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황녀와의 이야기
이세계의 문명과 기술력은 현대에 비견될 만 하다. 디저트나 음식 문화부터 시작해서 변기와 세숫대야 등의 위생시설까지. 그야말로 현대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런 세계라도 현대와 다른 건 있다. 그건 바로 길. 현대에는 중요 도로에 전부 시멘트를 깔고 중요하지 않은 갓길 같은 곳이라도 도로가 구성되어 있어 빠르고 쾌적한 이동이 가능하다.
그리고 운송 수단이 극도로 발전해 이동이 빠르다. 이세계도 운송 수단 자체는 발전했다. 텔레포트 마법이 그러하고, 텔레포트 마법을 각인시킨 텔레포트 스크롤이 그러하다.
문제는 텔레포트 마법은 최상급 마법 중 하나여서 사용하기 극도로 어려워 익힌 마법사의 수가 적고, 스크롤은 매우 비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세계에서 기본적인 이동 수단은 두 다리와 말, 마차 같은 것이다.
말 자체는 내가 귀족일 때 자주 타봐서 타는 법은 잘 안다. 근데 다듬어지지 못한 도로 상황과 맞물리니 지옥이 되었다.
덜덜덜덜덜.
"이런 씨이발."
나는 루진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욕했다. 그녀가 빌려준 명마는 명마답게 신속하게 움직였지만 그만큼 엄청나게 덜컹거렸다.
상인들이 자주 다니는 정규루트로 갔다면 이 정도로 덜컹거리지 않았을 텐데. 루진의 안내에 따라 나는 비정규 루트로 이동 중이다.
이 루트는 목적지까지 빙 둘러서 가야 하기에 마을이나 도시에 들릴 수 없다. 즉, 보급 없이 노빠꾸로 목적지까지 직행하는 길인 것이다.
다니는 사람들은 극히 적고 산적을 만날 일도 없지만 다니는 사람이 적기에 바닥에는 자갈과 돌이 가득하다.
이것들만 없었어도 그렇게 덜컹거리진 않았을 텐데. 나는 안장에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시큰거리는 엉덩이를 꾹꾹 눌렀다.
"역시 경험이 너무 적었나."
내가 쌓은 막대한 경험은 다른 육체에 빙의하거나 새롭게 태어나도 그대로 따라온다. 신 중 한 명의 말로는 이건 이미 내 혼에 각인된 각인이나 마찬가지 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승마의 경험은 내 인생을 통틀어도 그리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겠지. 그래서 그런지 타는 법은 잘 알지만 몸은 어색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불쾌한 괴리감이다. 말을 탈수록 점점 익숙해져 나아지고는 있지만, 그 속도는 더디기 그지없었다.
반면 루진은 달랐다.
"괜찮아? 조금 속도를 줄일까?"
그녀는 나를 걱정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외모처럼 성격도 아름답구나. 나는 고삐를 당겨 그녀에게 붙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빨리 가자."
"그렇다면…. 알았어!"
곧 그녀가 속도를 높였다. 나도 그녀를 따라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달리니 곧 눈앞에 거대한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영롱한 빛깔의 호수에서는 신성력과 함께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루진은 호숫가 근처에서 말을 멈췄다.
"워워-"
나도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었다. 고개를 위로 돌려보니 해가 지는 게 보였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지.
밤에는 어두워서 사고를 당하기 쉽다. 그리고 맹수가 움직이는 최적의 시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묵고 가자."
"여기서 묵고 간다고? 맹수가 많이 다닐 호수에서?"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루진이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그녀는 이곳의 지리를 아는 건지 말을 근처 나무에 묶어두고는 어딘가로 움직였다. 나도 그녀처럼 말을 묶어둔 뒤 따라갔다.
"여기야. 여기에서 묵으면 돼."
그녀가 안내한 곳에는 거대한 천막이 있었다. 그녀는 발의 장갑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신고 있던 신발을 벗고 따라 들어갔다.
천막 안은 넓고 쾌적했다. 호수 근처에 설치되어 있지만 축축하거나 눅눅한 기색은 조금도 없었고, 꽤 오래 설치되어 있던 것 같던데 먼지가 쌓이거나 곰팡이가 피지도 않았다.
