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황녀와의 이야기
"끄으응, 몸이 엄청 당기네."
나는 양팔을 깍지끼고 위로 쭈욱 올리며 간단한 스트레칭을 했다.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맥스웰의 안내를 받아 신전에 모였다. 신전에는 사제와 몇몇 마을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어제는 잘 몰랐는데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불안하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 다양한 생각을 하고 있겠지.
"근데 흑산적이 너희들한테 뭘했다고 했지?"
"네. 저희 마을을 침략해 사람들을 죽이고 여자들은 모조리 납치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명씩 사람 한 명을 바치라고 했죠. 저희는 힘이 없어서…. 크윽!"
맥스웰이 분하다는 듯이 입술을 짓이겼다. 하지만 내 눈에는 어색한 티가 팍팍 났다.
뒤에 서 있는 녀석들도 이 상황에 어찌해야 할지 몰라 표정이 고정되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척 한다.
"그러면 오늘부터 두 분께서 토벌에 나서는 건가요?"
"맞아, 오늘부터 흑산적 놈들을 토벌한다. 그전에 물어볼 게 있는데…. 우리 말고 여기에 온 사람 없었냐?"
흑산적은 악명 높은 놈들로 보통 제국의 근위병이나 상급 길드의 길드원들이 나서서 처리한다.
그리고 산적을 토벌하고 나온 무기를 비롯한 장비는 전부 토벌한 길드에 귀속되는데 거기에 더해 흑산적은 제국의 왕실에서 머리 하나당 1골드라는 거금을 주기에 매우 인기 있는 표적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놈들을 잡으러 온 게 우리가 처음이 아닐 거라 확신한다.
"예, 그 말씀대로 입니다. 그전에 제국의 군위병 분들과 몇몇 길드에서 왔었으나 전원 산에 들어갔다 운명을 달리하셨습니다."
맥스웰의 말에 마을 사람들이 얼굴이 침울해졌다. 이 모습에 나는 검을 뽑아 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황금 길드의 전사! 반드시 적을 물리칠 테니!"
"아아, 믿습니다! 믿고 말고요! 혹시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아니면 도적들에 대한 정보라도!"
"필요 없어. 그런 거 없어도 이미 충분한 정보가 모였거든."
이미 나는 결론을 내렸다. 내 감과 정황상 도적들과 이 마을은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촌장이란 녀석이 너무나도 수상하다.
'뭐, 그건 차차 알게 되겠지.'
산적들의 아지트에 뭐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우리가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당당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우리는 그들의 시선을 가르며 마을을 나갔다. 그리고 마을 밖으로 나오자마자 우리는 산으로 목적지를 정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덧 마을이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유진. 너는 저들의 말을 어찌 생각하나? 진실이라고 보나?"
"아니, 명백히 거짓말이야. 산적들이 공격했다고? 근데 왜 마을의 장벽은 무사할까. 그리고 이런 시골에 뭐 먹을 게 있다고 사제를 배치하겠어."
단어적 의미로 사제란 신을 모시는 성직자를 뜻하지만 동시에 신성력을 자각하여 신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저 맥스웰이란 인간은 신성 마법은 커녕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았고, 신성 마법으로 사람들을 치료할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고로 맥스웰은 사제가 아니야. 그리고 가장 거슬리는 게 황녀인 네가 찾아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거지."
루진은 인기가 매우 많은 황녀지만 그녀의 대외적인 활동은 알려진 게 거의 없다. 근데 우리가 오리란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것도 루진임을? 존나 수상한 점이다.
"그러면 너는 어떡할래? 지금이라도 돌아갈래?"
"아니. 이미 의뢰를 받았는데 돌아갈 순 없지. 산적이 있다는 건 진짜 같기도 하고."
산적이 없었다면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나 피폐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나마 있어 보이는 놈들은 진짜 마을 사람이 아니니 산적이 있긴 있을 거다.
아마도 그들의 목표는 우리를 산적들에게 유인하는 것. 그런 식으로 근위병과 타 길드의 사람들이 당했겠지.
"...찾았다."
발자국. 그것도 사람의 발자국이다. 이런 깊은 산속에 있을 사람은 단 한 명 흑산적뿐. 나는 발자국을 쓰다듬으며 정보를 취합했다.
"발자국이 생긴 흔적과 상태를 봤을 때 몇 분 전인가. 아무래도 놈들은 우리가 있다는 걸 조금도 모르는 모양이야."
"그러면 여기에서부터는 조용히 이동하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숙이고 보폭을 줄였다. 확실히 소리는 줄었지만 이래서야 속도가 너무 느리다.
