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황녀와의 이야기
나는 루진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왔지만 당장 할 건 없었다. 그녀가 위풍당당하게 도시를 안내하겠다고 말한 것과는 달랐다.
"어, 음. 여기는 그러니깐..."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쭈뼛거렸다. 명백히 길을 못 찾는 상황, 이래서는 하루를 길 찾는데 날려버릴 것 같았다.
그정도는 아니겠지만 왠지 내버려두면 그럴것 같다고 직감이 속삭였다. 그리고 나는 내 직감을 아주 신뢰한다.
'어쩔 수 없지. 내가 나서는 수밖에.'
이대로는 답이 없다고 여겨 내가 앞장서기로 하며 그녀의 앞에 섰다.
이 도시의 모든 곳을 아는 건 아니지만, 도서관에서 지도를 찾아 대략적인 위치 정도는 외워뒀지.
"날 따라와."
짧게 말한 뒤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녀는 지금의 상황이 창피한지 고개를 숙인 채 내 뒤를 따라왔다.
다시 한번 말하는 거지만 그녀는 너무나도 귀여웠다.
'아, 당장 따먹고 싶다.'
그녀와 함께할수록 음심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그녀도 나에게 호감을 느낀 것 같으니 자빠뜨리려고 한다면 그리 어렵진 않겠지.
하지만 그녀가 왜 나한테 호감을 느끼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당장 일을 벌일 생각은 없다.
그녀가 나한테 호감이 있어도 황가가 날 어찌 생각할지는 모르는 일이지.
그러니 우선 호감도를 쌓으며 그녀에 관해 알아낼 생각이다. 그러기엔 데이트가 최고지.
"우리 저기로 가보자."
"저쪽으로 가자고? 저쪽은 평민들이 주로 가던데 뭐가 있나?"
"뭐가 있지. 그러니깐 기대하라고, 오늘 하루를 즐겁게 해줄 테니."
여자와 함께 외출한 경험은 많기에 어느 경로로 이동하는 게 좋을지 감이 온다.
먼저 간 곳은 길거리 노점상이 주욱 이어진 곳이었다. 황금 길드의 식사는 매우 맛있고 안전까지 확실한 일류 요리지만 가끔은 이런 군것질 거리가 먹고싶은 법이지.
특히 이세계는 와플이나 붕어빵, 닭꼬치 같이 나에게 친숙한 먹거리도 많아서 좋다.
"아침은 먹었지만 조금 부족한데…. 같이 먹을래?"
"구, 군것질인가. 그렇지만 이런 가게의 음식은 몸에 안 좋은 법인데..."
"원래 몸에 안 좋은 게 즐겁고 맛있는 법이야."
그냥 여자보다 유부녀를 따먹을 때 더 짜릿하듯 말이야. 이건 내가 수백 년을 살면서 터득한 진리이기도 하지.
"그, 그러면 하나 정도는 같이 먹지."
"그럼 2개 사 올게."
나는 와플 가게에 달려가 와플 2개를 주문했다. 가게 주인은 반죽을 부어 와플을 구운 뒤 위에 달콤한 크림을 올렸다. 그리고 시럽은 당연히 초콜릿 맛으로 뿌리고.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잘 가세요."
가게 주인의 인사를 받으며 봉투에 쌓인 와플 두 개를 받고, 주머니에 손을 넣는 척 인벤토리에서 슬쩍 돈주머니를 꺼내 값을 치렀다.
와플의 큼직함과 다르게 가격은 동화 30개로 매우 쌌다.
"이거 받아요."
"고, 고마워."
루진은 큼직한 와플을 받아들고선 어리둥절했다.
"이게 와플인가? 보기에는 빵? 과자? 같은데, 어떤 식으로 먹어야 하지? 포크와 나이프가 없는 걸 봐선 잘 리 먹는 건 아닌 것 같고..."
와플을 보고 포크와 나이프를 쓴다고 생각하다니. 길거리 음식이라곤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을 황녀다운 생각이다.
나는 웃으면서 그녀에게 직접 먹는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
"이건 이렇게. 손으로 들고 먹으면 돼요."
"손으로 들고 먹는다고? 보존 식량 같은 건가?"
그녀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 보여서 그냥 와플을 먹었다. 냐암, 와플을 크게 한입 베어 무니 바삭함과 함께 초콜릿 시럽과 크림의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진다.
어디에서나 익숙한 B급 길거리 음식만의 맛. 디저트로서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다.