"여기 좋네."
하룻밤 묵기엔 최적의 장소, 라는 내 평가에 루진이 이곳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여기는 모험가를 위한 안전구역 중 하나야. 저기 호수에 특수한 신성 마법을 걸어서 맹수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해놨지."
"헤에, 안전구역이라. 그런 게 있구나."
안전구역이란 건 나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신성 마법으로 맹수의 접근을 막는 다라…. 호수의 물을 만져보니 그녀의 말대로 반짝이는 신성력이 깃들어 있었다.
이 정도 수준의 신성력이면 교황이나 성녀는 되어야 할 텐데. 정확히 어떤 원리로 만들어진 건지 궁금하다.
'한번 조사라도 해볼까. 나름 유용할 것 같은데...'
원리를 알아내면 응용, 축소하여 가지고 다닐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가 고민하는 사이 그녀가 주머니에서 야영 세트를 꺼냈다.
"이제 야영 준비하자."
루진이 호수처럼 빛나는 눈동자로 말했다. 마치 기대된다는 듯한 표정. 아무래도 그녀는 야외에서 하는 야영에 환상을 품고 있나 보다.
'야영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 일인데.'
야영은 모든 걸 직접 준비해야 하기에 너무나도 귀찮은 일이다. 뭐, 이번에는 재료가 전부 준비되어 있으니 그렇게 힘들지는 않겠지.
와장창-!
"뭐야!"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루진을 바라봤다. 루진의 아래에 야영 도구가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야영 도구를 만지며 패닉 한 듯 자꾸만 손을 움직인다. 다만 도구 세팅을 하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걸 이렇게 하고, 이건 요렇게...! 으으! 저번에는 잘됐는데!"
"워워, 우선 진정해. 그렇게 흥분하면 될 것도 안돼. 나한테 줘. 내가 할 테니까."
"아, 안돼! 이건 내가 할 일이니 내가 끝내 야만 해!"
"뭔 쓸데없는 데서 고집이야!"
나는 그녀가 들고 있던 프라이팬을 붙잡았다. 그녀는 나에게 프라이팬을 뺏기기 싫은지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이년이?
"할 줄 모르면 그냥 나한에 맡기고 넌 다른 걸 하라고! 그래야 준비가 빨리 끝나지!"
"으읏!"
내 말에 손에 가해지는 힘이 점점 약해진다. 나는 한 번에 힘을 꽉 주어 프라이팬을 가져갔다. 그녀는 프라이팬을 놓친 손을 멋쩍게 쥐며 시무룩해 했다.
"하아, 이거 받아."
나는 그녀에게 물을 담을 양동이를 내밀었다. 원래라면 그냥 식수를 사용했을 테지만 주머니에는 식수가 몇 개밖에 없었다.
내가 마법으로 물을 만들 수도 있지만, 저기에 깨끗한 물이 널려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여기에다 마실 물 좀 담아와. 주머니 뒤져보니깐 생수가 얼마 없더라."
"끄응, 알았어. 맡겨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양동이를 가지고 호숫가로 향했다. 나는 그동안 야영 세트를 설치했다.
간단히, 마석을 통해 작동하는 마력 버너, 프라이팬, 각종 식기, 그리고 꽁꽁 언 냉동 고기와 수프의 분말 가루.
잘 조리하면 그럭저럭 먹을만한 건 나오겠지.
"그리고 다음은..."
텐트 근처에 방호 마도구와 결계 마도구, 서치 및 알림 마도구를 설치했다. 조건은 우리를 제외한 모든 생명체.
"물 가져왔다!"
때마침 그녀가 물을 떠 왔다. 나는 그녀에게서 양동이를 받아 음식을 조리했다.
먼저 적당한 냄비에 물을 붓고, 버너를 통해 끓인다. 꽁꽁 언 고기는 화염 마법을 조절해 천천히 녹인다.
"읏차."
보글보글, 물이 끓을 때쯤 수프의 분말 가루를 넣었다.
"이것 좀 젓고 있어. 난 고기 좀 구울게."
"이, 이렇게 저으면 되는 거야?"
그녀는 어색한 듯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저었다.
"조금만 살살 저어. 스프 다 떨어질라."