"그냥 여기는 나한테 맡겨. 내가 갔다 올게."
나는 신발에 새겨둔 기척 차단 기능을 활성화했다. 내 기척이 희미해지자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쉬잇~ 여기에 가만히 숨어있어. 빨리 다녀올 테니까."
"으, 음! 알았어! 만약에 정찰이 끝나면 이걸로 연락해."
"알았어, 넌 여기서 대기하다가 내가 신호 주면 바로 달려와."
나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산을 올랐다. 곳곳에 있는 산적들의 흔적을 추적했기에 본거지를 찾는 건 매우 쉬웠다.
"여기인가."
흑산적의 본거지는 동굴 근처에 나무 울타리를 세워둔 곳이었다.
"흔적도 이어져 있고…. 여기가 분명해."
애초에 산적인 만큼 싸우는 거라면 모를까 흔적을 교란시키거나 지우는 방법은 조금도 모르겠지.
"크하하하하하! 부어라, 마셔라!"
"두목! 오늘도 화끈하시군요!"
밖에까지 말소리가 들릴 정도로 크게 놀고 있군.
그보다 흑산적이면 규모도 크고 여러 습격 사건을 벌이는 만큼 은신 능력이나 자취를 감추는 능력도 뛰어나다던데.
얘네는 뭐지? 나는 근처 나무에 몸을 붙인 채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었다.
두목이란 놈은 허풍을 떠는 걸 좋아하는지 자기의 무용담이랍시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댔고, 부하들은 그걸 또 좋다고 받으며 아첨을 떨었다.
"마, 라떼는 말이야! 흑산적 무리에 들어가 단순한 짐꾼 일이라도 하려면 다른 지원자 놈들이랑 싸워서 한명이 살아남을때까지 서로 죽이고 그랬어 임마! 그리고 나는 언제나 최후까지 살아남았지!"
"오오, 대단하십니다 형님!"
"역시 형님 이십니다! 형님에 비하면 지금 흑산적의 간부들은 별거 아니죠!"
"그 말이 맞다! 내 칼밥으로 먹고산지가 몇년이다. 내 검술과 마력이 얼마나 강력한데 이걸 무시라고 새파란 애송이를 간부에 딱! 앉쳐놓을수 있냐고!"
그들의 역겨운 목소리에 당장이라도 검을 뽑고 쳐들어가고 싶었지만, 이윽고 내가 원하는 정보가 두목의 입에서 나왔다.
"어이, 그놈한테 먹이는 잘 줬냐!"
"예! 오늘도 마을에 있는 사이비 사제한테 공수받은 녀석을 먹이로 줬어요! 맛있게 먹더군요!"
"그래, 그래. 잘했다! 그놈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는 더더욱 강해질 수 있어! 이걸로 우리는 흑산적의 대두목이 되는 거다!"
"우와아아아! 역시 대장님이야!"
나는 거기까지 듣고 눈가를 찌푸렸다. 역시 그 수상한 사제 놈은 산적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자아, 그러면 이제 어떡해할까..."
이왕이면 그놈이라는 걸 확보하고 싶다. 원래는 별생각 없었는데 내 직감이 격렬하게 그놈이란 것에 반응해왔다.
아마 그놈이란 건 이세계의 최종 보스와 깊은 관련이 있겠지. 일단 돌아가서 루진하고 함께 오자.
그리 생각하며 몸을 빼려는 순간 산적 두 명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주변을 경계할 생각인지 짝짝이에 이것저것 뒤섞여 있긴 하지만 강철 갑옷을 입고 있었다.
"잘됐네."
이렇게 되면 굳이 그녀에게 돌아갈 필요가 없지. 저 두 놈을 잡아 정보를 캐내자.
나는 두 놈의 이동 경로를 따라 그들이 본거지에서 어느 정도 먼 곳까지 가도록 기다렸다.
내가 추적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둘은 태평하게 이야기나 나누고 있었고, 나는 때가 됐다 싶어지자 허리춤에서 단검 4개를 꺼내 손에 들었다.
그리고 투척!
콰앙-! 콰과광-!
마력이 담긴 단검은 강철 갑옷을 뚫고 산적들을 찔렀다. 산적들은 단검의 마력이 갑옷을 부수고 피부에 닿자 몸을 부르르 떨더니 기절했다.
털썩
쓰러진 산적들, 나는 조용히 둘에게 다가갔다. 둘의 머리에는 단검이 박혀 있었다.
'얼른 뽑고 다시 가야지.'
일행이 당했으니 돌아오지 않는 동료에 산적 중 몇명이 수색하러 나오리라. 이때 차례차례 각개격파 하면 손쉽게 처리할스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단검을 회수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너 누구냐?"