"이렇게 먹으면 돼."
내가 먼저 먹은 뒤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도 쭈뼛대며 와플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이런 건 나한테 어울리지 않지만 유진이 권유한 거니..."
그녀는 말하다 말고 오물오물 열심히 와플을 씹었다. 처음 맛보는 길거리 음식이 마음에 드는지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어때, 맛있지? 황금 길드의 식사도 훌륭하지만 이런 길거리 음식도 맛있는 법이지."
"그렇군. 이 와플, 이런 거 낯설지만 길거리 음식만의 풍미가 있군."
그녀는 맛있다는 듯이 와플을 먹었고 그러다가 입가에 크림이 묻었다. 이런 황녀가 입에 뭘 묻히면 보기 안 좋지.
"음? 지금 뭐 하는..."
나는 그녀 입가의 크림을 쓰윽~ 흩어서 치웠다. 그녀의 얼굴이 폭발할 듯 붉어졌다.
'으음…. 순수하네. 엄청 순수해.'
능구렁이 같은 황녀들만 만나다가 이런 참신함을 마주하니 기분이 묘하다. 이대로 흩은 크림을 내가 먹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
찌릿-!!!
그때 살기 가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날 갈기갈기 찢어 죽일 거라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손의 크림을 봉투에 비벼 닦았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뭔가 걸린 것 같아. 나는 긴장하면서 겉으로는 태연하게 행동했다.
"봐봐. 이것도 맛있어."
와플 노점 옆에 있던 닭고기꼬치도 사 왔다. 고기는 잘 구워져 있었고, 소스도 달달한게 맛있다.
그녀는 닭고기꼬치가 마음에 들었는지 웃으며 닭고기꼬치를 먹었다. 그나저나 조금 아쉽네. 여기에 콜라 같은 탄산음료만 하나 얹어주면 완성인데.
아무리 이세계에 현대문물 비스무리 한 게 있어도 콜라같은 음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쉬움을 느끼며 닭고기꼬치를 먹었다.
"잘 먹었다. 다 먹었으면 이제 다른 데로 가자."
"...꿀꺽, 알겠다."
그녀도 마지막까지 닭고기꼬치를 먹은 뒤 나를 따라 가게들이 모여있는 상가로 향하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근데 루진은 황족이면서 왜 길드에 들어온 거야? 황족이면 길드에 입성하지 않더라도 놀고먹을 수 있지 않아?"
대부분의 황족에겐 품위 유지비라는 돈과 함께 적당한 땅이 주어진다. 그 땅 안에서는 황족의 명예와 이름에 먹칠을 하지만 않는다면 무엇을 하든 자유.
그렇기에 많은 황족들이 주어진 땅 안에서 놀고먹으며 지내는 거로 알고 있다. 그녀처럼 황금 길드든 뭐든 일하는 경우는 적은 편이다.
하여튼 그렇게 말하고 나니 뭔가 찔린다. 지금 발언은 너무 주제넘었으려나. 나는 그녀가 화나지 않았나 슬쩍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 말에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딱히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유진의 말대로 대부분의 황족은 일을 하지 않아. 그나마 재능 넘치는 황족들과 황제 폐하이신 내 아버님의 자식들, 그러니깐 내 형제, 자매들이 주로 일하고 있지."
"헤에, 형제랑 자매가 있구나."
"남동생 2명, 여동생 2명 정도 있다. 4명 다 나와는 다른 쪽의 천재들이지."
그녀는 자신의 친족을 언급하며 즐겁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족들과 사이가 좋은 모양인지 계속해서 자신의 형제와 자매를 자랑했다.
"남동생인 제 1황자, 루스 플라비스는 재정자의 재능을 타고났다. 신하들을 쥐어 잡아 최고의 결과를 뽑아내지. 제 2황자인 루가 플라비스는 참모이자 보급관으로서의 재능이 뛰어나다. 몬스터 토벌전이나 다른 나라와의 무력 갈등에서 보급으로 문제가 생긴 적이 없지."
"그거 대단하네."
나는 남자한테는 관심 없지만 둘 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건 맞다. 거기에 그녀의 말대로면 그들은 그녀보다 어릴 터다. 그런데 벌써 실전에서 활약하고 있다니.
"대답하지. 모든 것이 무력에 치중된 나와 다르지만 전부 천재들이다."
"그러면 여동생은 어때?"
마지막으로 그녀의 여동생에 관해 물었다.