"아, 알았어! 이렇게 하면 되지!"
"엉. 그 정도를 유지해."
그 후 나는 고기에 집중했다. 화염을 골고루 뿌려 전신을 익히게 속이 덜 익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요리 경력 100년이 넘는 나에겐 간단한 일이지.
그렇게 노릇노릇, 갈색으로 잘 구워진 고기를 접시에 올려놓고 먹기 좋게 가위로 잘랐다.
때마침 수프도 완성됐는지 그럭저럭 괜찮은 냄새가 풍기었다.
"오케이, 이 정도면 되겠어."
"이제 된 거야? 그만 저어도되?"
"그만하고 잠깐 비켜봐."
나는 그녀를 치우고 국자를 꺼내 수프를 약간 떠서 마셔보았다. 으음, 이 맛은!
"존나 맛없네..."
그렇게 맛없지는 않지만, 최근에 맛있는 것만 먹어서 그런지 극혐이다.
"그, 그렇게나 맛없어!?"
"너도 먹어봐."
그녀의 입에도 수프를 넣어주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수프를 음미하다가 조용히 밖으로 나가 뭔가를 뱉었다.
"나는 오늘 굶도록 하지. 단기적 단식이다."
"헛소리하지 말고 이 고기라도 먹어. 그보다 넌 던전에서 보존식도 먹어봤을 거 아니야."
"먹어봤지. 고기완자 튀김이랑 새우볼 같은 거."
".....?"
고기완자? 새우볼? 그거 아무리 봐도 보존 식량이 아닌데?
아, 얘 황녀지. 아무리 던전이라지만 황녀한테 맛대가리 없는 보존식을 먹일 순 없다는 건가? 그러면 지금은 왜 이런 걸 준거지?
의아해하며 식량을 살펴보니 고기가 들어있던 종이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황가에 진상된 최고급 소고기]
나는 조용히 주머니를 접었다. 왠지 고기 상태가 존나 좋더라니. 이 고기라면 입맛에 맞겠지.
"그러면 잘 먹겠다."
그녀는 먹을 것 하나로 야영의 환상이 산산이 조각났는지 한숨을 내쉬며 고기를 한 점 먹었다. 그리고 입맛에 맞는지 잘 먹는다.
나도 그녀를 따라 수프를 떠서 입안에 넣었다…. 황금길드의 밥이 벌써 그리워지는구나. 근데 어쩌겠는가. 이 세계의 운송수단은 거지 같아서 음식 배달은 꿈도 못 꾸는데.
나는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건 참으며 그렇게 맛없는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그나마 내가 구운 고기는 고기가 좋아서 그런지 잘 구운 것만으로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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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후.
루진이 먼저 보초를 선다고 해서 나는 천막에 누워 잠을 잤다. 그때 물이 찰방거리는 소리가 내 귀를 거슬리게 만든다.
처음에는 작았으나 지금은 아예 호수에 들어가 물놀이라도 하는지 거칠게 찰방거리는데, 이 소리가 뭔지 짐작이 간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슬쩍 천막을 걷었다. 내 예상대로 루진, 그녀가 호수에 들어가 몸을 청결하게 씻고 있었다.
"오, 오오오!!!"
달빛에 비쳐 반짝거리는 호숫가에서 한 손으로 물을 끌어오려 자신의 풍만하기 그지없는 흉기 위에 뿌리고 깨끗한 겨드랑이를 살살 문지르며 닦는다.
그야말로 황홀한 장면이다. 자지는 단단해져 옷 위로 자신의 위용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덮치고 싶을 정도로 새까만 음심이 차곡차곡 쌓인다. 안 되지, 안돼. 지금은 참자, 참는 거야.
나는 음심을 억누르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누웠다. 철썩이는 물소리와 함께 천막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이제 목욕이 끝난 건가?'
그리 생각하니 알몸의 그녀가 절로 떠올라 심장이 쿵쾅대는 것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고 있으니 사르륵, 옷을 입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녀가 내가 있는 천막 안에서 옷을 입는다니. 두 눈이 부르르 떨렸다.
'조, 조금만 볼까.'
나는 결국 아주 약간 눈을 떴다. 그리고 옷을 입던 루진과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