콰직!
그때 산적 중 한 명이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고 나는 본능적으로 산적의 머리통을 세게 짓밟았다.
콰직!
벌레 터트리는 느낌과 함께 산적의 얼굴이 함몰되었다. 나는 빠르게 단검을 회수하여 뒤로 물러났다.
곧, 같이 단검에 찔렸던 남자가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것에 화가 났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이런 씨이발 새끼가!!! 감히 날 공격해! 죽여버리겠어!"
머리의 상처까지 말끔하게 사라진 산적이 검을 뽑아 들었다. 아무리 마력 사용이 가능한 흑산적이라도 저건 명백히 이상한 상황이다.
"죽어 새꺄!"
우렁차게 소리치며 산적이 검을 휘둘렀다. 일단 제압할까. 나는 산적의 손을 잡고 다리를 발로 깠다.
'단단해!'
제압을 목표로 해서 힘을 줄이기도 했지만, 비정상적으로 다리가 단단해서 별 효과가 없다.
"이새끼야. 이딴 게 나한테 먹힐 것 같냐!"
산적이 크게 소리쳤지만, 다행히 힘에서는 밀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육체만 단단해진 모양이다.
"이거 더 궁금해지네. 대체 뭐길래 이런 거지?"
아마 이놈들의 이상 현상은 두목이란 놈이 언급한 그놈이란 것의 효과겠지.
나는 일단 산적을 밀쳐버렸고, 산적은 뒤로 밀려났다가 시니컬하게 웃으며 제 자세를 잡았다.
"아따, 이 새끼 힘 한번 세네. 너 그놈이지? 마을에 찾아왔다는 새로운 모험자. 그것도 황녀라는 여자와 함께 왔다며."
"...대체 루진이 온걸 어떻게 아는 거지."
"크크크, 그거야 의뢰를 받았거든 그녀를 처리해 달라는 의뢰를! 이런 시골에 처박혀 지내야 했지만, 그 대가로 이런 값나는 보상을 받을 수 있었지!"
산적은 평소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건지 스스로 자신의 가슴을 까 붉은색의 특이한 파편을 들어냈다.
그리고 가슴을 쾅쾅 치며 소리쳤다.
"우리 같은 놈들이라도 이것만 있으면 강해질 수 있어! 그러니 네놈도 죽여주마! 그리고 네놈을 먹이로 바쳐 더 강해지고 말겠어!"
우우웅-
산적의 검에 검붉은 마력이 요동친다. 그 마력은 어딘가 익숙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정보는 고맙다야."
"고맙긴 무슨, 넌 어차피 여기서 죽을 텐데 고마워할 필요는 없!"
"아니. 고마운데."
푸욱!
산적의 가슴에 칼을 박았다. 산적이 눈이 크게 떠지고 나는 빠르게 검을 놀려 가슴을 도려내 붉은 파편을 꺼냈다.
이걸로 강해졌다고?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애초에 이놈이랑 나 사이에는 크나큰 격차가 있었다.
처음에는 제압할 생각이라 힘을 줄여서 그렇지 이미 정보를 다 얻은 상태에서 제압할 필요는 없었다.
"컥! 커억!"
가슴에 바람구멍이 생긴 산적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잔뜩 깔려 있었다.
"흐음, 이건 자수정인가? 아니, 마석과 비슷한 분류 같은데."
나는 죽어가는 산적을 지나치며 붉은 파편을 보았다. 파편 안에는 검은색의 진득한 악의가 가득했다.
이런 건 결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족이나 악마의 것이 분명하다.
"이건 회수할 가치가 충분하군."
단순히 증거 외에도 이 물건은 촉매로도 아주 우수해 보인다. 나는 다른 산적의 가슴에서 이 파편을 적출했다.
두 개 다 크기는 내 새끼손가락만 하지만 안에 깃든 힘은 마석 수백 개 분량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면 이제 이걸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서…. 음?"
화아악-!
갑자기 붉은 파편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편에서 검붉은 힘이 튀어나와 나를 휘감기 시작했다.
과연, 이런 것도 가능한가! 나는 마력을 일으켜 힘을 떨쳐냈다. 하지만 검붉은 힘은 포기할 생각이 없는지 끊임없이 나에게 덤볐고, 나는 그것들을 억눌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것들은 금방 잠잠해졌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반짝반짝 빛나며 불길한 힘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파편 두 개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그놈이라는 것에 뭔가 변화가 일어난 모양이다.
"얼른 가야겠어."
뭔진 모르지만…. 뭔가,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