"으음…. 내 여동생은, 으음. 확실히 여동생인 루비 플라비스도 천재다. 천재가 분명하다. 혼자의 힘으로 자금을 모아 엄청난 재산을 모으고 그걸 기반으로 사업을 벌이는 건 물론이요. 황족에게 지급되는 돈을 관리하는 직책을 하사받았으니 말이야."
"그건 또 엄청난 재능이네."
어린 나이에 사업을 벌여 성공을 거두다니. 나도 사업을 해본 적이 있기에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하물며 혼자의 힘으로 성공하다니.
황제의 인정을 받아 황족의 재산을 관리한다는 점에서도 루비 플라비스의 재능은 보통 재능이 아니다.
'역시 황가랄까…. 평범한 핏줄이 아니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동생으로 루리 플라비스가 있는데...그놈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도 않군."
까드득-!
그녀를 그리 말하며 이를 갈았다. 이부분은 건드려도 좋을것 없을것 같았기에 나도 스리슬쩍 넘겼다.
그나저나 황족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재능은 가졌다. 좋은 혈통을 닥치는 대로 끌어모아 유지해온 황가다웠다.
"엄청난 재능이지. 하지만 뭐랄까…. 약간의 문제가 있다."
"문제?"
"이 일에 관한 건 비밀이라 말해줄 수 없지만. 하여튼 그렇게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
"알았어."
이 이상은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이야기의 노선을 틀었다.
"일단 너의 가족들의 이야기는 잘 들었고, 네가 황금 길드에 들어온 이유가 뭐냐니깐."
"그건...아, 도착했군."
상가에 도착했다. 그녀가 대답하려 했는데. 그야말로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그리고 상가라서 그런지 어느샌가 주변에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게 보인다. 여기에서 대화 나눴다간 다른 사랑하고 부딪히겠어.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움직였다. 그녀의 손은 굳은살의 흔적이 있었지만, 관리를 잘 받은 건지 무척이나 부드러워서 잡는 맛이 있었다.
"일단 저기로 가자."
근처에 있던 가게 한곳에 들어갔다. 그녀는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가게 안에는 수많은 인형과 액세서리들이 있었다. 목걸이, 반지, 머리핀 등이 보였고 전부 수작업인지 꽤 잘 만들었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가게 안은 둘러보고 있으니 점원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다가왔다. 루진은 딱 봐도 귀티가 넘쳐나니 물건을 팔아먹으려는 거겠지.
"저희 가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고객님. 저희 가게에는 연인들끼리 애정을 나누기 위한 커플 액세서리도 많답니다!"
"커, 커플 액세서리!"
그녀가 커플 액세서리에 관심을 보인다. 이거 의외네. 솔직히 그녀라면 가게의 물건을 보고 시큰둥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여기 이 물건으로 말씀드리자면 서로 백 년의 사랑을 보장한다는 파올레의 꽃을 본따서 만든 목걸이로 연인분과 함께 끼면 100년의 사랑이 보장될 겁니다!"
"100, 100년의 사랑!"
다만 그녀는 이런 쪽에 약한지 화려한 말빨의 점원에게 넘어가는 것 같았다. 그보다 커플 물건 사면서 날 바라보지 말아줬으면 한다.
저렇게 순수한 황녀는 처음인 데다 저리도 순수한 호감은 오랜만이라 어색하다.
찌릿!
그때 다시 한번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걸로 벌써 3번째. 대체 뭐가 목적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무시하자.
"유, 유진. 이걸 나랑 같이 끼지 않겠나?"
그녀가 나에게 목걸이를 내밀었다. 완전히 똑같은 디자인의 커플 목걸이라.
"이건 안돼."
지금 황녀랑 커플 액세서리를 차는 건 급발진이다. 그녀가 나에게 품은 호감이 크던 건 알았지만 그걸 받아주기엔 모르는 게 많다.
하지만 미녀의 호감을 버릴 수는 없기에 나는 점원을 물리고 액세서리 중 괜찮아 보이는 걸 하나 찾아냈다.
"이걸로 하지."
여럿의 루비가 박힌 초고가의 반지.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사파이어로 만들어진 고가의 반지를 선택했다. 점원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아이고, 그 비싼걸! 총 해서 10골드입니다!"
아주 비싸지만 그럴만한 값이 있다. 나는 10골드를 지불하고 반지를 구매했다.
그리고 루진이 날 기대하듯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