀 같다.
특히 내 눈치를 보는 건지 날 힐끔거리며 조마조마한 표정을 짓는 게 갭모에, 그렇기에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루진. 루진도 날 편하게 대해줘."
"펴, 편하게. 인가."
"응. 나도 널 편하게 대하잖아. 같은 팀인 만큼 너도 날 편하게 대해도 좋아."
내 말에 기쁜 건지 그녀가 활짝 웃었다.
"알겠어! 유, 유진아! 앞으로 잘 부탁해!"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저런 아름다운 외모에 순수한 미소라니…. 당장이라도 그녀를 더럽히고 싶다는 욕망이 차오른다. 저 얼굴에 내 정액을 뿌리면 그것만큼 흥분되는 게 없는데.
그런 음란한 생각을 하는 것과 달리 나는 평온함을 위장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싱글벙글 웃고있다.
찌릿-
"음?"
순간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급하게 몸을 돌려 근원지를 찾아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 길거리를 거니는 사람들만이 있었다. 혹시 모르기에 주변을 샅샅히 뒤져보고 마력을 작게 뿌려 근방 300m 내외까지 조사했지만 이상한건 찾을수 없었다.
"뭐지?"
기분 탓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루진은 이 시선을 못 느낀 건지 나와 달리 차분했다.
'진짜 기분 탓이었나? 하지만 그 시선은 진짜였는데...'
나를 향한 진득한 살기, 나도 모르는 사이 약간의 식은땀이 흘렀다.
루진은 그런 내 모습이 이상했는지 어깨에 손을 올린채 물었다.
"유진, 왜 그러지?"
"아니야, 가자."
그냥 루진같은 미녀와 같이 다니는 걸 보고 꼴 받은 누군가겠지. 나는 그리 치부하며 루진의 뒤를 따라갔다.
'그래, 무슨 일 있겠어?'
내 옆에있는 여자는 무려 황녀다. 주변에 호위 정도는 붙어있겠지. 호위가 없더라도 황녀라는 이름값이 있으니 감히 이 도시에서 목숨을 노릴 생각 따윈 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황녀 곁에있는 나를 노리는것도 몹시 힘들겠지, 나는 조금 안정된 마음가짐으로 루진의 곁에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